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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진개]]가 [[고조선]] 후드려패고 만번한까지 진출했을 때, 만번한의 번한이었던 '번한현(藩汗縣)이 이곳에 있다고 비정된 바가 있으나 자세한 것은 그시대 사람들만 알것이다. [[고구려]]와 [[발해]]에선 정확한 이름은 아니지만 박릉군(博陵郡)이라고 하지 않았을까 추측만 할 뿐이다. [[고려]]이전에는 고덕창(古德昌)이라고도 불렸다고 한다. 995년 박릉군에서 박주(博州)로 승격, 방어사가 파견되었다. 1010년 거란이 2차로 쳐들어왔을 때 안북도호부사 박섬이 [[안주시|성]]을 버리고 빤쓰런한 탓에 1차로 초토화되었다. 1231년 1차 몽골침공때 몽골군에게 다시 초토화되었고 치소도 바닷가 어디 섬에 30년간 옮겨졌다. 본토로 돌아온 1261년부터 1371년까지 가주의 속주가 되었다. 1413년 박천군이 되어 지군사가 설치되었으나 세종시대엔 599호 1,035명밖에 안되는 작은 군이 되었는데 1459년 군이 너무 쇠퇴했다는 이유로 [[영변군]]에 편입되었다가 1464년 독립했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1459년 영변에 스까될 때 영변진관에 속해서 병마동첨절제사가 파견되었다. 조선후기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을 때 홍경래가 자기 고향인 가산군 다복동을 근거로 거병하고 거병한지 2틀뒤인 1811년 12월 20일 박천군을 점령했다. 하지만 송림동에서 관군에게 쳐발리고 정주로 후퇴하면서 관군치하로 돌아갔다. 부군면 통폐합 때 안주의 월경지와 가산군의 절반을 흡수하면서 군역이 528.9㎢로 확장되었다. [[6.25 전쟁]]초기, [[평양 탈환]]이후 [[미군]] 제24사단에 의해 [[대한민국]]에 수복되었으나 [[운산 - 영변전투]]이후 순식간에 북괴치하로 다시 넘어왔다. 지금은 핵실험을 위한 [[우라늄]]광산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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