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무위키
조무위키
둘러보기
대문
최근 바뀜
임의의 문서로
미디어위키 도움말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
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
특수 문서 목록
문서 정보
행위
문서
토론
편집
역사 보기
이영훈
편집하기 (부분)
경고:
로그인하지 않았습니다. 편집을 하면 IP 주소가 공개되게 됩니다.
로그인
하거나
계정을 생성하면
편집자가 사용자 이름으로 기록되고, 다른 장점도 있습니다.
스팸 방지 검사입니다. 이것을 입력하지
마세요
!
=== 세종대왕 비판 === 세종대왕이 성군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웃기는 건 이 책은 한글로 썼다. 당연히 개지랄이고 설령 나라를 흔들었더라도 한글 창제한 업적 하나로 전세계의 군주 다 쳐바른다. 세종이 조선의 인구의 절반을 노비로 만들었다고 깐다. 이건 상식적으로 진짜 말이 안 되는 거다. 조선 인구 절반이 노비면 조선은 일본에 먹히기 전에 자멸했다. 팩트는 이영훈 본인이 노비와 노예는 다른 거라고 했다. 사실 이영훈이 세종 시대의 노비 비율을 계산한 방식을 자세히 보면 통계적으로 오류가 심각한 계산이다. 자신의 책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에서 15~16세기 한양 양반 관료는 아무리 미관말직이라 하더라도 노비를 100인 정도는 거느렸다고 주장하며 이 주장을 근거로 비율을 계산했다. 17세기 초반 단성호적을 보면 이 주장이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606년의 단성호적을 보면 종8품 훈련봉사 권설은 노비 5인을 거느리고 있었으며 다른 하급 관리들도 많아야 수십인 수준이었다. 참고로 이 지역은 전란 때문에 노비 비율이 크게 높아졌던 17세기 조선에서도 노비 비율이 심하게 높게 나오던 지역이다. 다른 지역보다 노비 비율이 심하게 높던 단성에서도 미관말직의 양반관료가 100인씩 노비를 거느리고 다니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는데 15~16세기엔 미관말직의 양반관료도 100인씩 노비를 거느리고 다녔다는 주장을 전제로 비율 계산을 한 것은 심각한 오류일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품계가 올라갈수록 노비 수도 많아졌다고 주장하는데 같은 품계여도 가문, 출신 계층에 따라 경제적 사정이 천차만별일 수 있음을 간과한 주장이다. 당시 세종 때의 과거 합격자 분포를 보면 1/3이 비양반 계층 출신이었다. 양반이 아닌 평민 출신의 관료가 상속 받는 재산과 대대로 양반이었던 양반 출신의 관료가 상속 받는 재산이 같겠는가? 당연히 다르다. 여기에 성종 15년에 한명회가 도망 노비의 수가 많다고 주장하며 도망 노비의 수가 100만이라고 말한 것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 후 공노비의 도망률과 당시 추정인구, 그리고 도망 노비가 100만이었다는 발언을 근거로 세조 때의 노비 비율이 전체 인구의 40%였으며 이렇게 노비 비율이 폭증한 원인이 세종의 정책이라는 주장도 했다. 얼핏 들으면 일리 있는 소리처럼 들리지만 당대의 정치적 발언에서 등장하는 수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당시의 인구 구성을 추정하는 근거로 삼는 건 매우 잘못된 접근법이다. 왜냐면 당대 신료들은 자신의 정치적 의견을 관철하기 위해 수를 부풀려서 말하는 일이 비일비재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성종 10년 11월 29일 기사엔 장령 벼슬을 가진 구치곤이 승려의 수가 많아 군사력이 약화되는 것을 지적하며 호패를 받은 승려의 수가 40여만 명이라는 발언을 했으며 성종 3년엔 병조에서 백정의 수가 많은 것을 지적하며 백정의 수가 보통 백성의 수의 1/3~1/4에 이른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또 예종 1년 6월 29일 예조판서 공성지가 조선의 군사가 백만이라고 발언하는 기록이 나오기도 한다. 이런 발언들에서 나오는 수들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성종 재위 기간의 조선은 15세 이상 남성 승려의 수만 40만에 이르는 불교 국가였으며 전체 인구의 최소 20%가 백정인 도축업에 특화된 국가였고 동시에 백만의 대군을 보유한 병영 국가였다는, 병신 같은 결론이 나온다. 참고로 백정의 수의 경우 성종 3년의 군축 기사에서 수를 어느 정도 추측해볼 수 있는데 이 기사에 따르면 [[하삼도]] 군적에 있던 보인에서 전정, 백정, 재인, 장인들을 빼자 정군의 수가 9천 7백이 줄어들었다. 당시 정군 한 명당 붙던 보인들의 수를 감안해보면 저기서 빠진 수가 다 백정이라고 가정하더라도 하삼도의 15~60세 남성 백정의 수는 3만 수준이다. 한 마디로 병조에서 말도 안 되는 수준의 과장을 한 것이다. 승려 수의 경우 세조 때의 도첩 발급 기록을 보면 당시 호적에 등재되어 있던 승려의 수는 대략 8만 정도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신료들이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하는 발언에선 수를 과장해서 말하는게 일반적이였으며 이런 발언들에서 나오는 수를 그대로 받아들이면 심각한 오류가 생길 수밖에 없다. 이런 당시의 분위기를 고려 안 하고 과장된 수를 근거로 계산을 하면 당연히 과장된 비율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리고 세종 재위 기간에 고려 시대에 비해 노비의 수가 크게 늘어났다고 주장하며 노비종모법의 시행과 양천교혼의 방임이 원인이라고 주장했는데, 우선 노비종모법의 경우 애초에 고려 초기부터 유지되던 법이었고, 세종이 노비종부법에서 노비종모법으로 바꿀 때 노비종모법 시행 이전에 결혼해서 낳은 아이들은 모두 노비종부법을 적용해서 이는 고려시대에 비해 노비가 늘어나게 되는 원인이 될 수 없다. 양천교혼의 경우 노비종부법을 통해 양인 수를 늘리고자 할 때만 허용했고 노비종모법으로 제도를 바꾼 후 바로 불법화시켜서 이 역시 노비 수가 증가하는 원인이 된다고 보기엔 어렵다. 무엇보다도 세종 재위 기간에 노비 수가 줄어들었다는 기록은 많아도 사노비가 늘어나고 양민의 수가 줄어들었다는 식의 기록은 아예 없다. 얘 주장대로 세종 재위 기간에 노비가 늘어났다면 왜 당시 기록엔 노비가 늘어났다는 기록이 없고 반대로 노비수가 줄어들어서 신료들이 불만을 나타내는 기록들만 나오는지 의문이다. 슬슬 얘한테서도 [[윤서인|그 코]]의 향기가 진하게 느껴진다. 덕분에 일뽕들은 주제도 모르고 날뛴다. 특히 최근에 노비 이슈로 세종대왕의 과오라며 나대는 새끼는 백퍼 이영훈 책을 무슨 마오쩌둥 어록마냥 신성시하는 식귀병, 식근탈레반이라 보면 된다. 이 글 읽고 팩폭맞고 풀발한 일뽕새끼들의 찬란한 쪽들거림과 함께 반박의 탈을 쓴 온갖 개지랄이 달리겠지만 걸쭉한 뻐큐와 함께 박제해버리도록 하자.
요약:
조무위키에서의 모든 기여는 CC BY-SA 4.0 라이선스로 배포된다는 점을 유의해 주세요(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조무위키:저작권
문서를 읽어주세요). 만약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문서를 저장하지 말아 주세요.
또한, 직접 작성했거나 퍼블릭 도메인과 같은 자유 문서에서 가져왔다는 것을 보증해야 합니다.
저작권이 있는 내용을 허가 없이 저장하지 마세요!
취소
편집 도움말
(새 창에서 열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