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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태 시절 == [[파일:박재용 해태 2.PNG|350픽셀]] 박재용이 재학 중인 단국대는 인현배, [[김홍집]]의 투수진과 3할 타자가 몇 명이나 있는 타선으로 강력한 대학 야구팀이였다. 단국대 4번타자로 활약, 1992년 2차 2라운드로 뽑힌다. 이 때 1차지명한 선수 이름도 박재용인데 한자마저 같다!<ref>계약 포기하고 대학팀에게 양도함</ref> 하지만 계약조건이 맞지않아 박재용은 실업야구팀인 포스콘으로 간다. 2년 후 94년 신인 2차 지명에서 해태가 또 지명하면서 박재용은 해태로 가게된다. 연고팀인 LG와 OB도 버렸고 해태도 사실 박재용의 고교 선배인 김경훈 스카우트의 간청이 없었다면 뽑지 않았을 거라고 한다. 이는 그가 청각장애인이기 때문인데 왼쪽은 선천적인 귀거머리며<ref>4살 때 넘어져 귀를 다쳤다고 하기도 하고 초등학교 때 친구들과 장난치다가 다쳤다고도 한다.</ref> 오른쪽 귀도 청각 능력이 떨어졌기 때문으로 박재용은 사람의 입모양으로 말을 알아듣는다고 한다. 94년부터 주전으로 뛰며 이 해에 2할 5푼을 기록했다. 95년엔 경기 수를 늘려가며 0.285로 괜찮은 성적을 냈지만 좋은 어깨에도 불구, 수비가 좋지 않아 지명타자로 나왔다. 김상훈의 은퇴로 해태의 좌타자는 박재용과 박재벌만이 남았고 [[김성한]]의 은퇴, 주전들의 노쇠화로 막강한 해태 타선에서 간신히 주전으로 뛰었다. 9월 14일, [[조계현]]의 통산 100승 째 경기에서 승리를 확정짓는 투런포를 쐈다. 3년만의 시즌 1위를 확정 짓는 경기에서도 박재용이 한 몫을 하였다. 이 해 중심타선은 [[박재용]]-[[홍현우]]-[[이호성]]을 베이스로 중심타선을 짰는데 유동적이긴 했지만 출전할 때마다 좋은 활약을 보여주었다. [[파일:박재용 96년 한국시리즈.jpg|350픽셀]] 10월 16일,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 역전홈런을 쳤다! [[이종범]]의 부진 등 해태 타선의 부진 속에서 혼자 4할을 쳤으며 우승 후 특별상을 받았으며 월간 말에서 96년을 빛낸 자랑스러운 한국인 중 한 명으로도 뽑힌다. 게다가 지명타자 부문 골든글러브도 타낸다! [[파일:96골덴글라브.PNG|350픽셀]] 여성분([[구대성]]의 부인) 왼쪽의 인물이 박재용이다. 뚜렷한 스타급 선수가 없었기에 손쉽게 딸 수 있었다. 97년, 71.4%가 오른 4800만원에 계약하였다. 4년새 연봉이 4배나 올랐다고. 7월 말, 뇌수막염에 걸렸다. 그 외에 최해식, 장성호 등도 걸렸다고... 97년은 가끔씩 부상이 있어 빠졌지만 끝내기 홈런 등 괜찮은 활약을 하였고 작년과 마찬가지의 이유로 골든 글러브를 따낸다. 11월 29, 30일날 해태의 자금난 때문에 백화점과 슈퍼마켓에서 일일 판매 캠페인을 하였다. 98년은 400만원이 오른 5200만원에 계약했다. 어린이날 삼성전에서 결승타점을 만들어냈다. 이후 부진하다가 좌타 신성 [[장성호]]의 활약으로 밀려났다. 99년 외야엔 브릭스, 1루-지명엔 샌더스가 차지하는 등 외국인 타자들에 밀려 2대 2 트레이드로 쌍방울 레이더스로 가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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