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무위키
조무위키
둘러보기
대문
최근 바뀜
임의의 문서로
미디어위키 도움말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
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
특수 문서 목록
문서 정보
행위
문서
토론
편집
역사 보기
원산시
편집하기 (부분)
경고:
로그인하지 않았습니다. 편집을 하면 IP 주소가 공개되게 됩니다.
로그인
하거나
계정을 생성하면
편집자가 사용자 이름으로 기록되고, 다른 장점도 있습니다.
스팸 방지 검사입니다. 이것을 입력하지
마세요
!
== 연혁 == 1878년 개항 이전까지의 역사는 [[덕원군]]을 참조. 1878년 4월,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면서 일본군은 [[부산]], [[인천]]과 함께 이곳을 개항장으로 설정했고, 1880년 7월 정식으로 개항되어 일본 영사관이 설치되고 일본인이 살기 시작했다. [[을사늑약]] 이후 원산에 이사청(理事廳)이 설치되고 일본인 거류민단이 조직되면서 일본인 거주지가 빠르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때 원산에 살던 한국인들이 이들에 대항하기 위해 한국 최초의 근대교육기관인 원산학사를 세웠다. 본래 원산 일대 개항장만 원산부로 분리되었던 모양새였는데, 모종의 사건으로 덕원군 전체가 원산부에 통폐합되었다. 이후 1914년 [[부군면 통폐합]] 때는 다시 개항장 지역만 원산부로 분리하고 덕원군이 부활했다. 1914년 8월, [[경원선]]이 개통되어 동해안의 풍부한 수산물, 농산물, 광산물이 서울로 빠르게 운송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고 이후 1927년 동해북부선, 1928년 함경선, 1941년 평원선이 순서대로 개통되면서 관북 지역 최대 교통의 요충지가 되었다. 본래 지금의 [[옥천군]]과 같은 물류 창고가 가득한 운송도시였지만 [[만주사변]] 이후 원산에 수없이 많은 공장이 세워지면서 당대 노동자와 자본가들이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고 일부 친일 자본가들 중엔 원산의 공장을 소유하여 떼돈을 버는 사람들이 아주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은 온통 공장 천지였으며 그 방대한 공업단지 덕분에 초창기 [[북한]]이 잘 살 수 있었다. [[김일성|김씹새]]가 이렇게 쩔어주는 공업단지만 똑바로 굴렸으면 북한은 아마 못살아도 [[동유럽]] 수준으로 ㅍㅌ치는 동네가 됐을지도... 그리고 공장이 깔리면서 도시가 커짐에 따라 1942년, 덕원군이 폐지되고 적일면, 현면이 원산부에 흡수되었다. [[소련군정]]이 수립되면서 공산군 치하로 넘어갔는데 당시 분계선이었던 38선 이북에서 [[강원도]]의 도청 소재지였던 [[철원]]이 전방으로 변하자 [[강원도(북한)|강원도]]의 병신화를 막기 위해 원산을 필두로 하여 [[고원군]] 이남의 3군이 강원도로 편입되었다. 하지만 [[김일성|김씹새]]는 바로 눈 앞에 보이는 욕심에만 눈이 멀어서 6.25 전쟁을 일으켰고 이때부터 공업단지였던 원산은 미군의 잇따른 [[네이팜탄]] 폭격으로 인해 불지옥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초창기엔 정유공장과 같은 공단만 불태웠기 때문에 피해는 덜했다는듯? [[인천상륙작전]] 이후 [[국군]]과 [[유엔군]]이 북진을 시작했을 때, 상륙작전뽕이 치사량에 달했던 [[더글러스 맥아더]]는 인천에 상륙해서 서울로 갔던 10군단을 '''다시 배에 태워 남해안 찍고 원산까지 재상륙시킨다!'''는, 보통 지휘관이었으면 바로 총살당했을 막장스런 북진안을 내놨다. 때문에 서울에서 먼저 추가령구조곡을 따라 북진한 [[국군]] 1군단은 1950년 10월 14일 원산을 수복한 뒤 10월 29일까지 금 같은 시간을 낭비해야 했다. 암튼 10월 29일 원산에 상륙한 미 10군단과 함께 국군 1군단은 원산을 넘어 [[문천]], [[고원군|고원]], [[고원군#수동읍|수동]], [[영흥]], [[정평]] 찍고 [[함흥]]을 넘어 [[함경도]]로 진격했다. 하지만 [[청천강 전투]]에서 [[국군]] 2군단과 [[미군]] 8군단이 참패하면서 생긴 공백을 따라 중공군이 원산을 점령했고 결국 이때부터 다시 빨갱이 치하로 넘어갔다. 결국 함흥과 [[장진호 전투|장진]]에서 고립된 국군과 미군은 [[흥남 철수|수만 명의 피난민과 함께 배를 타고 철수했다]]. 배를 타고 철수한 유엔군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원산을 향한 무차별 폭격을 진행했다. 이 무차별 폭격은 휴전협정이 체결되는 1953년 7월까지 이뤄졌는데 이 폭격으로 인해 원산은 [[피지]] 뽑고 난 뒤 구멍 난 코처럼 삭제당했다. 얼마나 폭격이 대단했는지, 1951년 기준으로 이곳에 12시간 이상 머무르거나 잠을 자는 것은 사망을 의미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때문에 일부가 살아남은 덕원신학교 같은 극히 일부의 건물을 제외하면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요약:
조무위키에서의 모든 기여는 CC BY-SA 4.0 라이선스로 배포된다는 점을 유의해 주세요(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조무위키:저작권
문서를 읽어주세요). 만약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문서를 저장하지 말아 주세요.
또한, 직접 작성했거나 퍼블릭 도메인과 같은 자유 문서에서 가져왔다는 것을 보증해야 합니다.
저작권이 있는 내용을 허가 없이 저장하지 마세요!
취소
편집 도움말
(새 창에서 열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