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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이전 === 지금은 제철소와 공단으로 뒤덮인 겸이포읍에서 신석기유물이 발굴되었다. 이후 심촌리, 고연리에서 청동기시대 주거지 5곳이 발견되었고, 정방산에서 탁상식+기반식이 스까된 200기이상의 지석묘군에서 간석기, 세형동검, 오수전등 여러 종류의 청동기유물이 출토되었고 이때부터 주요 청동기문화 중심지가 되었고 [[고조선]]의 땅이 되었다. 고조선멸망이후 [[한나라]]는 지금의 흑교면지역에 둔유현(屯有縣)이 설치되었다. 이때부터 황주군 남쪽에 있는 고개인 '''자비령(慈悲嶺)'''이 평양으로 가는 교통의 요지가 되서 그런가 [[공손강]]시기 대방군을 신설할 때, 이 현이남의 7개현지역 황무지를 대방군으로 분리했다. 미천왕시기 [[고구려]]를 점령하면서 고구려땅이 되었다. 한동안 둔유현이라고 불렸겠지만 시간이 지난 뒤 우동어홀(于冬於忽), 동홀(冬忽)이라고도 불렀다. [[나당전쟁]]승리이후 [[대동강]]남쪽에 속하여 [[신라]]의 땅이 되었고 [[경덕왕]]시기 취성군(取城郡)으로 개명되었다. 하지만 실제로 군이 설치된 것은 아무리 잘쳐줘도 [[헌덕왕]]시기였다. [[후삼국시대]]가 한창인 905년, 황주(黃州)로 개편되었고 황보제공의 땅이 되었지만 패서호족들이 [[궁예]]와 함께 활동하면서 후고구려땅이 되었다가 궁예띨망이후 [[고려]]로 편입되었다. 이후에도 한동안 황보씨가 이지역의 머튽으로 군림했다. 983년 [[최승로]]의 건의로 전국 12목이 파견될 때 본주에 황주목이 파견되었고 993년 절도사가 파견되면서 천덕군절도사(天德軍節度使)가 파견되었고, 관내도에 편입되었다. 1012년 절도사가 폐지되고 안무사가 파견되었다가 1018년 목이 파견되었다. 이후 5도 양계로 지방제도가 정비되면서 [[황해도|서해도]]에 속했고 황주자체는 [[봉산군|봉주]], [[신천군|신주]], [[중화군#現 북괴령 상원군 지역|토산현]]을 속현으로 거느렸다. 1217년 [[거란]]군의 침입을 막지 못했다고 고령군(固寧郡)으로 강등되었다가 후에 황주목으로 복귀되었다. 이때 잠깐 [[평안도|서북면]]에 속했다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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