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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인물}}{{정잘알}}{{황제}} {| class="wikitable" style="text-align:center" |align="middle" colspan="5" style="color:white;background-color:black" align=center|'''[[오현제|{{색|white|오현제}}]] ''' |-align="middle" |[[네르바]]||[[트라야누스]]||하드리아누스||[[안토니누스 피우스]]||[[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 {| class="wikitable" border="1" rules="none" |- |align="middle" colspan=2|[[파일 : Bust Hadrian Musei Capitolini MC817 cropped.jpg|크기|300픽셀]] |- |align="middle" style="background:#228B22; color:#FFFFFF; font-weight:bold; text-align:center" colspan=2|<big>'''하드리아누스''' |- |align="middle" style="background:#FFFFFF; color:#FF0000; font-weight:bold; text-align:center"|'''출생''' | [[76년]] [[1월 24일]] 히스파니아 속주 이탈리카? 로마? |- |align="middle" style="background:#228B22; color:#FFFFFF; font-weight:bold; text-align:center"|'''즉위''' | [[117년]] [[8월 10일]] |- |align="middle" style="background:#FFFFFF; color:#FF0000; font-weight:bold; text-align:center"|'''사망''' | [[138년]] [[7월 10일]] |- |align="middle" style="background:#228B22; color:#FFFFFF; font-weight:bold; text-align:center"|'''국적''' | [[로마 제국]] |- |align="middle" style="background:#FFFFFF; color:#FF0000; font-weight:bold; text-align:center"|'''가족''' | 친부 푸블리우스 아일리우스<br>친모 도미티아 파울리나<br>양아버지 [[트라야누스]] |} [[로마 제국|로마]] 5현제 시대의 황제중 세번째 황제. 본래 히스파니아출신의 평범한 흙수저였으나 트라야누스가 그의 후견인이 되면서 로마로 이사를 갔다고 하는데... 암튼 18살 20인 위원이 되면서 정계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양아버지였던 황제의 푸시로 의전서열 2위인 보좌 집정관까지 존나 많은 관직을 임했다. 또한 장군으로 임명되어 하부 모이시아, 판노니아, 게르마니아를 지키기도 하고 트라야누스의 [[루마니아|다키아]]원정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양반은 [[고기방패]]로 써먹으면 되지 왜 굳이 쳐먹어서 이지랄이냐면서 다키아 포기드립까지 치는등 트라야누스의 확장정책에 겐세이를 놓으면서 트라야누스와 대립하게 되었다. 그래도 트라야누스의 마누라인 프로티나가 보호해준 덕분에 밥그릇을 지키는데 성공. 이후 [[파르티아]]전쟁에 불려갔다가 프로티나의 지지로 [[시리아]]총독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실질 목적이었던 [[아르메니아]], [[메소포타미아]]를 완전 정복하는데 실패, 빡친 트라야누스가 로마로 돌아가던 도중 객사하자 프로티나의 지지를 받아 황제가 되었다. 즉위후, 수세위주로 대외정책을 실시했다. 개판 5분전이었던 아르메니아와 메소포타미아는 깔끔하게 포기하는 대신 가나안, 북아프리카, 갈리아, 게르마니아, 다키아, 브리타니아등 국경지역에 엄청나게 많은 성과 요새를 쌓아 국경방어력을 증강시켰다. 뿐만 아니라 군제를 개혁하고 직접 군바리들을 사열하는등 기존 군사력을 증강시키는데 열중했다. 영국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경계지역에 있는 하드리아누스 성벽이 이 때 세워진 물건이다. 여러 방면에 재능을 보였던 황제로 [[아그리파]]가 세웠던 [[판테온]]이 화재로 소실된 후 이를 재건한 것도 하드리아누스였다. 다만 원래 건축자인 아그리파를 존중하는 뜻에서 아그리파가 세웠다는 명문을 남겨두었다. 그리스 빠돌이이기도 해서 자기 권력으로 아예 아테네에 신도시를 하나 건설한 후 '여기서부터는 내 도시임.'이라는 개선문까지 세웠을 정도. 이 신도시는 오늘날에도 유적으로 남아있으나 하필이면 고대 그리스 시절의 아고라와 매우 가까운 위치에 있어서 똑같은 그리스 유적인줄 알고 지나친다는 안습한 이야기가 있다. 성격은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었는데 이중적인 면모가 매우 심했다. 평상시에는 친절하고 밝은 성격이었지만, 자신의 심기를 건드리거나 기준을 넘어서면 무서울 정도로 냉혹하고 잔인해졌다.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언행을 기록한 '황제 실록'에 따르면 '성격은 복잡하고 변덕스러웠다.'고 남겼으며 나이 먹고 노인네가 되어선 이게 더 심해져서 '노친네 성격 한 번 드럽게 까칠하네.'란 식으로 적혀있을 정도다. 여러모로 가까이하긴 어려운 성격이었고 젊은 시절에 트라야누스 황제의 측근들과 대립각을 세웠던 것도 이런 성격탓이 컸다. 노인이 된 후에는 추하게 더 사느니 정신이 멀쩡할 때 목숨을 끊으려고 호신용 단검으로 여러 차례 자살을 시도했으나 주변 사람들이 단검을 빼앗아 막어버리자 자신의 주치의에게 독약을 제조하도록 명령했다. 하드리아누스의 순방길에도 함께 했던 이 주치의는 존경하는 황제의 명령을 거부할수도 없고, 그렇다고 정말로 독약을 내줄 수도 없으니 결국 자신이 제조한 독약을 스스로 먹고 자살해버렸다. 하드리아누스는 그제서야 자살 시도를 그만두었지만 성격이 더 꼬여서 주변 사람들을 괴롭혔다. (나중에는 정신을 차렸는지 안토니우스 피우스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작성한 자서전에선 '그런 소동을 일으켜서 미안하다'고 반성을 적었다) 사르비우스 율리아누스로 하여금 『영구고시록(永久告示錄)』이라는 법전을 만들었는데, 이 법전은 131년에 완성되어 수백년 뒤 [[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이를 고쳐 로마법대전으로 바꿀 때까지 로마법의 근간이 되었다. {{인간도살자}} {{인용문|예루살렘은... 어... 그거는 야휀지 뭔지 말같지도 않는거 믿는 폭도들이 일으킨... 하나의 그... 폭동이야 근데... 그러니까 로마군이기 때문에 우리가 진압하지 않을 수 없잖아?}} 국경지역을 요새화하는동안 과거 60년에 일어난 [[윾머인]]들의 반란으로 초토화된 [[예루살렘]]을 로마식 이름인 '아일리아 카피톨리나'로 바꿔 재건하고 132년 윾머인의 [[할례]]를 금지했다. 윾머인들은 할례금지에 반발해 반란을 일으켰으나 하드리아누스는 예루살렘은 하나의 폭동이야 드립치면서 인근지역 군대를 끌고와 밀어버렸다. 윾머인 반란 진압이후 윾머왕국자리에 세워진 윾다이아 속주는 시리아. 팔레스티나속주로 개명되었고 예루살렘과 윾머지역에 살던 윾머인들을 로마 제국 각지로 이주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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