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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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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요 == 서양 역사에서 절대권력과 황제의 대명사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카이사르 생전에 스스로 황제를 자처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그렇다고 권력을 양보하고 그런 건 없었다만... 세줄요약의 창시자라고 한다. 왔노라 Veni 보았노라 vidi 이겼노라 vici 황제를 뜻하는 단어인 카이저, 차르는 카이사르의 독일어식 표기, 러시아어식 표기이다. 제왕절개에서 제왕이 이 사람이다 이후 유럽에서 황제 하면 카이사르를 떠올리며, 제왕의 상징으로 [[독수리]]를 즐겨 썼는데, 정작 카이사르는 본인을 상징하는 동물을 [[코끼리]]라고 생각했다. '카이사르'라는 성씨가 [[카르타고]]어로 코끼리를 뜻하는 단어에서 나왔다는 이야기가 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니발 바르카]] 같은 이미지를 얻기 위해서 이 이야기를 차용했다는 듯 하는 말마다 멋있는 말을 내뱉는다. 글도 잘썼다고 한다. 라틴 문학의 두 명의 거장 중 한 명인데 나머지 한명은 그의 라이벌이었던 카토이다. 카토가 격식을 차린 글을 잘썼다면 시저는 간결하면서 깔끔한 문체를 구사하는데 재능이 있았다한다. 갈리아전기의 저자인데 하는 짓거리를 보면 당대 켈트인들의 재앙이다. 간지나는 대사로 유명한 '주사위는 던져졌다.'는 의외로 씁 어쩔 수 없지 라는 자포자기 심정으로 내뱉은 말인데. 이유를 따져보자면 그 당시 카이사르는 원로원에게 국가의 적으로 지목당하고 공화정을 무너뜨리지 못하면 자신이 죽을 상황에 처해있었기 때문이였다. 군대를 로마로 진주시킨건 그가 처음이 아니다. 이미 그 전에도 마리우스나 술라의 군단이 로마 시내로 진군한 적이 있었다. 차이점이라면 술라랑 마리우스의 경우에는 장소가 한정된 단기전이었지만 카이사르의 그것은 이후 지중해 전역에서 벌어지는 본격적인 내전으로 비화됐다는데에 있다. 당시 원로원은 갈리아에 가있던 카이사르가 군대를 통솔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달리 강경한 처분을 내렸는데 이는 당시 로마에 있던 폼페이우스가 만약 카이사르가 반역한다면 자신이 로마의 바닥을 발로 한 번 내려치는 신호를 보내면 사방에서 자신의 군대가 모일 것이라고 호언장담을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막상 진짜로 카이사르가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들어오기 시작하자 폼페이우스와 그의 끄나풀들은 할 수 있는게 없었다. 이 때 몇몇이 폼페이우스에게 어서 발로 바닥을 치라고 야유를 했다고 한다. 어쨌든 없던 병력이 어디서 솟아나는 건 아니기에 당장 그리스로 튀었고 여기서 폼페이우스가 원로원의 이름을 빌려 모병을 실시하자 본격적인 내전의 막이 올랐다. 로마에 입성한 카이사르는 반대파가 그리스로 튀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내전의 준비를 서둘렀다. 이 때 로마의 국고를 관리하던 관리에게 열쇠를 내놓으라고 요구하자 이 용감한 관리가 거부했다고 한다. 그러자 카이사르는 그의 용기를 치하하면서 재차 요구했으나 그래도 거부하자 더 이상 안주면 죽여버린다고 협박하여 얻어냈다고 한다. 이후 카이사르는 히스파니아의 폼페이우스 세력을 일소하여 후방을 확보한 후 그리스로 넘어간다. 최종 목적지인 그리스에 상륙하는 데에 폼페이우스의 해군이 방해를 하면서 난관을 겪고 패배도 하지만 결국엔 상륙한다. 폼페이우스 측에 비하면 결원이 많아 병력 수는 적었지만 근 10년간 실전을 계속 치뤘던 정예병력이라는 점이 승리를 가져다주게 된다. 폼페이우스는 그리스로 넘어간 후 겨울 캠프를 차려 병사들을 혹독하게 훈련시켰지만, 현대에도 실전을 겪어보는 게 전투력에 있어 큰 차이가 나고, 냉병기를 사용하던 시대에는 경험의 차이가 더 컸다는 점을 고려하면 양쪽 세력의 전투력 차이는 어마어마하게 컸다. 속전속결로 빠르게 끝내야 했던 카이사르는 디라키움 포위전이라는 수를 던졌지만 적보다 더 적은 병력으로 포위를 하는 건 무리수였고 포위망이 집중공격으로 무너지면서 패배하게 된다. (이 때 장교들은 다시 포위망을 꾸려 볼 것을 건의했지만 카이사르는 의미가 없다고 보고 진을 거두었고, 일반 병사들은 패닉에 빠져 신참들이 보는 앞에서 꽁무니를 뺐다는 사실에 부끄러워하며 힘든 노역을 자처했다) 이후 테살니아로 진격하는데, 무슨 이유에선가 종래의 지구전 방식을 버리고 폼페이우스 군이 결전을 벌이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파르살루스에서 한바탕 회전이 벌어진다. 이 전투 당시 병력은 폼페이우스 측이 유리했으나 질적 차이가 너무 컸기에 폼페이우스는 대패하고 이집트로 망명을 시도한다. 문제는 폼페이우스 사절들이 파라오의 정예병으로 남아있던 폼페이우스의 옛 부하들을 찾아가 옛 상관 밑으로 되돌아오라는 쓸데없는 바람을 넣었다는 것. 폼페이우스가 살아있는 이상 어디로 가든 내전은 계속될 것이라는 건 분명했고 사절들의 이런 행동은 폼페이우스의 망명 의도를 의심하던(아직 세력권으로 아프리카가 남아있었으나 굳이 망명지로 이집트를 골랐다는 건 이집트를 자기 손에 넣고 전쟁을 계속하겠다는 의도로 보기 충분했는데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오늘내일 할 정도로 상태가 메롱했지만 엄연히 수백년을 이어온 왕조였다) 이집트 권신들은 폼페이우스를 암살할 음모를 꾸몄고 폼페이우스는 죽는다. 이후 폼페이우스 측에 남아있던 아프리카에서 탑수스 전투가 벌어져 폼페이우스파의 거물들 대다수가 전사하거나 항복하면서 사실상 내전은 종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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