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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권때부터 봉직 == [[파일:감녕.jpg|300픽셀]] [[감녕]] 자 흥패. 아마 여기서 가장 유명한 네임드. 젊어서 익주 파군에서 관리를 지내고 천거되어 촉군승으로 임명되었으나 오래 지나지 않아 관직을 버리고 본군으로 돌아갔다. 사람됨이 싸움을 잘하고 무리를 끌고 다니기 좋아했기에 동네 건달들을 모아 우두머리 노릇을 하고 수적단을 만들어 인근에서 행패를 부렸다. 비단으로 돛을 맨다고 해서 금범이란 말의 유래가 되었다. 또한 물소 꼬리로 만든 깃발을 등에 지고, 손에는 활을 들고, 허리에는 항시 큰 구리방울을 달고 다녀 사람들은 감녕의 구리방울 소리만 들어도 몸을 사렸고, 이게 감녕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 성격이 포악하여 사람을 죽이기를 좋아했다. 두목 노릇을 20년 동안 하며 보니 점차 성격도 누그러지고 제자백가의 책을 가까이하여...는 페이크고 [[유장]]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실패하고 부하들을 데리고 형주로 가서 유표에게 의탁했다. 이후 황조의 푸대접을 받아 손오로 귀순. 남군 공방전 당시에 이릉성을 탈취하지만 곧바로 조인이 보낸 몇 배나 되는 적군에게 포위당하게 되었다. 병사들이 모두들 두려움에 떨고 있었는데 감녕만은 태연자약하게 있었다. 이것이 고사성어 담소자약의 유래. 익양대치 때는 [[노숙]]에게 병사 5백을 요청하여 관우에게 대항하겠다고 말해 노숙이 가려 뽑은 병사 1천을 받아 강을 지켰고 관우는 이를 보고 '흥패가 강을 지키는구나' 하고 강을 건너지 않고 관우뢰를 만들었다. 유수구 전투에서는 감녕이 단 100명의 군사로 야습을 성공시켜 그나마 좀 체면치레를 했던 관계로 손권은 '조조에게 장료가 있지만 나에게는 감녕이 있으니까 충분히 승산이 있다.'라고 자랑스러워 했다. 215년에 죽어 병사는 반장이 이어받는다. 정사에선 이렇지만 연의에서 이릉대전까지 가서 멋지게 싸우다 죽는데 그의 시신을 까마귀가 감쌌다는 간지 묘사가 있다. 덕분에 관우급으로 네임드 신은 아니더라도 그 지역에서는 지역신 급으로 숭배받는다. [[파일:능통.jpg|300픽셀]] [[능통]] 자 공적. 아버지 [[능조]]는 오나라의 손책과 손권을 2대에 걸쳐 섬겼는데 황조 토벌때 감녕이 활을 쏴 죽였다. 당연히 능통은 감녕을 원수로 여겼다. 당시 능통은 15세였는데 손권은 능통을 별부사마에 제수하고 파적도위를 겸임하여 아버지의 병사를 거느리게 했다. 손권이 보둔과 마둔을 공격할 때 능통도 따라갔는데, 손권은 보둔을 함락시키고 마둔에는 병사 1만을 남긴 채 능통과 장이에게 포위를 맡기고 돌아갔다. 208년에 능통은 황조 토벌전에 따라나서 복수를 하려고 했다. 능통은 동습과 함께 몽충을 이끌고 돌격했으며, 적장 장석을 베고, [[여몽]]이 적의 수군을 패배시킨 틈을 타서 능통은 먼저 그 성을 공격하여 크게 노획하는 등의 전과를 올린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원수인 감녕이 그 전에 투항해 버려서 손권의 신하가 되어버리는 바람에 복수는 물 건너 갔고 아버지의 원수인 감녕을 증오해 감녕은 항상 능통을 경계하고 만나지 않았다고 한다. 손권 역시 능통에게 한을 품지 말라고 명령했다. 어느 날 여몽의 집에서 연회를 열었는데 능통이 칼춤을 췄다. 감녕이 이에 일어나서 자신도 쌍극무를 출 수 있다고 말했다. 여몽은 분위기를 눈치채고 자신도 칼과 방패를 쥐고 칼춤을 춰서 두 사람의 거리를 벌렸다. 후에 손권은 능통의 의도를 눈치채고 감녕을 멀리 떨어진 곳으로 주둔하게 했다. [[적벽대전]]에도 참가했으며, 남군전투에서 주유가 감녕을 구원하러 갈 동안 본거지를 무사히 지켰다. 능통은 어진 선비와 가까이 지내며 재물은 가벼이 여겼다. 또한 공손하고, 수하를 잘 대했고 의를 중시했으며 주로 불리한 시점에서 후위를 맡거나, 불리하지 않아도 닥돌이 필요한 상황에서 먼저 창들고 뛰어가는 역할이었기에 손권이 크게 신임했다고 한다. 이후 합비 공방전에서 영혼까지 털리고 도망치던 손권을 수하의 300명을 이끌고 죽을 힘을 다해 구원했고 29살에 요절했다. 손권은 크게 슬퍼하고 능통의 두 아들인 능열과 능봉을 궁 안에 거둬 양육했다. 연의에선 감녕과 화해하지만 정사에선 끝까지 서로 화해 안 했다. [[파일:서성.jpg|300픽셀]] [[서성]] 자 문향. 손권에게 등용되어 병사 200으로 황조의 아들 황역이 이끄는 수천 군사의 침공을 물리쳤고, 남쪽의 산월을 쳐서 중랑장으로 임명되었다 한다. 또 213년 조조가 유수구에 쳐들어왔을 때에는 동습과 함께 수군을 이끌다가 폭풍을 맞아 배가 적의 해안가에서 좌초되었다. 서성은 그대로 적을 향해 돌진하여 적을 흩어 버린 뒤 바람이 그치자 돌아왔다. 손권은 서성을 매우 칭찬했다. 합비 공방전에서는 싸우다가 부상을 입고 창을 잃었는데, 이를 하제가 되찾아왔다. 조비가 형정을 보내 손권을 오왕에 봉하자 서성은 그 자리에서 위나라 사신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치욕스러워 할 정도로 대담했다. 충직한 인물이었지만 주태, 장흠과 반목했다는 일화 역시 남아 있다.그 뒤 이릉대전에도 참전했다. 222년 [[전종]], [[하제]], [[여범]] 등과 동구에서 [[조휴]]의 군사와 분투했으며, 여기서도 폭풍우를 만나 익사한자가 수천 명에 다다랐다고 한다.하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전종 등과 끝까지 분전했고, 하제의 전함을 보고 조휴는 철수한다. 224년 [[조비]]가 직접 오나라 정벌군을 일으켰을 때에는 나무에 갈대를 입혀 성과 누각인 것처럼 보이게 하고 전함을 많이 띄워 위군을 속여, 놀란 조비가 군대를 철수시켰다. 황무 연간(222~229년)에 죽었다. 연의에서는 서성과 정봉이라며 세트로 활동하지만 실제로는 정봉이 한세대 쯤 뒤 인물이다. [[파일:반장.jpg|300픽셀]] [[반장]] 자 문규. 난폭하고 사나운 성격으로 술을 좋아해, 젊을적에 가난하지만 언제나 술을 즐겨 마셨다. 손권을 섬기면서, 219년 [[관우]] 토벌에서 [[주연]]과 협력하여 관우를 사로잡았다. 222년 이릉대전에도 참전해 풍습을 죽이는 큰 공적을 세웠다. 촉의 대장인 [[풍습]]을 죽였을 뿐만 아니라 유비군에게 헤아릴 수 없는 사상자를 안겨주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이릉대전에서는 맹활약했다. 조비가 오나라를 대대적으로 침공했을 때 강릉에서 [[제갈근]]과 함께 [[하후상]]을 상대했다.229년 손권이 황제로 오를 때 우장군에 제수되었다. 반장은 시장 운영에 뛰어나, 반장이 시장의 감독직을 맡으면서 도난, 상해사건이 없어졌다. 또한 전쟁이 일단락되면, 군대가 관리하는 시장을 열었고, 기타 부대에서 물품 부족이 있다면 모두 반장의 시장에서 보충했다. 반장은 이런저런 일에서 범죄 행위를 자주 되풀이했다. 강한 물욕으로 금전에 집착했고, 신분에 맞지 않는 복장을 좋아하며, 자신의 밑에 부유한 관리나 병사를 살해해 재산을 몰수하는 등의 인간쓰레기 급 불법행위를 자주 일으켰다. 그러나 손권은 반장을 사람으로 아낀 것이 아니라 공적만 아낀 것이다. 반장이 죽고 반장의 아들 반평이 단지 행실이 불량하다고 손권은 반평을 촌동네인 회계로 쫓아낸다. 그놈의 비뚤어진 인간성 때문에 반장은 오나라에서도 출세하는 데에 한계가 있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이 전투에서 관우의 망령에 놀라는 사이에 [[관흥]]에게 끔살당한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것은 연의의 창작이다.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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