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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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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넥센 히어로즈''' == ==='''2008 시즌'''=== [[파일:강정호 우리 히어로즈.jpg]] 3월 10일 [[현대 유니콘스]]가 해체되고 [[우리 히어로즈]]로 선수단이 인계된 이후 1군에서 본격적으로 두각을 드러내어 그 해 1군 116경기에 출장했다. [[강정호]]는 초반에 2루수로서 활동했는데 [[허구연]], [[이효봉]], [[이용철]] 해설위원으로부터 당시 최고 2루 수비범위를 자랑하던 '2루수 [[고영민|고병신]]' 그 이상의 재목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야구선수 중 글러브에서 공을 빼는 속도가 가장 빨랐고 어깨가 강했기에 그런 평을 들었는데 팀 내 유격수 [[황재균]]이 너무 수비를 못했고 [[강정호]]를 2루수로 키우기에 그의 강한 어깨가 너무 아까워서 유격수로 전향시켰다. [[강정호]]가 유격수를 보고 나서 [[이광환]]감독과 [[이순철]] 수석코치뿐만 아니라 타 팀 감독인 [[김성근]], [[김경문]], [[조범현]]감독으로부터 [[넥센 히어로즈|넥센]] 팀의 내야가 완전히 달라졌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였다. [[강정호]]의 야구재능을 엿볼 수 있었던건 당시 팀의 배터리코치였던 [[장채근]] 코치는 포수로 키우면 엄청난 선수가 될거라고 장담하였는데 [[이광환]] 감독은 장차 최고 유격수가 될 선수를 뭐하러 포수로 전향시키느냐고 반대하며 유격수로 붙박았다. 포수했으면 메이저 못갔을수도? [[강정호]]는 5월까지 1할대 초반일 정도로 엄청나게 타격을 못해서 '수비만 잘하는 그저그런 선수' '수비용 전용 유틸플레이어' [[이광환]] 양아들이라는 비아냥을 들었다. 그런데도 [[이광환]]감독은 뛰어난 안목을 보이며 [[유지현]]뿐만 아니라 [[박진만]]보다 훨씬 낫다고까지 말하며 비판 받으면서도 [[강정호]]를 꾸준히 기용했다. 결국 6월들어 타격이 완전히 살아나면서 후반기 타율 3할8푼 6홈런 30타점을 기록했고 시즌 최종성적 타율 2할 7푼 1리 8홈런 47타점을 기록하여 팀의 주전 유격수로 자리잡았다. 이 시즌 [[강정호]]는 골든글러브 수상자였던 [[박기혁]]보다 뛰어난 타격 능력을 보였고, 내야 모든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는 발군의 수비 능력까지 보이며 리그를 대표하는 대형 유망주로 떠오르게 된다. 당시에 가장 핫한 유망주로서 타 팀 팬들의 트레이드 블록으로 자주 거론됐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고원준]], [[황재균]]하곤 달리 안팔려나감. ==='''2009 시즌'''=== [[파일:강정호 히어로즈.jpg]] 2009년 [[WBC]]가 끝나고 [[박진만]]의 은퇴등으로 [[박기혁]]이 공백을 메웠으나 길게 볼 선수는 아니었고 [[최정]]이 땜방유격수로 나섰으나 최악의 수비실력을 보여주며 차기 국가대표 유격수 부재에 대한 한국 언론들의 질문이 거셌다. 당시 국가대표 감독이었던 [[김인식]] 위원장은 "국가대표 유격수를 뭐하러 걱정하느냐? 차기 국가대표 유격수에 [[강정호]]가 있다"는 발언을 하며 주목을 받았다. 전년도의 활약 덕분에 초반부터 [[넥센 히어로즈]]의 주전 유격수로 활동하였다. 이 시즌 초반에는 극심한 타격 부진이 있었으나 6월부터 타격감을 끌어올리기 시작하여 타율 2할 8푼 6리 23홈런 82타점의 유격수로 엄청난 시즌 성적을 남기며, 2003년 [[홍세완]] 이후 6년만에 유격수 20홈런을 달성하는 대기록을 세웠다. 참고로 이는 최연소 유격수 20홈런 기록이었다. 거기에 팀내 백업도 없이 홀로 유격수 전경기 출장이라는 대기록도 세운것이라 더욱 더 대단했다. 이로써 이전 시즌부터 보이던 타격에서의 잠재력을 증명했고 수비면에서는 내야수로서 리그 최고급의 공빼는 능력, 강한 어깨, 빠른 송구능력을 지닌 선수로 평가받았다. 2009년 하지만 이런 대기록과 함께 자살,보살 압도적인 1위,유격수 war 1위,전경기 유격수출장 기록을 세우고도 유격수 부문 골든 글러브 수상에 실패했다. 이는 수상자인 [[손시헌]] 본인조차도 [[강정호]]가 골든글러브를 탈 줄 알아서 꽃을 들고 축하해주러 왔는데 미안하다고 말했을 정도로 이례적인 결과였다. 이 수상논란으로 인해 골든글러브를 바꿔야 한다는 논란이 계속되었다. 한편 [[이순철]] 해설위원과 [[이효봉]] 해설위원은 [[강정호]]가 [[이종범]] 이후로 최고 유격수가 될 자질을 갖춘 선수라고 언급하기도 하였다. ==='''2010 시즌'''=== [[파일:강정호 히어로즈 10시즌.jpg]] 한국프로야구 유격수 부문을 대표하는 내야수로 성장했다. 그 전해 골든 글러브 수상 실패로 더더욱 절치부심하여 시즌 성적 타율 0.301에 12홈런, 58타점을 기록했다. 타율은 생애 최초로 3할을 넘겼으나 손목 부상과 기타 잔부상 등으로 인해 홈런이 절반 가까이 급감했다. 하지만 이 성적은 [[브룸바]], [[황재균]], [[덕 클락]], [[이택근]]의 이탈과 온갖 잔부상이라는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홀로 팀 타선을 이끌며 이뤄낸 가치있는 기록이었다. 더불어 2년 연속 유격수 전경기 출장이라는 대기록도 함께 세웠다. 2000년 [[박진만]](23)의 [[골든글러브]] 수상때와 마찬가지로 최연소로 2010년 골든 글러브를 수상했으며, [[광저우 아시안 게임]] 국가대표팀에도 선출되어 투수코치로 차출된 [[김시진]] [[감독]]과 함께 참가해 13타수 8안타 3홈런 8타점 OPS는 무려 20할의 맹타를 휘둘렀다. 특히 대만과 맞붙었던 아시안 게임 결승전에서는 2홈런 5타점을 기록하고 유격수와 3루수로서 결정적인 호수비를 펼치며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의 금메달 획득에 큰 기여를 해서 병역면제를 받았다. 아시안 게임의 대활약으로 [[추신수]]와 함께 최고의 'hot'한 타자로서 지목되며 [[MLB]]는 물론이고 미국 스포츠 방송인 CBS나 ESPN에도 이름을 올리는 등 주가를 한참 올렸다. 이후 대만을 상대로 국가대표팀에서 매우 강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어서 대만 현지에서도 "가장 경계해야 할 대한민국 타자" "대만 킬러"라는 별명을 붙이며 언론에 많은 관심을 받았다. ==='''2011 시즌'''=== [[파일:강정호 히어로즈 11시즌.jpg]] 2010년 아시안 게임에서의 대활약으로 시즌전부터 엄청난 주목을 받았고 메이저리그 500홈런 타자 [[게리 셰필드]]로부터 엄청난 손목 힘과 천부적인 야구재능을 가진 한국 최고의 유격수라고 평가받기도 했다. 시즌 초반 기대를 가지고 팀의 4번 타자의 중책을 부여받았으나, 부진한 타격을 기록했고 더해 본헤드 플레이를 저질러 문책성으로 2군에 잠시 내려갔다 오기도 하였다. 1군 복귀 이후에는 4번 타자 자리를 [[알드리지]]와 [[박병호]]가 맡으면서 원래 타순이었던 5, 6번타자로 돌아가게 된다. 그 이후에는 성적을 다시 끌어올려 2할 8푼 2리 9홈런 62타점으로 시즌을 마감했고 유격수 war 1위에 오르는등 다른 팀 유격수가 커리어하이 찍고도 남을 성적을 기록했다. 하지만 [[강정호]] 이름값에 비해 너무 못했고, 당시 [[넥센 히어로즈|히어로즈]]가 꼴찌를 기록하면서 [[이대수]]에게 밀려 골든글러브 수상에 실패한다. 당시 한화의 [[이대수]]가 9월에 대폭발하며 3할 타율을 달성하는 활약과 연습생 신화로 골든글러브를 수상하게 되었다. ==='''2012 시즌'''=== [[파일:강정호 히어로즈 12시즌.jpg]] FA로 친정 팀에 돌아온 중견수 [[이택근]]과 1루수로 정착한 [[박병호]]와 함께 [[클린업 트리오]]를 이루어 강력한 타선을 구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본인은 정작 장레몬에 이어서 탑성으로 갈뻔했다. 팬들과 언론에서는 이들의 이니셜을 본떠 LPG 트리오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LPG ㄹㅇ 존나 무서웠음. [[강정호]]는 유격수인데도 엄청난 장타력을 뽐내며 팬들로부터 [[알렉스 로드리게스]]의 별명 [[A-로드]]를 본 떠 [[K-로드]]라는 별명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약쟁이랑 비교하다니 모욕이였는데 이새끼도 술빨면서 적절한 별명 됨. 또한, 80년대 [[김재박]]- 90년대 [[이종범]]을 잇는 대형 유격수 계보에 오르기도 하였다. 칩찰사새끼들이 자꾸 상수를 끼워넣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상수가 좄이 되며 결국 2010년대 최고의 유격수는 얘가 맞음. 6월 19일까지 엄청난 페이스로 19홈런이나 친 [[강정호]]였으나 부상인데도 불구하고 무리하게 출전을 감행해 [[봉와직염]]을 악화시켰다. 팀이 점점 4강권에서 밀려나자 감독 생활동안 단 한번도 가을야구를 못나간 무능한 빙시진이 [[강정호]]를 관리해주지 못하고 무리하게 기용한 이유도 있었다. 홈런왕 1순위 후보로 뽑히며 승승장구하던 [[강정호]]였지만 한동안 부상으로 홈런 침체기에 빠짐. 근 2달동안 홈런을 치지 못했지만 커리어하이인 25홈런을 기록하였다. 또 2012년 9월 18일 잠실 LG전에서는 2도루를 추가하며 유격수로는 해태 시절의 [[이종범]]에 이어 두 번째로 [[20-20 클럽]]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2위권 유격수들과는 OPS 차이가 3할~5할 이상 나는 등 누구도 대적할 수 없는 압도적인 성적을 남기며 [[평화왕]]이란 별명도 얻었으며 이러한 성적을 바탕으로 [[강정호]]는 총 투표수 351표 중 324표라는 가장 많은 차이의 득표로 2번째 골든 글러브를 수상하였다. 또한 RF(레인지팩터),수비율 1위에 올라 ADT캡스 최고수비왕, ADT캡스 베스트 수비수, KBO 베스트 나인으로 선정되며 상이란 상은 모두 휩쓰는등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 ==='''2013 시즌'''=== [[파일:강정호 히어로즈 13시즌.jpg]] [[기술위원]]들이 대표팀에 가장 먼저 뽑아야 될 선수로 거론되며 [[WBC]] 대표팀에 선발되어 주전 유격수로 마지막 경기인 대만전에서 역전 2점홈런을 치며 승리에 공헌했다. 하지만 2승 1패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대표팀은 득실점 차로 예선에서 탈락하게 되었다. [[WBC]]가 끝나고 [[류중일]] [[감독]]의 비판과 비난이 연일 여론을 장식했으며, [[강정호]]의 역전 홈런은 슬픈 홈런으로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이대호]]는 앞으로 국가대표 참여에 대해서 자기보다 후배들이 뽑혔으면 하는 바람을 드러내고 그 중심엔 자기 대신 [[강정호]]가 해결사 역할을 해줄것이라고 장담하였다. [[WBC]]에서의 체력여파와 부상등으로 프로야구 정규리그에서는 타격성적이 전체적으로 전년도에 비해 하락했지만 수비에서는 수많은 하이라이트 장면을 만들어 내며 한층 더 발전된 모습을 보였다. 또 타점은 개인커리어 최다인 96타점을 기록하며 [[넥센 히어로즈]]의 창단 첫 포스트시즌 진출에 공헌했다. 한편 시즌중에 [[디트로이트 타이거즈]]의 스카우터뿐만 아니라 [[워싱턴 내셔널스]], [[필라델피아 필리스]], [[미네소타 트윈스]],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피츠버그 파이어리츠]]등등 수많은 메이저리그 스카우터들이 [[강정호]]의 플레이를 체크하기 위해 목동구장을 방문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강정호]]는 2008년부터 2013년까지 6년 연속 유격수 WAR 1위를 기록했으며 RF(레인지팩터),수비율에서도 1위에 올라 수비에서도 탑이라는 평가를 들었다. 이런 압도적인 성적을 남기며 총 321명중 294명의 표를 받아 큰 차이로 2년 연속 골든글러브를 수상했으며, 전년도에 이어 2년 연속 ADT캡스 최고 수비왕, ADT캡스 베스트 수비수, KBO 베스트 나인을 싹쓸이 하였다. ==='''2014 시즌'''=== [[파일:강정호 히어로즈 14시즌.jpg]] 4월 9일 목동 [[KIA 타이거즈]]와의 경기에서 1회말 상대투수 [[박경태]]를 상대로 2점홈런을 쳐내면서 개인 통산 100홈런을 달성하였다. 6월 18일 광주 [[KIA 타이거즈]] [[김진우]] 상대로 20홈런을 쳐내며 한국 유격수 최초로 3년 연속 20홈런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하였다. 시즌이 갈수록 성적이 좋아지며 팀내 경쟁자인 홈런 선두 [[박병호]],다승왕 및 방어율왕 [[밴헤켄]]을 제치고 MVP 유력 후보로 떠오른다. 올스타 투표에서는 선수들이 뽑은 최고의 선수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2014년 8월 2일 잠실 [[LG 트윈스]] [[코리 리오단]]을 상대로 1997년 [[이종범]] 이후 무려 17년만에 역대 2번째인 유격수 30홈런을 달성하였다. 전날 우천취소로 하루 쉰 [[강정호]]는 결국 2014년 8월 4일 잠실 [[LG 트윈스]] [[신정락]]을 상대로 유격수 최초로 31홈런을 기록하였다. 이날의 홈런으로 팀은 6-4로 졌지만 언론에서와 TV에서는 온통 [[강정호]] 기사를 내보낼 정도로 이례적인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이후 2014년 8월 27일 목동 기아전에서 [[김병현]]을 상대로 역전 홈런을 때려내 [[홍세완]]에 이은 두번째 유격수 100타점이자 역대 최초 유격수 30홈런 100타점이라는 기록을 세운다. 9월 28일 결승 대만전에서 2:3으로 뒤지던 8회 초 1사 만루 상황에서 몸에 맞는 공으로 밀어내기 동점을 얻어 내며, 최종 스코어 6:3으로 대한민국 승리의 발판을 마련한다. 1달 가까운 부상의 공백과 우려에도 불구하고 [[아시안 게임]] 최종 성적은 18타석 14타수 5안타 2홈런 7타점 5득점 4사사구 타율 0.357 출루율 0.500 장타율 0.929 OPS 1.429((홈런,타점 전체 선수 1위)을 기록, [[아시안게임]] MVP후보로 뽑히며 한국의 금메달 기여에 큰 공헌을 했다. 팀에 복귀후 부진한 모습을 보였지만, 시즌 최종전이었던 10월 17일 극적으로 40홈런을 달성해내면서 유격수 최초 40홈런의 금자탑을 쌓았다. 시즌 내내 맹활약을 펼치며 역대 유격수 시즌 최다 홈런, 최다 타점, 최고 출루율, 최고 장타율, 최고 OPS기록을 다 갈아치우며 MVP 후보에 올랐다. 2014년 플레이오프에서는 15타수 8안타 2홈런 4타점 5득점 2사사구, 타율 0.533 출루율 0.588 장타율 0.933 OPS 1.521을 기록하며 창단 역사상 팀을 최초로 한국시리즈에 진출시키며 플레이오프 MVP에 선정되었다. 2014년 한국시리즈에서 손승락이 무사만루를 막고 강정호 쪽으로 공이 가는데... 그 결과는 너무나도 참혹해서 적지 않겠다. 시즌 종료 후, 골든글러브 투표에서 총 321표중 305표를 득표, 득표율 95프로로 최고 득표율을 기록했으며 3년 연속 골든글러브 수상을 기록하였다. 12월 15일 메이저리그 진출을 위해 포스팅 시스템을 실시했고, 그 결과 [[피츠버그 파이어리츠]]가 500만 2015달러를 제시하며 [[독점협상권]]을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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