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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일전쟁 때 일본군에게 무기조공 == {{배신자}} 국사교육과 많은 역사서에서는 병기사(兵器史)에 관심이 없기 때문에 거의 다루지 않는 부분이지만 고종이 일본군에게 3개대대급의 무장을 그냥 조공한 적이 있다. 많은 사람들은 대한제국군이 화승총과 조총 따위로 무장하고 있을 거라고 잘못 생각하는데 이 시기 대한제국군은 충분히 근대화되어 있는 군대였고 무장수준은 일본이 경악할 정도였다.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했을 때 그거 재탈환하려는 병력만 따져도 소총(강선총) 3천정과 야포 20문, 개틀링 기관총 8정을 보유하고 있었다 한다. 이 정도면 현대로 따져도 씨발 3개대대는 완편하고 남는 수준이다. 고작 야포 20문이라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이거 19세기다. 수도방위만 생각해보면 전술적으로 충분히 유의미한 전력이다. 그러나 고종은 전투를 지시하긴커녕 그냥 군대해산하라고 명령내리고 덕분에 근대식 군대를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놓쳐버렸고, 이 아까운 무기들은 고스란히 일본군의 손에 넘어가 청나라와 싸우는데 쓰였다. 씨발? (참고로 1907년 대한제국 군대해산과는 다른 사건이다.) 그리고 결국 일본군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함으로서, 대한제국의 자발적인 무장해제는 동아시아 국가 간의 균형을 붕괴시키는 나비효과를 일으킨다. 사실 수도에도 이 정도의 병력과 무장이 있는데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러 상당수의 병력이 남하한 상태였다. 그곳에서도 야포와 개틀링으로 동학 농민군을 격퇴했다는 사료가 남아있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최소한 전술단위적으로는 유의미한 병력규모가 유지되고 있었다고 봐야 한다. 심지어 중국을 통해 독일제 무기를 수입하고 있었기에 부분적으로는 일본군보다 앞서고 있었다. 야포 20문이면 5km밖에서 보병사단 1개정도는 눈깜짝할 사이에 일소할 수 있다. 일본군은 좆선보다 훨씬 큰 나라인 청일전쟁 때도 평양성 전투에서 고작 1만 7천의 병력밖에 동원하지 못했다. 이것도 대한제국이 일본군이 상륙하고 보급하는걸 멀거니 눈뜨고 쳐다만 봐서 가능했던거다. 애초에 바다 건너 전선을 유지한다는게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만약 대한제국군이 필사적으로 일본의 상륙과 보급을 방해했다면 이것보다 훨씬 못한다고 봐야 한다. 보급이 무제한적으로 이루어지는거랑 민병대, 게릴라수준의 산발적 저항이라도 보급선에 타격이 있을거라고 예상되는 상황은 난이도가 차원이 다르다. 자국 땅에서 무제한적으로 보급을 받는 상황에서 전면전을 벌였으면 어땠을까? 말하자면 열강일본 vs 좆약소국좆선이라는 일반적인 인식과는 달리, 만약 대한제국과 일본군이 전면전을 붙는다 하더라도 일본군의 무혈 승리를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던 거다.(좀 나중 일이긴 하지만 이탈리아도 훨씬 약소국인 에티오피아에게 보급난항으로 개처발린 전적이 있다) 솔직히 일본상대로 이길 거라는 건 생각하기 어려워도 최소한 근대국가로서의 군대를 마련할 단초정도는 되었을 것이다. 근데 이런 병력도 다 날려버린게 고종이다. ㄴ ㄹㅇ이다 그냥 청나라에 붙어서 보급로만 끊으면서 견제했어도 쪽본은 ㅈㅈ다. 러일전쟁도 다이겼다고 하지만 막상 남은건 빚더미뿐이었는데 전쟁 장기지속이 가능한 국력이 아니었다. 물론 평양성 전투 때 동원한 병력이 그렇다는 것이고, 청일전쟁 내내 동원한 병력은 30만명 정도로 추산된다. 이 때 대한제국군은 절대로 일본군을 이길 수 없었다. 다만 대한제국군이 격렬하게 저항했다면 일본도 막심한 피해를 감수했어야 할 것이고 그렇게 피해를 감수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애초에 청나라와의 세력균형이 깨질 것을 우려하여 상황 자체를 회피할 가능성이 높다. 중요한 건 최소한 반항하겠다는 제스처를 취했어야 하는데 그 최소한의 제스처조차 없었다는 것이다. ㄴ 종합해서 보니 고종새끼 일본군한테 존나게 물심양면으로 도움줬네? 그래서 나중에 한일합방때 왕공족으로 분류되서 품위유지비 존나 받아쳐먹을 명분이 이때 생긴듯. 애초에 대원군은 방계 왕족이지만 깡그지였다. 세도정치 세도가들의 잔칫상에서 밥 얻어먹을 만큼 무시당하면서 밑바닥에서 구르다가 집정자의 위치까지 혼자 오른 치밀하고 지독한 새끼였고 프랑스군 함대의 무력시위 때 같은 전쟁판이 벌어질 때 깡다구도 부릴 줄 알았다. 그런데 고종이건 광무제건 뭐라고 부르건 상관없이 이 새끼는 그 독종이자 자수성가한 아버지 덕분에 팔자에도 없던 왕 자리에 앉은 녀석이다. 물론 내치 측면에서는 칭찬할 만 하나, 이 시대에 맞는 리더십과 배짱. 즉, 전쟁판이 벌어질 때 해야하는 판단을 정말 못했다. 그리고 전쟁판 속에서 권력을 잡았던 일본 군부는 고종의 이 약점을 매우 잘 알았다. 결과론적이지만 고종이 중공 침략을 받을 시기의 베트남 공산정부나 제국주의 시대의 태국처럼, 아니면 직전 자기 아버지가 서양군에 하듯 교환비가 나오지 않더라도 일단 뻐기는 깡다구라도 부릴 줄 알았다면, 그래서 점령하기에 좆같은 지역이라서 점령이익이 적고 손해가 크다는 인식이라도 좀 주었다면 중립지역으로나마 남아 농사지어서 일본 배 불려주는 씹병신짓은 하지 않고 자기 원래 영토에서 황제놀이는 하며 지 좋아하는 커피랑 식도락 또한 마음껏 즐길 수 있었을 것이다. 한국에도 이익이었고. 아쉬운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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