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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쿠보 히로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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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 시절== ===데뷔전=== 와카야마 현 와카야마 시에서 태어나 와카야마 시립 세이와 중학교에 입학하여 야구부에 소속되었다. 와카야마 현립 세이린 고등학교를 거쳐 아오야마가쿠인 대학에 진학, 도토대학 리그에서는 통산 40경기에 출전해 타율 2할 9푼 1리, 8홈런, 23타점을 기록했다. 1993년에는 팀의 주장으로 발탁되어 처음으로 대학야구 우승에 기여했다. 1992년에 대학생으로서는 유일하게 바르셀로나 올림픽 야구 일본 국가대표팀 선수로 발탁되면서 예선 리그에서는 2개의 홈런을 때려냈다. 후에 메이저 리그에서 활약하는 노마 가르시아파라나 제이슨 지암비가 소속된 미국과의 맞대결에 승리하여 동메달을 획득했는데 여기서 고쿠보는 선제타를 포함한 2개의 적시 2루타를 때려내면서 팀 승리에 기여했다.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와의 경합 끝에 다이에 호크스를 역지명했고 프로야구 드래프트 회의에서는 2순위로 지명받아 입단했다.(근데 결국 선수생활은 요미우리랑 다이에에서 다 했다). 등번호는 9번으로 배정되었고 연봉은 1200만 엔과 계약금은 최고 금액인 1억 6,000만 엔이었다 ===프로 입단=== 1994년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지금의 소프트뱅크 호크스)에서 데뷔하여 이듬해 곧바로 홈런왕, 골글, 베스트9을 휩쓸었고 1997년에도 타점왕을 수상했다. 이후 꾸준히 4번타자로 뛰며 호크스의 암흑기 탈출, 2차례의 리그 우승과 1999년 일본시리즈 우승을 이끌었지만 2003년 부상으로 시즌아웃을 당했다가 시즌 종료 후 요미우리로 이적하여 2004년부터 2006년까지 요미우리에서 뛴 이후 2007년 모기업이 소프트뱅크로 바뀐 호크스로 복귀해 2012년까지 선수생활을 지속했고 2011년에 사상 최고령(40세) 일본시리즈 MVP까지 수상한 뒤 2012년 통산 2000안타를 치고 은퇴한다. 통산 홈런도 413개나 깠다. 여담으로 이승엽의 전임 요미우리 4번타자이기도 하다. 하지만 둘다 4번타자로 뛸때 팀성적은 좆씹창이었다. 선수생활 내내 유리몸으로 개고생했다. 선수생활을 하면서 크고 작은 부상을 여러차례 달고 다녔고 2번(1998, 2003)이나 큰 부상으로 시즌을 말아먹었다. 2003년엔 아예 1경기도 못 나왔는데 이해 호크스는 4번타자가 시즌아웃당하는 참사 와중에도 느프브 역대 최고 팀 타율 .297과 4명의 100타점 강타자를 낳은 다이하드 타선을 앞세워 퍼시픽리그와 일본시리즈를 씹어버렸다. 당시 호크스가 얼마나 강팀이었는지 설명 가능한 일화. 부상만 없었으면 더 쩌는 성적을 보여줬을지도 모르고 호크스를 떠나는 일도 없었을지도 모른다. 1997년 일본프로야구 탈세 사건으로 깜빵행 신세가 되기도 하였다. 주범으로 연루되었었다니 그럴만도... 당시 연루된 선수들 중 탈세액수가 가장 많아서 처벌을 가장 무겁게 받았다고 한다. 2004년 요미우리로 급작스레 이적하게 된 이유는 고쓰카 다케시 구단 사장과의 불화가 원인이었다. 특히 미국에서의 약 2,000만엔이 드는 치료비와 도항비용을 구단에서 일체 지불해 주지 않아서 고쿠보가 결국 자비로 비용을 치룬 게 결정타였는데, 미국에서 일시 귀국한 6월 경에 고쿠보는 자유 계약을 하겠다는 의사를 다이에 구단 측에 전했다. 그리고 무상 트레이드가 된 이유는 당시 나카우치 다다시 구단주가 현금 트레이드의 배분을 고쿠보의 연봉에 추가해달라는 내용을 요미우리 측에 전달했다고 한다. 참고로 저 고쓰카 사장이란 양반은 사업 실적은 좋았지만 구단 프런트나 선수들을 무시하고 독선적인 행보로 악명이 높았는데 이 양반 때문에 고쿠보를 비롯한 유능한 선수들<ref>지금 소뱅 감독인 [[구도 기미야스]]가 2000년 FA로 요미우리로 떠난 이유가 고쓰카가 전해(1999년) 연봉협상 때 "니가 등판하는 화요일은 사람 안와서 매출 꽝이다" 라고(즉 니 연봉 올려주기 싫다는 의미) 지껄여서 빡친게 원인이라고 한다. 참고로 구도는 99년 리그 MVP까지 땄는데도 저런 소리를 했다</ref>, 스카우트를 포함해 심지어 구단 대표였던 세토야마 류조까지 다른 팀으로 떠나는 결과를 낳았다. 결국 2004년에 여성사원에게 성추행을 한게 걸려 체포당하면서 구단 사장에서 짤리고 제대로 인실좆당했다. 하필이면 이 소식이 우승 퍼레이드 다음날 전해지면서 팀 동료와 호크스 팬들, 그리고 일본 야구계 전체에 큰 충격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다이에 선수들이 집단으로 우승기념 여행을 보이콧하는 사태로 번지는 등의 후폭풍을 가져왔다. [[파일:고쿠보 빠던.GIF]] 요미우리 선수시절 빠던을 시전하는 모습. 상대투수는 닛폰햄의 에지리 신타로.<ref>3수까지 해서 와세다대학에 간 근성가이다. 닛폰햄에서 데뷔한 뒤 요코하마를 거쳐 소뱅에서 선수생활을 마쳤다.</ref> 에지리는 저날 고쿠보한테 이 움짤의 투런 홈런을 포함해서 3안타나 쳐맞고 3.2이닝 7실점으로 개털렸다. === 커리어 === 통산 2041안타 413홈런 2011년 일본시리즈 MV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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