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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후 = 그라쿠스 형제 개혁이 실패로 돌아가긴 했지만, 사회적 파장이 엄청났다. 일단 그라쿠스 형제 때문에 로마 공화정에 축적된 폐해들이 수면 위로 다 떠오르게 됐다. 특히 동생인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형처럼 끔살 안당할려고 온갖 지지 기반을 마련하려고 애썼는데, 그 결과 온갖 종류의 법안을 제안하게 된다. 일단 형이 만든 농지법 되살려서 농민들 지지 확보하려했고, 도시 빈민들에게 곡물 분배하는 법 만들어서 도시 무산자층 지지 확보하려했고, 당시 떠오르는 신흥 계층인 에퀴테스(기사)들에게 배심원 자리 주는 법 만들어서 이들의 지지 기반도 확보하려했고, 동맹시에도 시민권을 확대하는 법 만들어서 동맹시의 지지 기반도 확보하려했다. 당연히 그라쿠스가 뒈짖하고 원로원에서 싹다 다 씹어버리자 이해관계에 있던 사람들은 다 빡칠 수 밖에 없었다. 특히 동맹시에게 시민권을 주는 문제는 똑같은 전쟁에 나가 피를 흘렸음에도 그 열매는 먹어보지도 못한 동맹시들에게 안 그래도 가득 차 있던 불만에 기름을 끼얹는 격이었고 이 안건이 백지화되자 참다못한 동맹시들은 로마에서 독립을 선언하고 정부와 군대를 조직해 동맹시 전쟁을 벌인다. 오랫동안 로마와 함께 싸웠던 동맹시들이었으므로 로마군의 편제를 그대로 활용해 로마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전쟁 중반에 동맹시에 시민권을 부여하는 안건이 통과되었으나 반란은 계속되었고 마리우스와 술라가 등장하고 나서야 전쟁이 끝났다. 전쟁 후에는 새로이 시민권을 받은 동맹시민들에게 선거구의 배정문제를 두고 보수파와 민중파가 대립하게 된다. 민중파는 이들에게 로마의 선거구 전체를 배분하려고 했으나 보수파는 전체 35개 선거구 중 단 4개만을 배정하려고 했다. 또한 급부상하던 술라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마리우스와 킨나가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들어와 보수파들을 숙청하고, 그 다음에는 술라가 동방에서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 본토로 진입한 후 민중파 인사 9천 명의 살생부를 작성해 숙청하는 사건이 터지면서 로마의 정치판은 그야말로 피를 피로 씻는 막장사태가 터졌다. 이는 공화정 말기의 사회문제를 생각하면 심각한 사태였는데, 당시 자영농이었던 로마의 중산층이 상류층의 지나친 토지 겸병으로 인해 자기 소유의 땅을 잃고 빈민으로 몰락했다. 본래 로마 군단병은 경제력이 있는 중산층을 징집하는 게 원칙이었지만 중산층이 완전히 몰락해 빈민들 밖에 없었기 때문에 빈민들이 대거 군대로 유입되었고(마리우스의 군제개혁) 이로서 군대는 일반 대중의 의견을 간접적으로나마 대표하는 조직이 되버린다. 또한 이들이 제대를 한 후 생계 유지를 위해서는 자신의 총사령관에게 의지할 수 밖에 없게 되어(땅이란 땅은 전부 원로원의 높으신 분들이 다 먹고 있어서 일반 병사들에게 돌아갈 땅은 한 줌도 없었다)군대의 사병화를 초래한다. 이는 폼페이우스, 카이사르 같은 이들이 등장하면서 원로원 중심의 정치 체제를 무너뜨리고 끝내는 원수정(프린키나투스)로 가는 길을 열게 됐다. 그라쿠스 형제는 변화한 로마의 현실을 따라가지 못하는 사회제도를 개혁하려고 시도했으나 너무 급진적이었고, 자신들을 보호해줄 무력이 없었기 때문에 '원로원 최종 권고'가 발동되면서 보수파들에게 끔살당했고 그 뒤를 이은 제1차 삼두정치는 자기 휘하에 있었던 퇴역병들을 동원하는 것으로 이 문제를 보완한다. 폼페이우스의 피호민이었던 가비니우스나 아프라니우스 같은 인물들이 호민관을 거쳐 집정관까지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은 원로원도 함부로 하지 못하도록 무력이 뒷받침 해주었기 때문이다. 훗날 그라쿠스 형제를 두고 [[키케로]]는 '로마의 포룸에 단검을 집어넣었다.고 평했지만, 당시 로마의 문제는 거시적이고 대규모의 개혁이 필요했는데 이에 부응하지 못한 보수파가 끝내 몰락하게 되었다는 걸 감안한다면 적반하장이 따로 없다. 그라쿠스 형제 사후 로마의 정치판에 등장한 카이사르는 진의가 어떠했든 간에 공화정 말기 로마의 문제를 파악하고, 그 문제 해결을 위해 여러가지 부문에서 노력을 기울였다. 카이사르를 향한 일반 민중들의 지지는 여기서 나왔는데, 군사적인 업적이 라면 카이사르와 맞먹는 술라나 루쿨루스가 정작 일반 대중 사이에서는 인기가 꽝이었던 이유도 여기서 나온다. 이들은 보수파였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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