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무위키
조무위키
둘러보기
대문
최근 바뀜
임의의 문서로
미디어위키 도움말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
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
특수 문서 목록
문서 정보
행위
문서
토론
편집
역사 보기
김동수
편집하기 (부분)
경고:
로그인하지 않았습니다. 편집을 하면 IP 주소가 공개되게 됩니다.
로그인
하거나
계정을 생성하면
편집자가 사용자 이름으로 기록되고, 다른 장점도 있습니다.
스팸 방지 검사입니다. 이것을 입력하지
마세요
!
== 소 개 == [[파일:B0008277 487237827333b.jpg]] 1990년 1차 지명을 받아 [[LG 트윈스]]에 입단했다. 1990년 데뷔시즌에 [[심재원]], [[서효인]]등 쟁쟁했던 선배들을 밀어내고 주전을 차지하며 팀을 우승으로 이끌며 포수 출신, 우승 팀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신인왕]]을 수상하는 기록을 달성하였다. 이에 LG는 [[MBC 청룡]]시절부터 팀의 핵심포수였던 [[심재원]]을 은퇴시키며, [[김동수]] 원탑체제로 개편을 단행하였으나 정작 [[김동수]]는 1991년 시즌에 2년차 징크스와 허리부상까지 겹쳐 형편없는 성적을 기록하게 된다. 1991년 시즌종료 후 허리 디스크 수술을 받고 1992년 시즌 20홈런을 때려내며 부활, 1993년 시즌 역시 투고타저 시대에 비해 뛰어난 성적을 거두며 2번째 골든글러브를 수상하였고, 이때부터 [[이만수]], [[장채근]], [[김동기]]등을 제치고 최고의 포수 반열에 오른다. {{강탈왕}} 1994년 시즌은 방위복무로 인해 홈경기와 인근 수도권 원정경기 밖에 출전하지 못하는 상황임에도 팀을 우승으로 이끌며 두번째 우승반지와 3번째 골든글러브를 수상하게 된다. 저 때의 골글은 [[김동기]]와 치열한 경합을 벌였는데, 단 2표 차이로 결과가 갈렸다. 그런데 사실은 우승프리미엄으로 강탈한거나 마찬가지다 김동수는 31게임이나 결장했으며 당연히 규정타석도 못채웠고 김동기는 겨우 7경기 결장에 홈런도 많이 때렸기 때문. 그래도 어찌어찌 스텟티즈 기준 war이 김동수가 더 높기 때문에 어처구니없는 골글사례 까지는 아니다. 1995년시즌 중 방위병 소집 해제로 복귀하였고 [[이상훈]]-[[김기범]]과 환상의 호흡을 보여주며 팀을 전반기 1위로 이끄나 8월부터 시작된 [[OB 베어스]]의 대약진과 당시 감독이었던 [[이광환]] 감독의 전략미스등의 악재가 겹치며 시즌을 2위로 마감, 이어진 포스트 시즌에서 공포의 소총부대를 구성한 [[롯데 자이언츠]]에 [[플레이오프]]에서 패퇴하며 2연속 우승의 꿈을 접어야만 했고 [[김동수]]는 4번째 골든 글러브 수상에 만족해야 했다. 1996년에는 낮은 타율에도 불구하고 득점권에서 강한 면모를 보여 8월 초에 50타점을 기록하며 전체 타점 순위 상위권에 들었을 정도였으나 8월 초반 이후 시즌 종료까지 타점을 기록하지 못하는 엄청난 부진을 보였고 팀은 7위에, [[골든글러브]] 역시 포도대장으로 불리며 주가를 올린 [[박경완]]에게 빼앗기며 체면을 구겼다. 1997년에는 [[임선동]], [[전승남]], [[손혁]] 등 신인급들이 많은 투수진을 훌륭하게 리드하고 시즌 초반 [[심재학]]의 부상 공백을 훌륭하게 메워 주는 타격까지 선보이며 공수 양면에서 활약하며 팀을 [[한국시리즈]]로 이끌며 1996년에 [[박경완]]에게 빼앗겼던 골든글러브를 다시 탈환하며 5번째 골든 글러브를 수상하였다. 타격은 타율은 낮았지만 17홈런을 때리며 맹활약 1998년 역시, 공수양면에서 활약하였는데, 7월 25일 경기에서는 8회까지 노히트노런을 기록하였던 [[정민철]]을 상대로 솔로홈런을 뽑아내어 대기록 작성을 저지하기도 하였다. 타율 2할 8푼, 홈런 20개로 준수한 활약을 보였고 누수가 많았던 투수진을 잘 이끌어 코리안 시리즈 진출까지 시키는 등의 준수한 활약을 보였지만 골든글러브의 영광은 당시 제1차 현대왕조를 세운 [[박경완]]에게 밀려 연속수상에는 실패하였다. 그리고 1998년 이후 [[김동수]]가 신인시절 때 선배 포수 [[심재원]] 등을 밀어냈던 것처럼 당시 신인이었던 [[조인성]]을 차기 주전 포수로 밀어주려는 LG 구단과 [[김동수]] 간의 신경전이 펼쳐지게 된다. 이때 틀어졌던 양자간의 관계는 1999년 시즌 중 [[트레이드]] 문제가 터지면서 끝장이 나게 되는데, 이런 어수선한 상황과 팀에서 의도적으로 출전을 줄인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김동수]]는 1999년 6번째 골든글러브를 수상하는 기염을 토했다. 1999년 시즌 종료 후 첫 FA 제도가 시작되었고 [[조인성]]을 밀어주긴 하되, 안정된 베테랑 백업으로서 당장은 [[김동수]]가 필요했던 LG는 [[김동수]]와 계약을 맺기위해 그에게 연락하였으나 [[김동수]]는 우선협상기간 동안 하와이로 출국하여 연락을 끊고 만다. '''이에 당황한 LG구단은 [[해태 타이거즈]]와 함께 KBO 이사회를 소집하여 FA제도의 폐지를 시도하였으나 나머지 구단의 반발로 무산되고 LG구단은 이 자리에서 포수가 필요했던 삼성 구단에서 [[김동수]]와 계약하기 위해 일부러 [[김동수]]에게 잠적을 권유하였다는 주장을 제기하며 삼성 구단과 언쟁을 벌이게 된다'''. [[파일:Img history21 7 10.jpg]] 이런 논란 속에 원소속팀 [[우선협상기간]]이 끝나자마자 [[김동수]]와 [[삼성]]과의 계약이 발표되었다. 이때 [[삼성]]으로 이적하면서 [[LG]] 팬들에게는 '''배신자'''의 이미지가 남게 되었고, [[LG 프런트]]는 보복으로 투수 [[김상엽]]을 보상선수로 지명했다. 하지만 [[김상엽]]은 부상악화로 2경기 등판 후 2001년에 은퇴했다. 삼성으로 이적하기 전에는 리그 본좌급의 포수로 매년 2할 8푼 타율에 두 자릿수 홈런 80~90안타를 꾸준히 기록했으나 에프에이로 삼성 이적 후 역대급 드르렁을 시전해 삼빠들에게 잊을 수 없는 개먹튀로 인식되고 있다. 김동수는 이적 첫해 0.205 11홈런 30타점이라는 역대급 쓰레기 성적을 기록했고 진갑용에게 주전자리를 내줬다. '''배신자'''의 이미지가 강하게 남아 있지만, [[LG]]시절 [[김동수]]의 전성기는 [[이만수]]의 뒤를 이은 유일무이한 포수 본좌였다. 그의 독주체제가 구축된 1993년을 기점으로 [[이만수]], [[장채근]], [[김동기]]는 급격히 내리막길을 걸었고, [[임수혁]]과 [[이도형]]은 잠시 반짝하다가 주저앉았다. 1990년대 말에 두각을 나타낸 [[박경완]]이나 [[진갑용]]은 전성기가 2000년대 초~중반이었기 때문에 1990년대 최고의 포수는 [[김동수]]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또한 2013년 현재까지 LG의 우타자들 중에서도 뛰어난 성적을 올린 타자 중 한명으로, 그를 능가할 만한 선수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LG선수}}
요약:
조무위키에서의 모든 기여는 CC BY-SA 4.0 라이선스로 배포된다는 점을 유의해 주세요(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조무위키:저작권
문서를 읽어주세요). 만약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문서를 저장하지 말아 주세요.
또한, 직접 작성했거나 퍼블릭 도메인과 같은 자유 문서에서 가져왔다는 것을 보증해야 합니다.
저작권이 있는 내용을 허가 없이 저장하지 마세요!
취소
편집 도움말
(새 창에서 열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