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고: 로그인하지 않았습니다. 편집을 하면 IP 주소가 공개되게 됩니다. 로그인하거나 계정을 생성하면 편집자가 사용자 이름으로 기록되고, 다른 장점도 있습니다.스팸 방지 검사입니다. 이것을 입력하지 마세요!== 생애 == 6.25 이후 조병옥의 비서로 활동하다가 1954년 이기붕의 권유로 자유당에 입당 후 제3대 국회의원에 당선됨으로써 시작되었는데, 당선 당시 그의 나이가 25세라서 최연소 국회의원 타이틀을 거머 쥐었고 이 타이틀은 깨지지 않고 있다. 이후 5~10대, 13, 14대 국회의원에 당선되며 대통령이 되기 직전까지 국회의원 9선의 위업을 달성하였다. 이 기록은 [[김종필]]과 국회의장을 지낸 박준규 의원만이 가지고 있다고 한다. [[사사오입 개헌]] 당시 런승만 찾아갔다가 조봉암 뒤따라갈 뻔했다. 대한민국 정치사에 한 획을 그은 삼김 중 한 명이다. 나머지 두 명은 [[김대중|슨상님]]과 [[김종필]]. 박정희 정권 하에서 모진 꼴 많이 당했다. [[김영삼 질산 테러 사건|집에 가다가 비닐봉지를 투척 당했는데]] 비닐봉지 맞은 자기 차는 그날 폐차 처리됐다. [[신민당 각목 테러 사건|기껏 당 총재로 뽑혔으나]] [[이철승|탈락한 새끼]]가 [[김태촌|깡패]]에게 시켜서 습격을 하는 바람에 구두도 못 신고 양말 바람으로 3층에서 뛰어내려 도망쳐야 했다. 이때 김영삼은 나만 당하고 앉아있진 않겠ㄷ면서 사재를 털어 깡패를 사다가 [[김태촌]]의 깡패들과 맞붙게 했다. YH 무역사건 당시 박정희와 공화당, 유신정우회에 의해 제명 당하지만 얼마 안 가 [[10.26 사태|박정희가 사망하고]] [[12.12 사태|신군부가 나타나자]] 정권 장악을 막으려 김대중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러나 김대중이 거절하면서 서로 실랑이만 벌이다가 김대중은 내란음모 혐의로 깜빵 간 뒤 사형 선고를 받고 김영삼은 반강제적으로 정계에서 은퇴한다. 이후 전두환이 물러나자 다시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 여기서 [[김대중]]과 서로 눈치를 본 게 화근이 되어 민주당으로 향할 표가 분열되었고 이로 인해 노태우가 당선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김영삼에게는 천만다행으로 노태우는 박정희나 전두환과는 달리 사람이 존나 물렁했다. 그래서 박정희 같으면 또 비닐봉지를 얻어맞을 판이었지만 노태우가 물러터진 놈이라서 김영삼에게 먼저 합당하자고 손을 내밀었다. 김영삼도 당시 선거에서 김대중에게 지는 바람에 위기 상황이었고 약 2년 전 슨상님에게 통수 맞은 걸 복수도 할 겸 [[3당 합당|말랑말랑한 노태우, 박정희 잔당 김종필과 손을 잡았다]]. 이 과정에서 김영삼은 본인이 처리해야 할 대상과 연합하게 된다. 군정 종식이 인생의 유일한 목표였던 김영삼은 군정을 끝장내기 위해 노태우의 밑으로 들어가서 노태우의 열렬한 후계자를 자처했다. 하지만 이는 함정으로, 김영삼은 노태우의 후계자로 확정되어 제14대 대통령 선거에 나와서 당선되자마자 싹 안면몰수하고 2년 후 전두환과 노태우를 체포해버린다. 당시에도 잘했다는 의견이 다수였으나, 지지율 살리겠다고 정치적으로 이용한 거 아니냐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건 완전히 아르헨티나 같은 상황인데 [[라울 알폰신]]이 [[호르헤 비델라]], [[레오폴도 갈티에리]], [[레이날도 비그노네]] 등에게 사면을 해주겠다면서 친한 척했다가 당선되니까 갑자기 안면몰수하고 싹 체포한 것에 비견된다. 이렇게 김영삼은 스스로의 적과 손까지 잡아가며 기어이 군부정권을 끝내버렸다. 대통령 된 후 지방자치제, 금융실명제 등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 노력해왔으나 임기 말인 1997년 한보 사태로 촉발된 IMF 사태가 터지면서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IMF 당시 김영삼 대통령의 지지율은 거의 5퍼센트밖에 안 됐는데 이는 ㄹ혜 탄핵 때와 비슷한 수준이다. 당시 국민들에게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천벌 받을 인물로 전땅크를 제치고 당당하게 1위에 올랐다. 그리고 수많은 정치인들을 발굴하였는데 이들 중 대부분은 거물 정치인으로 많이 성장하였다. 거물들만 잠깐 언급하자면 [[김동영]], [[최형우]] 2명이고 그 외로는 [[서석재]], [[김덕룡]], [[이회창]], [[김광일]], [[노무현]], [[이명박]] 등 이외에도 수많은 정치인이 김영삼으로 인하여 정계에 들어왔다. 본인이 IMF 구제 금융을 [[1997년|요청한]] [[11월 22일|날로부터]] [[2015년|정확히 18년 만에]] 사망했다. 요약: 조무위키에서의 모든 기여는 CC BY-SA 4.0 라이선스로 배포된다는 점을 유의해 주세요(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조무위키:저작권 문서를 읽어주세요). 만약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문서를 저장하지 말아 주세요. 또한, 직접 작성했거나 퍼블릭 도메인과 같은 자유 문서에서 가져왔다는 것을 보증해야 합니다. 저작권이 있는 내용을 허가 없이 저장하지 마세요! 취소 편집 도움말 (새 창에서 열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