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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범 처벌 완화 === {{인용문|항소심 재판은 싱겁게 끝났다. 심리할 것이 없었다. 항소심은 1심 선고 9년 형을 2년 6월 징역형으로 줄였다. 정치범들에 대한 형의 선고에 중앙정보부의 개입 조정이 있었던 것은 이제 공지의 사실이 되어 있다. 중앙정보부장이 신직수로부터 김재규로 바뀐 것이 정치범의 형량이 대폭 줄어든 원인이었다. 보안법이나 긴급조치로 정치범을 될수록 잡아들이지도 않았다. 1976년 중반 이후의 추세였다. 반성문만 쓰면 웬만하면 석방했던 것도 김재규의 방침이었다.|이부영 의원}} 중앙정보부장에 오른 후 박정희의 공포정치에 가장 큰 반감을 가지고 일상화된 공포정치 및 정치범 양산에 반대하는 정책을 여러모로 폈다. 유신 말기 전제적인 공포정치와 강경책을 선호하던 박정희와 김재규의 사이가 틀어지게 된 결정적인 계기 중 하나가 이것이었다. 차지철은 경호실의 권력을 남용해서 전근대적인 전제정치 수단들을 마구 사용해서 박정희의 눈에 들었다고 한다. 박정희가 이 따위로 굴었던 이유는 간단한데, 박정희는 김재규와 차지철 시대 이전까지는 자신에게 찬동하는 가림막이 되어주는 2인자를 가져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차지철과 김재규는 박정희의 권위를 받아 권력을 얻은 2인자인 반면, 그 이전까지 김종필 등은 전부 박정희와는 독립된 원인으로부터 권력을 가진 2인자였다. 즉 1인자와 대립하는 2인자였다. 5.16은 4.19를 계승한다는 명분으로, 그다지 높은 위치가 아니었던 박정희가 국민의 지지를 얻어 성립되었다. 이를 고깝게 여기는 세력 역시 내부에 존재하였기 때문에 초기의 박정희는 전제적 권력을 가진 구조가 아니었고 민중의 눈치를 봐야 했으며 이는 유신체제가 공고화되기 전까지 쭉 이어진다. 유신이 전체적으로 독재정임에도 불구하고 신민당 등에게 어느 정도 정치영역을 허락할수밖에 없었던 것, 한국적 민주주의 같은 소리를 하면서도 최소한의 형식적 민주주의를 유지하는 척은 해야 했던 것, 그로부터 김영삼 김대중 등이 활동할수 있었던 것, 그리고 그 결과 완전히 폭압적인 독재로는 나아가지 않았던 것 등등은 전부 이런 구조에서 기인한다. 유신 이후 이러한 내부의 견제가 무너지고, 김종필이 2인자 자리에서 물러난 이후, 박정희는 처음으로 자신에게 찬동하는 2인자를 갖게 되어 몹시 기뻐하고 있었다. 그런데 새로 들어온 김재규 역시 그 전까지의 2인자들처럼 사사건건 자신의 정책에 반대하며 박정희를 견제하는 역할로 행동하려 했던 것이다. 박정희한테는 이것이 굉장히 불쾌할 수 밖에 없었다. 지금 보면 기이하게까지 여겨지는 차지철에 대한 의존은 이 사실을 배경으로 접근하면 이해할 수 있다. 유신이, 그 이전에 존재했던 이승만이나, 전두환보다 더 깨끗했던 것은 사실이다. 최소한 그들처럼 대규모의 학살을 자행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박정희 개인이 매우 도덕적으로 깨끗한 인물이어서 그랬던 걸까? 어떤 역사과정의 결과를 개인의 미덕이나 탁월함 덕분으로 돌리고 영웅으로 추앙하는 역사관은 물론 감동적이고 대중들은 그렇게 평가하기를 즐기지만, 전혀 합리적이지도 않고, 과학적이지도 않으며, 당연히 역사적이지도 않다. 박정희는 광장에서 살인을 저지르진 않았지만 사조직과 중정, 보안사를 동원해서 지속적으로 밀실에서의 살인은 저질렀다. 인혁당 사건 같은 사건이 대표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정희가 폭압적인 제재로 나아서지 않았었던 이유는, 그의 권력 기반 자체가 어쨌든 대중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는 사실에 있다. 때문에 그렇게 어느정도 허용된 민주적 영역에서, 정치적 동기로 박정희를 견제했던 김종필 같은 사람이나, 개인적인 동기로 박정희를 견제했던 김재규 같은 사람이나, 민주정부의 수립을 목적으로 대립했던 민주화 세력의 견제 같은 게 있어 박정희가 폭압적으로 나서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예방하고 있었던 덕분이라고 보는게 더 올바르다. 실제로, 그런 견제 세력이 가라앉고 자신의 권력이 확립되자마자 박정희는 발포 명령 운운하며 차지철의 200만 학살 발언을 묵인함으로써 곧바로 다른 독재정이 저질렀던 짓과 똑같은 짓을 저지르려고 들었다. 목줄에 묶여 있고 재갈을 물린 개는 물론 사람을 물지 않을 거다. 그런데 그게 그 개의 착함을 증명하나? 김재규를 재평가하는 의의는 여기에도 있다. 개발독재 시대는 분명히 공과 과가 있다. 그러나 그 공이 박정희에게 전적으로 돌아가는 것의 허구성을 널리 알리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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