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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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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론에 대한 반박== {{빛과 어둠}} 10.26 사태는 그 평가가 극과 극으로 갈리는 떡밥이다. 2016년에 들어 [[최순실 게이트]], [[최태민]]과 [[박근혜]]의 문란한 관계가 밝혀지며 김재규 또한 끝없는 재평가를 받고 있는 중이지만 그에 대한 부정론은 여전히 존재하며 부정론도 그에 대한 자료이기에 디시위키에 서술한다. ===차지철만 죽이려 했고 박정희는 우발적이었다 설=== 이는 재고할 가치도 없이 사실이 아니며 10.26 직전에 김재규의 부하들이 "각하도 포함됩니까?"라는 질문을 했을때 김재규는 "물론이다"라고 답했다. 중정 부하들에게 강력한 화력을 가진 소총을 사용하라고 시켰고, 경호차장 등 박정희 측 심복들을 모조리 살해한 당시 상황을 봤을때 김재규의 목적이 대의였든 아니었든간에 사전에 박정희를 죽이려는 계획이 있던것은 확실하다. 또, 김재규 장군의 가족들의 말에 따르면 10.26 결행 이틀 전 이미 동생에게 은밀히 박정희를 쏴야겠다는 결심을 전달했다고 한다. 가족들이 박정희 하나 죽는다고 세상이 그렇게 크게 바뀌고 모든 게 되돌아갈 것 같냐고 말리자, 그래도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이라고 결심을 굳혔다고 한다.만약 김재규가 박정희는 살리고 차지철만 살해할거였다면 중정의 공작원들을 이용해 차지철 혼자만 독살, 암살, 저격하는게 더 쉽고 뒤를 바라볼 수 있었을 것이다. 거사를 예고한 10월 26일 저녁까지 김재규는 박정희를 죽인다는 계획을 완성했다. 김재규는 옥중에서 7년 만의 과업을 이룬 것이라고 적었다. 최초에 그가 이런 물리적 혁명을 계획한 것은 유신이 반포된 직후였다. 그 때 김재규는 박정희를 연금하고 강제로 하야시킬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망설임 끝에 그만둔 후 노선을 바꾸어 어떻게든 박정희가 사임하고 평화로운 정권 이양을 이룰 수 있도록, 유신 내부의 양심이자 온건파로 활동하며 박정희에게 수 많은 직언을 올렸다. 당장 부마 항쟁 당시만 하더라도 김재규 외의 누구도 부마항쟁의 역사적 의의를 그토록 진지하고 크게 해석하지 않았다. 왕과 같은 권위를 가진 대통령에게 직접 당신의 장기 집권 때문에 5대 도시로 퍼져나갈 민란이 터진 것이다,라고 직언을 올릴 수 있는 담력이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그것은 사실상 박정희에게 사임을 직접적으로 요구한 것이었다. 그러나 어떻게든 유혈을 피하고 박정희의 평화로운 사임을 바랬던 김재규의 노력에 박정희는 발포 명령을 내릴 수도 있다는 호통으로 대답할 뿐이었다. 박정희에게는 10.26을 피할 수 있는 많은 날들이 있었다. 그러나 지나친 장기집권으로 인해 그는 이미 피를 보지 않고 정권에서 내려올 방법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차지철은 물론 10.26을 결심하게 만든 원흉 중 하나이겠으나 궁극적인 목적은 역시 유신의 제거였다. 민주 회복 이후에 10.26이 계획되었다는 증거는 여기저기서 너무 쏟아져나와서 여기 다 적기도 힘들 정도다. 거꾸로 이정도까지 자주 계획을 노출했는데 용케 안 들켰네, 김재규가 인품이 좋긴 했나보다 이런 생각이 들 정도. 아예 10월 23일부터 마음을 다잡기 위한 재계 행사 같은 일정에 들어선다 10월 23일: '위민주정도(爲民主正道)', '자유민주주의', '위대의(爲大義)', '비리법권천(非理法權天)' 그리고 '민주, 민권, 자유, 평등' 이라는 자기가 썼던 서예들을 모아 친척에게 전달함. "이 말들을 후손에게 잘 전달해달라"는 부탁을 했다고 함. 10월 24일: "신문에서는 양아치와 불량배가 데모했다고 하지만 실은 선량한 시민들과 학생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우리가 이 난국을 수습하지 못하면 광화문 네거리가 피바다가 됩니다. 이걸 수습할 분은 나와 황 총무뿐입니다." 신민당 황낙천 총무를 만나 이런 말을 함. 그리고 난국을 수습할 테니 총무와 김영삼 총재가 잠깐 물러나라고 함. 아마 후폭풍 터져서 신민당 숙청당할 것을 염려한 조치로 짐작됨. 10월 25일: 유정회에 억지로 앉은 이종찬 장군에게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라고 당부함. 저녁에 자신이 존경하던 선조인 김문기의 묘소를 찾아가 참배함. 김문기는 사육신에 들어야 한다는 논쟁이 끊이지 않는 충신임. ㄴ 사육신 말고 삼중신도 있으며 김문기는 거기에 속해있음 2017년 들어와서 그 분의 고향인 옥천에 사당 지어지고 있다. 우발적이라는 설은 이제 거의 완전히 폐기된 설에 가깝다. ===차지철과의 권력암투 때문에 그런 것이지 자유민주주의와는 관계없다=== 먼저 알아둬야 할 것이 있는데 김재규는 부마사태가 터지기 몇 달 전 박정희에게 중정부장 자리에서 물러나고 싶다고 사의를 표명했다가 당장은 후임자 물색과 인수인계가 곤란하다는 이유로 거절당한 과거가 있다. 권력암투설은 김재규가 권력욕에 불타는 인물이라는 전제를 달아 두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그 전제는 이 사실로 바로 반박이 가능하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2&aid=0002017191 다만 차지철에게 영향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어느 정도 설득력은 있는 게, 김재규도 사람이니까 차지철의 권력견제에 영향을 단 1도 안받았을리는 없을 것이다. 당시 차지철은 권력에 미쳐 마구잡이로 돌아가고 있었는데 상황을 이해하기 위한 간단한 예를 들자면 최초의 육본은 박정희 살해를 차지철이 한 줄 알고 있었다. 당시 참모총장이던 정승화는 차지철이 대통령 경호실을 이용해 쿠데타를 일으켰다고 생각해 수도경비사령부를 집결시켜 청와대를 둘러싼 뒤 포격명령을 대기하라는 지시를 했으며 법무장관인 김치열은 소식을 듣자마자 "차지철 그놈 새끼가 기고만장해 까불더니 일을 저질렀구나!"하고 욕지거리를 한 것이다. 또한 김재규도 박정희를 정말 죽여버리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 건 78년 12월부터라고 진술하고 있다. 그러나 차지철에게 영향을 받았단 것 만으로 자유민주주의와 관계가 없다는 판단은 심각한 비약으로, 일단 1. 차지철이 박정희의 신임을 독차지 한 것은 자유,민주와는 정 반대에 선 최태민과 박근혜를 옹호한 이후부터이며, 2. 최태민을 보호해주고 차지철을 신임한 것은 박정희 본인이며 3. 차지철이 대통령의 신임을 얻었다고 중정부장의 김재규의 청와대 출입을 불허하는 등 월권하는 상황 자체가 정의나 공화주의와는 거리가 먼 상황이다. 4. 추가로 김재규는 [[10.26]]이나 차지철의 공격 전에도 유신헌법에 부정적이었고 5. 시대적으로는 유신헌법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인 [[부마항쟁]]이 일어난 상태였으며 차지철과 박정희는 강경진압을 논하고 있었다. 또한 차지철 하나 뿐만이 아니라 시대상황, 박정희, 유신에 대한 비판적 판단 등 김재규의 살해 동기에는 여러가지가 혼재되어 있던 것도 사실이다. 왜냐면 김재규 입장에서 차지철 하나가 문제였다면 위에 서술했듯 차지철만 따로 죽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김재규는 "어떠한 감정도 없는 깨끗한 혁명"임을 죽을때까지 강조했으며 그것을 최대한 지키고자 박정희의 혈육적으로 심각한 치부인 육사생도로서의 박지만이 일으킨 도덕적 해이나 [[박근혜]]-[[최태민]] 문제는 공개된 재판에선 말하지 않고 항소 이유 보충서에서만 밝힌다. 또한 변호사가 박정희의 추악한 면을 폭로하고 김재규를 옹호하기 위해 연예인 술접대에 대해 언급하려고 할 때는 제지한 바 있다. 또 후대에 발굴된 사료들을 바탕으로 파악해보면, 김재규는 군인적인 안보 의식과 동시에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양립한 보기 드문 사람이었다. 그는 유신 내부에서 유신정권을 보다 덜 독재적인 정권이 되게 하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해왔고, 당시 자유민주주의를 가장 열렬히 원하고 신봉하던 사람들 중 하나였다. 이런 그의 개인사를 고려할 때 그의 행동 원리에서 자유민주주의적 신념을 배제하고 해석하는 것은 비합리적이다. 72년 유신 헌법이 제정되고 반포되자, 개인적으로 유신 헌법을 세 번 읽어본 끝에 이게 무슨 헌법인가! 독재하자는 것이지! 라고 외치며 내던졌다는 증언이 있으며, 당시 부하가 유신 이후 군인들이 어꺠 좀 피겠다고 아부를 하자 박정희가 모든 걸 다 망쳐버렸다고 뇌까렸다고 한다. 또, 물증으로 확인되는 증거로는 당시 그가 근무하던 제 3군단의 철조망을 교체하고 안으로 꺾은 것인데, 그의 당시 부하들과 그 본인은 그것이 3군단에 시찰온 박정희를 연금한 뒤 강제로 하야선언을 시키도록 하기 위한 사전 조치였다고 공통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또 그 유명한 박정희의 불출마 선언을 이끌어 낸 것이 김재규라는 증언도 다수 확보되어 있다. 박정희가 연설에서 불출마 선언을 한 날, 김재규는 뛸 듯이 기뻐했다고 한다. 이 외에도 그는 중정부장이라는 직위를 이용하여 수 많은 재야 민주 인사들과 만나며 개인적인 신념을 자주 표출해왔다. 민주 회복 이후 하나 하나 모인 그러한 증언들은 모이자 방대한 양이 되어, 10.26이 계획된 혁명임을 확실하게 증명하고 있다. 다만, 10.26 자체가 계획되었다는 것은 공통된 의견이나 구체적인 실행 시기는 합의 없이 우발적으로 실행되었을 확률도 점쳐지고 있다. 애초에 김재규의 의도가 그저 권력암투때문에 박정희랑 차지철을 쏴죽였고 재판에서 발언한것이 거짓이였다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보면 매우좋은 결과이다. ===중정에 가지 않고 육본으로 간 것에 관한 문제=== 위에 서술했듯 이것이야말로 김재규의 가장 큰 실책인데, 김재규는 10.26 이후 48시간 이내에 비상계엄령을 일으킨 뒤 5개월 안에 소위 '유신의 잔재'를 설거지하고 한국에 민주주의를 놓는다는 구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육본에 있던 장군들은 박정희의 사망과정에 대해 더 크게 생각했고 현장수습을 완벽하게 해놓지 않고 육본에 온 김재규는 당황했다. 설상가상으로 김재규가 살해를 미리 예고해줬던 김계원이 통수를 까면서 김재규는 막장으로 몰아진다. 김재규가 권력이라는 왕좌가 목적이었든, 민주주의가 목적이었든 비상계엄령을 일으키기 위해선 중앙정보부로 입성한 후 차지철의 쿠데타 시도에 대항해 중정부장인 본인이 차지철을 사살했지만 박정희는 총격에 사망하였다 이런 식으로 공작했어야 됐는 것은 자명하다. 차후조사를 할 수 없도록 안가에 불을 질러버린다거나... 중정 수사부의 K국장은 평소 김재규가 최태민과 차지철로 인해 굉장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고 설명했는데 아마 이러한 스트레스에 더불어 부마사태와 박정희 차지철의 발언등으로 여러가지 문제점을 동시에 겪고 있던 김재규가 10.26 다음의 플랜을 더 확고하게 짜지 못했고, 대통령을 포함 십수명을 살해한 10.26후의 상태에선 피로와 충격을 겪으며 명쾌한 판단을 못한 것으로 추정된다. 모교수에 의하면, 흔히 암살을 준비하고 거기에 너무 집중하는 바람에 그 후는 대비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하는데, 예를 들면 로마의 카이사르의 암살이다. 그 후에 우왕자왕하다 제 2차 삼두정치 후 제정이 들어서게 된다. ===김재규의 일련의 행동은 무의미하다 설=== {{깨시민}} {{팩트폭력}} 이 때문에 김재규의 일련의 행동들이 자유민주주의에 영향을 주지 못하고 무의미했다는 부정론인데 이건 사실상 물에 빠진 새끼 구해놨더니 지갑을 요구하는 정도의 경우없는 소리로 김재규가 [[발터 PPK]]와 [[M36 치프 스페셜]]을 들기전까지 아무도 박정희 상대로 반역을 일으킬 생각을 하지 못했다. 군부는 박정희에 대해 매우 충성적이었으며 [[유신헌법]]은 선거인단과 의회 멤버, 의회 해산권, 계엄권을 전부 대통령이 조종하기 때문에 뒤질때까지 박정희가 종신대통령을 할 수 있었다. 시민혁명으로 정권 쟁취? 헌법이 개정되었으며 대학생 천여명이 제적당해 한순간에 앰생이 되는 극한의 공포정치와 시위대가 공수여단한테 존나 쳐맞는 상황까지 온 독재국가에서 어떻게 시민들이 100% 이길거란 장담을 한단 말인가? 완벽한 독재국가에서 시민들이 혁명을 성공하기 위해선 정규군과 비슷한 무력을 가지거나 하나도 빠짐없이 죽을생각을 하고 국민 전부가 참여해야하며, 혁명과정에서 비극적이고 심각한 출혈을 각오해야 한다. 비폭력주의로 무장하고 [[천안문 사태|천안문]]에서 탱크에 대가리 으깨진 중국의 청년들을 생각해보자. 자유민주주의를 위한 그들의 희생은 숭고했었지만 작금의 중국은 일당독재국가이며 중국인들의 국민성은 개씨발이다. 또한 전두환에게 쿠데타를 당한 것은, 하나회의 실체를 파악치 못하고 쿠데타를 저지하지 못한 정승화, 그리고 무능하기 그지없던 최규하가 병신인 것으로 김재규를 탓하기엔 어렵다. 가끔씩 10.26을 폄하하는 좌파성향쪽 인간들은 이런 말을 하곤 한다. 10.26을 일으키지 않아도 국민이 알아서 박정희를 몰아내고 시대적 평가를 바꾸어놓았을 텐데 괜히 개인적으로 처단해서 역사의 심판대에 세우지 못하게 했다고. 이건 당시의 시대적 맥락을 전혀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시민의 힘을 추승하고 절대화하여 세력적 기반을 다지는 동시에 김재규에게 민주화의 공을 넘겨주기 싫은 인간들이 만들어낸 인위적인 주장이다. 전혀 현실적이지 못하다. 문학이나 찬가에서 이상화되어 표현되는 민중과는 달리현실적인 정치적 변수로서의 민중은 절대선으로 사회를 견인하는 절대적인 추동력을 전혀 가지고 있지 못하며, 다른 현실적 변수들에 굴복하는 경우도 매우 많다. 한국 사회의 역사적 경험은 전 세계사적으로 보았을때 매우 이례적인 것이다. 한국 역사에서는 매우 특이하게 두 번이나 (이제 [[박근혜|세 번이다]]) 국민들이 시위로 독재자를 몰아낸 경험이 있어 '''시위하면 무조건 국민이 승리한다''' 이런 '''망상'''에 젖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전 세계적인 사례들을 살펴보면 박정희 수준으로 권력이 공고한 독재자와의 투쟁에서 저항하는 국민이 패배하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다. 아니 극단적으로 말해서 박정희 같은 독자재를 몰아낸 경우는 없다. 차지철이 캄보디아에서는 300만 죽였잖아여 크헤헿 같은 개소리를 괜히 지껄인 게 아니다. 유신 시점의 박정희는 이승만, 전두환 따위와는 그냥 궤 자체가 다른 최강의 독재자다. 유신이 한창이던 시절에조차 박정희를 지지하는 사람도 국민 중 많았다. 국민장 열리고 국민들이 떼거지로 펑펑 울면서 수십만 운집한 거 보면 몰라? 지금도 틀딱들은 박정희를 반인반신에 세종대왕보다 위대한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는데 그때는 오죽할까? 박정희에 대한 국민적 지지와 독재자라는 평가가 혼재하는 상황에서 전두환, 이승만 때 수준의 저항이 일어났을까? 당시 사회적, 경제적 조건이 붕괴 상태였기 때문에 유신은 자연적으로 소멸할 위기를 겪고 있었다는 식의 분석은, 어째서인지 독재정에 민주정의 성립 전제를 달아 분석하고 있다. 그 모든 실정에도 불구하고 박정희에게는 군대가 있었으며 침묵하는 동조자들이 매우 널려 있었다. 당시의 시민 사회는 전혀 결집된 상태가 아니었고 언론 및 제반환경 역시 박정희의 손 안에 떨어져 있었다. 오일쇼크 등의 외부적 변수로 인한 충격은, 그런 힘을 바탕으로 민중의 저항을 2~3년만 막았더라면, 또 다른 외부적 변수의 공급으로 인해 충분히 무마할 수 있는 것이었다. 당장 그 시대 이후 80년대에 바로 들이닥친것이 그 유명한 '3저 호황'이고 이 3저 호황의 덕으로 대한민국은 90년대 말 IMF가 올 때까지 내외부적으로 보이는 수치가 상승일로였다. 이거 하나 때문에 전두환이 구제불능의 살인마임에도 경제를 살렸다고 운운하는 틀딱들과 베츙이들이 있는데 이게 지금도 호불호가 극명한 박정희한테 후광이 되었다고 생각해봐라. 지금 박근혜로 인해 산산조각이 나고 있는 소위 '박정희 신화'는 정말 반석위에 올랐을것이다. 그 시대의 술회를 살펴보면, 당시 항쟁에 참여하던 부마 시민들조차 박정희가 죽는 것을 원하지는 않았다. 증오 섞인 말이 맴돌지도 않았으며, 이승만 시절처럼 자신들을 죽일 것이라는 위협도 그렇게 심각하게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고 한다. 심지어 시위 참가자이면서도 박정희의 죽음에 눈물을 훔치던 사람조차 있었다. 대중은 어째서인지 영웅적 지도자를 스스로의 대변자라고 생각한다. 이 괴상한 사회적 신뢰인지 무엇인지 모를 기운은 문서화되지 않아 후대에는 정확하게 악하기 어려운 것이나 당시의 시대적 맥락을 정확히 고증하여 생각할 필요가 있다. 좀 과장되게 말하자면, 한국 민주화의 역사에서 정말로 민주주의의 진정한 적 수준으로 공고했던 독재정부는 유신 정부밖에 없었다. 유신 정부 이전까지의 민주주의는 실패한 정권만을 낳았기 때문에, 막연한 사상적 대의로 무장한 민주주의는 실제적 치적으로 무장한 유신 정부와 맞서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 시대를 경험한 사람들은 박정희를 욕하는 데 있어서는 어떤 심정적 장벽이나 부채감을 느끼고 있다. 이러한 상황들을 검토하고도 민중적 저항과 봉기로 유신을 쓰러뜨릴 수 있었을 것 같은가? 당시의 지식인들 중에는 겉으로는 시민 사회의 역량 결집과 민주화를 주장하면서도 현실적으로는 '양심적인 군인의 쿠데타'를 통하여 우선 유신체제를 해소하지 않으면 절대로 개선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조차 많았다. 그런데 그냥 막연하게 "시민이 처단했을 거다"라고 소리치는 것은 너무 순진하며 선동적인 주장이다. 또 결국 전두환이 집권하여 독재를 이어갔으므로 의미가 없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는데, 너무 단기적으로 역사를 파악하여 나온 의견이다. 박정희가 쌓아놓은 유신체제라는 괴물은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해체가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유신을 경험한 대한민국은 그 이전과는 단절되었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정치지형이 달라졌다. 심지어 아직까지도 유신의 망령은 사라지지 않고 박근혜를 통해 이 반도에서 날뛰고 있었다. 민의의 결집을 통해 권위에 저항하며 모범적인 민주체제로의 이행은, 유신체제를 경험한 세대에게는 절대 불가능했다는 것. 독재는 미발달한 사회의 민중과 굉장히 친화성이 큰 제도이다. 개인들은 본능적으로 역사를 위인들의 전기의 연속으로 파악하며, 특정한 개인사적 차원에서 사회를 이해하고자 하는 본능을 가지고 있다. 정치에 참여하고자 하면서도 스스로를 역사의 주체로 파악하지 못하고, 그저 자신이 승인하는 인물을 권좌에 옹립하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는 이 본능, 이것이 현실적으로 민주주의는 왕 후보자를 고르는 것에 불과하다는 비판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때문에 대중은 세습된 왕정에는 본능적 거부감을 가지고 있으나 영웅적 지도자에게는 매우, 굉장히, 치명적으로 취약하다. 자유와 평등과 박애를 기치로 일어섰던 프랑스는 나폴레옹이라는 영웅에 휩쓸려 황제로 옹립하는 코미디를 찍고 3대에 걸친 세습이 끝난 후에야 나폴레옹의 잔재를 몰아낼 수 있었다. 초기의 박정희는 분명히 시대적 영웅이었다. 자유주의적 무정부 하에 활력을 낭비하고 있었던 당시 상황에서 어느 정도는 독재는 사회적 활력의 결집을 위한 정당성을 가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 제도의 시대적 효용이 다하고 정권의 교체가 일어나야 할 시점에 무리하게 체제를 유지 했던 박정희는, 지금의 가치관으로는 청산되어야 마땅하지만 초기의 업적만으로도 대중은 이미 그를 영웅으로 추앙하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박정희를 대중들이 몰아낼 수 있을 것 같은가? 나폴레옹처럼 3대를 세습한 후에나 해체되면 다행일 것이다. 박정희에서 전두환을 거쳐 결국 민주화가 이루어진 과정을 살펴보면 절대왕정 수준의 권위를 가진 독재자인 박정희 체제 → 보다 정당하지 못한 권위를 가진 전두환 체제 → 민주체제로 이행된 것이다. 이 일련의 과정의 방아쇠를 당긴 10.26이 어떻게 민주화에 있어서 일대 사건이 아닐 수 있을까. 이런 주장을 하는 이들의 초보적인 주장을 살펴보면, 대개 '착한 독재자 박정희 → 김재규 → 나쁜 독재자 전두환'으로 이어졌으므로 결국 김재규는 전두환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라는 정도 수준의 주장을 하고 있는데, 같은 독재체제임에도 불구하고 박정희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사실을 편집하고 이해하던 상황에서 기존의 이해와 독재에의 정당화를 그만두고, 비판적 맥락으로 다시 한 번 정권을 재검토하게 만든 것이 바로 김재규에 의한 단절이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즉 전두환이 등장한 상황에서 '이 정부는 나쁘다'라는 대중적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던 근거 자체가 김재규에 의한 박정희 시대와의 절단이라는 것, 그 사실이 프레임을 짜게 도와주었다는 것을 이해하는 시대안이 없는 것이다. 결국 한국에 자유민주주의가 곧바로 돌아오지는 못했지만, 김재규는 'ㅇ신'이라는 존재만은 확실하게 해체시켰다. 박정희 사후, 그 전에는 그렇게 유신 체제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부르짖던 모든 이들은 입들 닫고 순식간에 유신 체제를 해산했다. 유신의 심장이라는 김재규의 표현처럼 박정희 개인이 유신의 핵심임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사실이다. 개인들의 역사관은 대개 인간을 평가하는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시대 중심적, 사회 중심적인 해석을 하지 못하고 한 개인의 치세를 일관적으로 파악하고 싶어한다. 역사에 대한 대중의 평가는 그 시대의 지도자에 대한 심정적 동감이나 또는 공격으로 표출된다. 이것이 본능적 역사관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박정희의 치세가 계속되는 한, 초기에 시작된 그에 대한 긍정적인 호감에서 비롯하여 그가 독재 말기적 징후를 겪건 병폐로 썩어들어가건 계속해서 사실을 선택적으로 편집하고 긍정적으로 해석하여 옹호하고 유지시켜주었을 것이다. 박정희라는 개인이 소멸한 후에야 그러한 해석의 맥락이 중단될 수 있다. 정말 양보하고 양보하고 양보해서 김재규가 박정희를 쏘지 않았어도 국민들이 저항해서 박정희를 몰아냈을 것이라는 말에 동의한다 치자, 근데 그러기 위해서는 박정희에게 항거하다 수천 수만의 국민들이 개죽음을 당했을 거다. 그걸 미연에 방지했는데 무가치하냐? 문제는 반인반신을 몰아내려면 적어도 미국의 지원을 얻어야 어느정도 가능성이 있는데 당시 미국은 공산주의 확산방지를 원했지 독재를 견제하지는 않았다는거다. ㄴ 이는 전두환 새끼가 쿠테타를 일으켰어도 방관했단 점에서 쉽게 예측할 수 있다. === 미친 놈들 이거 쓴 새끼들이 전두환 드립치다 빨아제끼는 일베랑 다를게 뭐냐? === 완전히 다르다. 이것만 알아두자. 김재규는 독재자를 죽였고, 전두환은 민주주의를 원하는 시민들을 죽였다. 이 차이를 좀더 중립적으로 보고싶다면 루마니아 국민들을 죽인 차우셰스쿠와 차우셰스쿠를 죽인 루마니아 국민들 중 누가 옳고 누가 나쁜새끼인지 생각해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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