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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지철과의 권력암투 때문에 그런 것이지 자유민주주의와는 관계없다=== 먼저 알아둬야 할 것이 있는데 김재규는 부마사태가 터지기 몇 달 전 박정희에게 중정부장 자리에서 물러나고 싶다고 사의를 표명했다가 당장은 후임자 물색과 인수인계가 곤란하다는 이유로 거절당한 과거가 있다. 권력암투설은 김재규가 권력욕에 불타는 인물이라는 전제를 달아 두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그 전제는 이 사실로 바로 반박이 가능하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2&aid=0002017191 다만 차지철에게 영향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어느 정도 설득력은 있는 게, 김재규도 사람이니까 차지철의 권력견제에 영향을 단 1도 안받았을리는 없을 것이다. 당시 차지철은 권력에 미쳐 마구잡이로 돌아가고 있었는데 상황을 이해하기 위한 간단한 예를 들자면 최초의 육본은 박정희 살해를 차지철이 한 줄 알고 있었다. 당시 참모총장이던 정승화는 차지철이 대통령 경호실을 이용해 쿠데타를 일으켰다고 생각해 수도경비사령부를 집결시켜 청와대를 둘러싼 뒤 포격명령을 대기하라는 지시를 했으며 법무장관인 김치열은 소식을 듣자마자 "차지철 그놈 새끼가 기고만장해 까불더니 일을 저질렀구나!"하고 욕지거리를 한 것이다. 또한 김재규도 박정희를 정말 죽여버리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 건 78년 12월부터라고 진술하고 있다. 그러나 차지철에게 영향을 받았단 것 만으로 자유민주주의와 관계가 없다는 판단은 심각한 비약으로, 일단 1. 차지철이 박정희의 신임을 독차지 한 것은 자유,민주와는 정 반대에 선 최태민과 박근혜를 옹호한 이후부터이며, 2. 최태민을 보호해주고 차지철을 신임한 것은 박정희 본인이며 3. 차지철이 대통령의 신임을 얻었다고 중정부장의 김재규의 청와대 출입을 불허하는 등 월권하는 상황 자체가 정의나 공화주의와는 거리가 먼 상황이다. 4. 추가로 김재규는 [[10.26]]이나 차지철의 공격 전에도 유신헌법에 부정적이었고 5. 시대적으로는 유신헌법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인 [[부마항쟁]]이 일어난 상태였으며 차지철과 박정희는 강경진압을 논하고 있었다. 또한 차지철 하나 뿐만이 아니라 시대상황, 박정희, 유신에 대한 비판적 판단 등 김재규의 살해 동기에는 여러가지가 혼재되어 있던 것도 사실이다. 왜냐면 김재규 입장에서 차지철 하나가 문제였다면 위에 서술했듯 차지철만 따로 죽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김재규는 "어떠한 감정도 없는 깨끗한 혁명"임을 죽을때까지 강조했으며 그것을 최대한 지키고자 박정희의 혈육적으로 심각한 치부인 육사생도로서의 박지만이 일으킨 도덕적 해이나 [[박근혜]]-[[최태민]] 문제는 공개된 재판에선 말하지 않고 항소 이유 보충서에서만 밝힌다. 또한 변호사가 박정희의 추악한 면을 폭로하고 김재규를 옹호하기 위해 연예인 술접대에 대해 언급하려고 할 때는 제지한 바 있다. 또 후대에 발굴된 사료들을 바탕으로 파악해보면, 김재규는 군인적인 안보 의식과 동시에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양립한 보기 드문 사람이었다. 그는 유신 내부에서 유신정권을 보다 덜 독재적인 정권이 되게 하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해왔고, 당시 자유민주주의를 가장 열렬히 원하고 신봉하던 사람들 중 하나였다. 이런 그의 개인사를 고려할 때 그의 행동 원리에서 자유민주주의적 신념을 배제하고 해석하는 것은 비합리적이다. 72년 유신 헌법이 제정되고 반포되자, 개인적으로 유신 헌법을 세 번 읽어본 끝에 이게 무슨 헌법인가! 독재하자는 것이지! 라고 외치며 내던졌다는 증언이 있으며, 당시 부하가 유신 이후 군인들이 어꺠 좀 피겠다고 아부를 하자 박정희가 모든 걸 다 망쳐버렸다고 뇌까렸다고 한다. 또, 물증으로 확인되는 증거로는 당시 그가 근무하던 제 3군단의 철조망을 교체하고 안으로 꺾은 것인데, 그의 당시 부하들과 그 본인은 그것이 3군단에 시찰온 박정희를 연금한 뒤 강제로 하야선언을 시키도록 하기 위한 사전 조치였다고 공통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또 그 유명한 박정희의 불출마 선언을 이끌어 낸 것이 김재규라는 증언도 다수 확보되어 있다. 박정희가 연설에서 불출마 선언을 한 날, 김재규는 뛸 듯이 기뻐했다고 한다. 이 외에도 그는 중정부장이라는 직위를 이용하여 수 많은 재야 민주 인사들과 만나며 개인적인 신념을 자주 표출해왔다. 민주 회복 이후 하나 하나 모인 그러한 증언들은 모이자 방대한 양이 되어, 10.26이 계획된 혁명임을 확실하게 증명하고 있다. 다만, 10.26 자체가 계획되었다는 것은 공통된 의견이나 구체적인 실행 시기는 합의 없이 우발적으로 실행되었을 확률도 점쳐지고 있다. 애초에 김재규의 의도가 그저 권력암투때문에 박정희랑 차지철을 쏴죽였고 재판에서 발언한것이 거짓이였다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보면 매우좋은 결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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