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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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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업적과 행보 == 역사 배울 때 선생들이 안기부와 중정을 비교하며 중정도 살인적인 짓거리 많이 했지만 안기부는 아주 미쳐돌아갔네, 중정 시절이 엄한 군주라면 안기부는 폭군이었네 하고 비교하곤 하는데 이건 박정희와 전두환의 차이라기보다는 김재규가 있고 없고의 차이라고 보는게 더 올바르다. 중앙정보부장으로써 김재규는 독재 체제의 권력유지기구로만 이용되는 중정을 개혁하고 개편하여 국가에 기여하는 긍정적인 기구로 정상화하고자 부단히 노력했고, 사적인 권한을 이용하여 학생들을 방면해주고 민주 인사들을 지원하고 억울한 사람들을 구명하는 등 중정의 폐단을 바로잡고자 많은 시도를 했다. 그가 중정부장이기 때문에 정권의 부역자라는 폄하는, 이 사실이 밝혀지고 나서 잦아들고 재평가론에 힘이 실리게 되었다. 한홍구 교수는 김재규를 '안중근, 윤봉길, 김구의 계보를 잇는 보수 우익의 마지막 의사'라고 평가했는데, 그의 행적이나 신분은 분명 정통적인 좌파와는 궤가 달랐지만 수구 세력과는 거리를 둔 인물이었다. 그에 대한 당대의 평가는 대강 이러했다. '''강직한 군인, 유능한 건설부장관, 그리고 무능하고 물러터진 중앙정보부장''' === 남산 고문실 폐지 및 기구개편 === 알려진 김재규의 업적 중 하나는 남산의 대고문실을 폐지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중정의 고문실은 남산뿐 아니라 도심 곳곳에 존재했다. '''남산 고문실을 없앤 것은 가장 큰 고문실을 없앴던 것일 뿐 중정의 고문실을 전부 없앤 것이 아니다.''' 김재규는 고문과 강압수사가 열등한 후진국의 방식이라 보았으며 결국 총체적으로는 나라에 도움이 하등 안되고 그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던 우등한 선진국의 방식인 법치주의의 근간과 멀어지며 국민들에게 피해가 될 거라고 보았다. 하지만 3공화국 후반부의 박정희는 유신 선포 및 극단적인 공포정치를 추구하였기 때문에 이런 김재규의 사상과 대립되었고 김재규를 좋지 않게 보았다. 김재규가 폐지한 남산의 고문실은 안타깝게도 전두환이 집권하면서 다시 생겨난다. 물론 나중에 노태우가 집권하면서 없어졌지만.또한 김재규는 이와 더불어 중정을 해외정보업무 위주로 개편하려 했다. 만일 이게 성공했다면 중정이 더러운 일은 안 해도 됐겠지만 안타깝게도 이 일은 전두환 집권 후에 중단된다. 바꿔 말하면 김재규 지휘하의 중정도 전임자 시절에 비해 자제하려 했을 뿐 더러운 일은 꾸준히 하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정확히 말하면, 명백히 간첩이 아니고 신분이 뚜렷한 교수, 정치인, 학생 등을 멋대로 잡아다가 고문하는 정치 고문을 없앤거고 간첩 고문은 하던 대로 계속 했다. 이 과정에서 간첩이라고 오인한 경우 애꿎은 희생자가 생기기도 한 것. 김재규는 혐의 없음이 명백한 사람들 빨갱이라며 잡아다 고문하고 괴롭혀 오히려 더 반국가적인 생각을 갖게 만드는 것, 즉 '자생적 빨갱이'를 자꾸만 만들어내는 고문 방식에 문제가 있다고 보았고 이것이 북한에서 넘어오는 간첩보다 더 정권 존립을 위협할 것이라고 보았다. 그가 민주화 인사라는 데는 이견이 있으나 최소한 그는 차지철 박종규 같은 미친 간신이 판치는 박정희 정권하에서 그나마 정신 박힌 인사였고 박정희가 김재규 말만 어떻게 좀 들었어도 총 맞아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 간첩 조작 중단(?) === 중앙정보부에 의한 간첩 조작은 그의 부임 이후에도 아예 없지는 않았지만, 전임자 시절에 비교하면 그 수가 극적으로 줄어들었다. 일반적으로 간첩 조작은 일선 공안검사의 지시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의 재임 시기에 있던 건도 전임자의 영향으로 간첩 조작에 익숙했던 중정 직원들이 독단적으로 이행한 것이 아닐까 짐작할 수는 있지만, 그들의 우두머리였던 김재규의 도의적 책임도 없다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김재규가 무능한 중정부장이라는 평을 들은 이유 중 하나가 '''전임자에 비해 간첩을 제대로 잡지 못한다'''는 거였던 것을 보면 간첩 조작에 적극적이었던 전임자와는 달리 그가 그런 행위를 적극적으로 방조했던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 유신 철폐 요청 === 1977년 김재규는 박정희에게 대통령 선거를 직선제로 바꾸는게 어떻냐고 제안한 적이 있고 1979년에는 집회, 시위, 출판, 언론의 자유를 제거하는 조치인 긴급조치 9호를 폐지하자고 주장했으나 박정희는 이 말을 씹었다. 김재규가 더 심한 조항인 긴급조치 10호를 제시한 다음 대신 9호를 폐지하려고 했다고 반박하는 사람도 있는데 본인 진술에 따르면 '아무리 9호를 폐기하자고 해도 말을 안 듣길래, 일단 더 강해보이는 조항인 10호를 신설한 다음 내 권한을 이용해서 실무에서 재량껏 적용을 안 하는 방법으로 완화하려 들었다. 그 분(박정희)께는 '그런 식으로 말해야 된다'라고 한다. 정확한 내용은 아무도 증언을 못 해서 10호를 발의했다는 사실만 남아있지 내용은 찾아볼 수가 없다. 저런 정권 내에서 온건파로 활동하기 위한 처세술이라고 보는 게 맞지 않나 싶음. 그 전까지 긴급조치 9호로 잡혀들어온 학생들 및 정치범을 감면, 방면을 숱하게 해 왔던 김재규의 행동에 비추어 생각해 볼때 뭐가 더 신빙성이 있는지는 독자의 판단에 맡기자. === 직원 퇴직기금 마련 외 등등 === 위의 남산 고문실 폐지와 함께 김재규가 시행한 업적이다. 그의 수행비서였던 [[박흥주]]에 의하면 그는 부장이 되자마자 당시 부장 판공비로 나온 8억원을 이용해 직원 퇴직기금을 만들었다. 직원들이 퇴직하더라도 퇴직금은 받아가길 원한 그의 행적이었다. 정말 헬조센에서 찾아보기 힘든 리더다운 상사였다. 이 외에도 평소 늘 아랫사람이 더 좋은 근무환경에서 일할 수 있게 하기를 바랐고, 중정을 단순한 독재 체제의 유지기구에서 탈피하고 CIA와 같은 현대적인 정보기구로 만들고자 여러가지 개혁을 시도했으며 직원들이 자부심을 가지고 일할 수 있게 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물론 이런 개혁들은 전두환 시절에 싹 다 무위로 돌아갔다. 아랫사람을 끔찍이 아꼈던 김재규의 개인적 인품 덕분에 10.26은 박정희 저격 이후의 청사진이 극히 불안했음에도 불구하고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김재규는 마지막까지 자신의 명령을 따랐을 뿐인 부하들의 구명을 요청했고, 개인적인 회고록에서는 처음에는 독재 철폐라는 이상에 젖어 조금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으나 박흥주와 박선호가 전대갈의 군사정권 하에서 단심에 바로 사형을 선고받는 걸 보고 처음으로 죽고 싶을만큼 죄책감을 느꼈다고 술회하고 있다. 마지막까지 자신은 자결할테니 부하들은 살려달라고 탄원했고, 모두를 쏴 죽인다면 국민들이 저항할 것이라고 울어도 보았지만 10.26 의거 6인의 의사들은 전대갈에 의해서 모두 처형당하고 말았다. 또 사형당하는 부하들의 가족의 생계까지 걱정했다. 때문에 자신이 죽고 나서 재산을 모두 부하들의 가족과, 억울하게 희생당한 10.26에 휘말린 희생자들에게 돌려줄 것을 요청하였다. 물론 박정희의 원수를 갚고자 혈안이 된 전대갈에 의해서 모조리 무산되었다. === 시위 국민 보호 === 말년의 박정희가 자신의 영구집권을 위한 [[유신 헌법]]을 개정하자 군중들은 시위를 일으켰다. 당시 대학생은 걍 대학만 나오면 엘리트 소리 듣는 시대였는데 박정희가 지시한 사항 땜에 시위하면 무조건 영구제적에 앰생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대학생들은 그런거 좆까라고 하며 시위를 일으켰고 긴급조치 9호땜에 수천 명이 감옥에 가게 됐다. 김재규는 이에 안타까워하며 당시 문교부 장관인 박찬현에게 "먼 훗날 우리가 어떤 심판을 받겠나", "국민이 백번을 잘못해도 백한번을 용서해야 되는게 정부인데 제발 학생들을 복교시키자"고 3번이나 간청했지만 학생들 복교시키고 시위 일어나면 자기가 책임져야 된다고 거절당했다. 1979년 10월 16일 [[부마항쟁]]이 일어나자 중정부장으로 조사를 시행한 김재규는 충격을 받았는데 그것은 민간인이 시위대와 의기투합해 음료수와 맥주를 날라주었으며 배후세력 없는 일반의 사람들이 항쟁을 일으켰고 그 분노가 엄청나 수십개소의 파출소가 파괴되었다는 것이었다. 당시 항쟁 참여자의 인터뷰에 따르면 김재규가 최루탄 속에서 어린 소년을 보호하려 드는 등 나름대로의 노력을 했다고 하는데 그 혼자만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느끼고 청와대로 입성한다. 이 시위가 부마에서 끝나지 않고 전국 5대도시로 확대될거란 정보와 판단을 내린 김재규는 박정희에게 대책 강구를 요청했으나 어이없게도 박정희는 "앞으로 부산같은 일이 또 일어나면 내가 총을 쓰도록 허가하겠다. 자유당 때는 최인규나 곽영주가 발포명령을 하여 사형을 당하였지만 내가 직접 발포명령을 하면 대통령인 나를 누가 사형하겠느냐"라며 버럭 화를 내었고 김재규와 대립관계였던 [[차지철]]은 박정희를 옹호하며 "캄보디아에서는 300만 명 정도를 죽이고도 까딱 없었는데 우리도 데모대원 1∼200만 명 정도 죽인다고 까딱 있겠읍니까"라는 말을 했다는 것이었다. 이 시위는 김재규가 [[발터 PPK]]와 [[M36 치프 스페셜]]을 드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ㄴ여기까지의 내용은 김재규 회고록 아니면 항소진술문에만 적혀있는 내용이다. 진위여부는 김재규 혼자만이 앎. 상식적으로 자기를 변호하는 글에서 자신에게 불리한 내용을 적을리가 없잖아? === 최태민 문제에 관한 대립 === {{그그실}} 당시 퍼스트레이디였던 육영수의 사망은 박정희 일가를 정신적으로 붕괴시켰다. 초기의 박정희는 본인이 이미지 전략을 취했던 것과 그렇게까지 동떨어진 인물은 아니었다. 적어도 채홍사를 시켜 대행사 소행사를 하는 봉건적인 짓거리를 하지는 않았고, 비리와는 거리가 한참 멀었으며, 수려한 인품을 바탕으로 인재들을 포섭해 산업 기반을 착실히 세워나갔다. 박정희가 청렴한 독재자라는 평가는 대부분 이러한 시기를 바탕으로 쓰여진 것이다. 그러나 육영수 피격 이후, 박정희는 말 그대로 돌변했다. 그는 가장으로써 엄청난 죄책감을 느꼈으며, 이 죄책감은 자식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감싸기와 도덕적 방기로 표면화되었다. 박지만이 무슨 짓을 하건 내버려뒀고, 가정사에 관해서 간언을 올리면 버럭 화를 내곤 했다. 철권정치를 펼치던 박정희가 정신적으로 매우 불안정해졌으니 주변 사람들이 그대로 놔둘리가 없었다. 곧 그들은 박정희의 자식들에게 들러붙어 엄청난 비리를 저질렀고, 무조건적으로 자식을 감싸기만 했던 박정희는 그 모든 비리를 묵인했다.박근혜에게 접근하여 엄청난 비리를 저지른 최태민은 그런 사람들 중 가장 성공한 비리 사범 중 하나였다. 사이비 영세교의 교주 [[최태민]]은 박정희의 딸 박근혜에게 접근해 '고 육영수(죽은 박근혜 엄마)가 꿈에 나타났으니 어머니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면 나를 통하라'라며 현혹한다. 최는 6명의 부인에 7개의 가명을 둔 문란하고 사이한 인물로 난치병을 치료한다며 사이비 행각을 벌이고 사기, 배임, 강간, 성매매, 뇌물, 융자 알선 등 온갖 범죄를 저질렀다. 김재규는 이런 최가 박근혜를 통해 국정에 영향을 끼치는 것에 큰 우려를 갖고 최의 비리와 인생을 조사해 박정희에게 보고했다. 박정희는 처음엔 최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갖고 있었지만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박근혜가 거듭된 탄원과 설득을 하면서 최를 인정하고 최가 대한구국선교단이란 단체의 총재, 박근혜가 부총재가 되는걸 허가했다. 때문에 김재규가 최에 대한 자료를 보고했을때 "요즘 중앙정보부에선 이런일도 하냐"라고 오히려 역정을 냈다고 한다. 설상가상으로 김재규의 정치적 라이벌인 차지철이 박근혜와 최태민을 옹호하면서 감정의 골은 깊어졌다. 2006년 중앙정보부 수사부 국장이었던 K국장과의 인터뷰에 따르면 김재규는 박정희가 어디서 굴러먹은지도 모를 개뼉다구 같은 사이비 놈이 박근혜를 등에 업고 있는데 놈에게 처벌은 안할망정 그걸 보고한 자신에게 오히려 치욕을 준 것에 충격을 받았다.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인 김계원의 증언에 따르면 박근혜와 최태민을 옹호한 차지철이 그때부터 박정희에게 큰 신임을 받기 시작했고 차지철은 김재규를 엄청나게 견제해 중정부장인 김재규가 청와대에 함부로 들어갈 수도 없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때문에 김재규는 대통령에게 보고를 하기 위해 청와대에 들어갈 때도 김계원을 보려고 한다고 둘러대야 했다고 한다. 이러한 일련의 상황에 대해 김재규가 어떠한 감정을 느꼈을지는 10월 26일만이 알 일이다. K국장의 말에 따르면 박정희가 박근혜와 최태민의 편을 들어주고 시비를 종결지은 이후로도 김재규는 자신에게 최태민의 비리와 과거에 대해 계속해서 조사하고 보고하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김재규는 박정희의 자식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부패 세력이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되는걸 극히 우려했다. 때문에 박정희 본인의 역린임에도 불구하고 거듭해서 최태민에 대한 보고서를 올리며 처단을 요구했고 교통사고를 내서라도 죽여버리고자 했으며 10.26실현 후 사형을 기다리며 쓴 항소이유 보충서에서 특별히 박근혜와 박지만을 일일히 지목해 이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말라고 했는데 씨발 최순실 사태로 이건 현실이 되고 말았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hm&sid1=100&oid=047&aid=0002137542] 자세한 근거. === 민주화 운동 지원 === 장준하가 죽었을때 그의 자식에게 장준하가 사고사가 아닌 정부의 손에 의해 죽었다는 것을 귀띰해주었으며 그의 남은 식솔들에게 경제적 지원을 해주었다. 김영삼을 구속시키려는 박정희를 간곡히 만류하였으며 김대중에게도 감옥에 수감되어있던 상태에서 병원에서 지내게해주거나 가택연금을 해제시켜주는 등 많은 도움을 주었다. 대학총장들에게 데모하는 대학생들을 처벌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하였고 구속되어있는 대학생들을 풀어주고 문교부장관에게 학생들에 대한 대우 개선을 요구하였다. 김수환 추기경과도 안면을 트고 지냈는데 김수환은 박정희를 환자로 비유하는 김재규에게 큰 충격을 받았다고 말한다. 김수환은 10.26이후 강신옥 변호사에게 김재규의 변호를 부탁하였으며 그는 김재규 사후 그의 식솔들을 지원하기도 했다. 이들 이외에도 많은 민주인사들이 김재규의 도움을 받았다. 중정부장이었음에도 민주화운동을 지원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한 일이며 이러한 일들은 김재규의 민주주의에 대한 발언을 단순한 변명으로 치부하기 어렵게 만든다. === 정치범 처벌 완화 === {{인용문|항소심 재판은 싱겁게 끝났다. 심리할 것이 없었다. 항소심은 1심 선고 9년 형을 2년 6월 징역형으로 줄였다. 정치범들에 대한 형의 선고에 중앙정보부의 개입 조정이 있었던 것은 이제 공지의 사실이 되어 있다. 중앙정보부장이 신직수로부터 김재규로 바뀐 것이 정치범의 형량이 대폭 줄어든 원인이었다. 보안법이나 긴급조치로 정치범을 될수록 잡아들이지도 않았다. 1976년 중반 이후의 추세였다. 반성문만 쓰면 웬만하면 석방했던 것도 김재규의 방침이었다.|이부영 의원}} 중앙정보부장에 오른 후 박정희의 공포정치에 가장 큰 반감을 가지고 일상화된 공포정치 및 정치범 양산에 반대하는 정책을 여러모로 폈다. 유신 말기 전제적인 공포정치와 강경책을 선호하던 박정희와 김재규의 사이가 틀어지게 된 결정적인 계기 중 하나가 이것이었다. 차지철은 경호실의 권력을 남용해서 전근대적인 전제정치 수단들을 마구 사용해서 박정희의 눈에 들었다고 한다. 박정희가 이 따위로 굴었던 이유는 간단한데, 박정희는 김재규와 차지철 시대 이전까지는 자신에게 찬동하는 가림막이 되어주는 2인자를 가져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차지철과 김재규는 박정희의 권위를 받아 권력을 얻은 2인자인 반면, 그 이전까지 김종필 등은 전부 박정희와는 독립된 원인으로부터 권력을 가진 2인자였다. 즉 1인자와 대립하는 2인자였다. 5.16은 4.19를 계승한다는 명분으로, 그다지 높은 위치가 아니었던 박정희가 국민의 지지를 얻어 성립되었다. 이를 고깝게 여기는 세력 역시 내부에 존재하였기 때문에 초기의 박정희는 전제적 권력을 가진 구조가 아니었고 민중의 눈치를 봐야 했으며 이는 유신체제가 공고화되기 전까지 쭉 이어진다. 유신이 전체적으로 독재정임에도 불구하고 신민당 등에게 어느 정도 정치영역을 허락할수밖에 없었던 것, 한국적 민주주의 같은 소리를 하면서도 최소한의 형식적 민주주의를 유지하는 척은 해야 했던 것, 그로부터 김영삼 김대중 등이 활동할수 있었던 것, 그리고 그 결과 완전히 폭압적인 독재로는 나아가지 않았던 것 등등은 전부 이런 구조에서 기인한다. 유신 이후 이러한 내부의 견제가 무너지고, 김종필이 2인자 자리에서 물러난 이후, 박정희는 처음으로 자신에게 찬동하는 2인자를 갖게 되어 몹시 기뻐하고 있었다. 그런데 새로 들어온 김재규 역시 그 전까지의 2인자들처럼 사사건건 자신의 정책에 반대하며 박정희를 견제하는 역할로 행동하려 했던 것이다. 박정희한테는 이것이 굉장히 불쾌할 수 밖에 없었다. 지금 보면 기이하게까지 여겨지는 차지철에 대한 의존은 이 사실을 배경으로 접근하면 이해할 수 있다. 유신이, 그 이전에 존재했던 이승만이나, 전두환보다 더 깨끗했던 것은 사실이다. 최소한 그들처럼 대규모의 학살을 자행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박정희 개인이 매우 도덕적으로 깨끗한 인물이어서 그랬던 걸까? 어떤 역사과정의 결과를 개인의 미덕이나 탁월함 덕분으로 돌리고 영웅으로 추앙하는 역사관은 물론 감동적이고 대중들은 그렇게 평가하기를 즐기지만, 전혀 합리적이지도 않고, 과학적이지도 않으며, 당연히 역사적이지도 않다. 박정희는 광장에서 살인을 저지르진 않았지만 사조직과 중정, 보안사를 동원해서 지속적으로 밀실에서의 살인은 저질렀다. 인혁당 사건 같은 사건이 대표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정희가 폭압적인 제재로 나아서지 않았었던 이유는, 그의 권력 기반 자체가 어쨌든 대중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는 사실에 있다. 때문에 그렇게 어느정도 허용된 민주적 영역에서, 정치적 동기로 박정희를 견제했던 김종필 같은 사람이나, 개인적인 동기로 박정희를 견제했던 김재규 같은 사람이나, 민주정부의 수립을 목적으로 대립했던 민주화 세력의 견제 같은 게 있어 박정희가 폭압적으로 나서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예방하고 있었던 덕분이라고 보는게 더 올바르다. 실제로, 그런 견제 세력이 가라앉고 자신의 권력이 확립되자마자 박정희는 발포 명령 운운하며 차지철의 200만 학살 발언을 묵인함으로써 곧바로 다른 독재정이 저질렀던 짓과 똑같은 짓을 저지르려고 들었다. 목줄에 묶여 있고 재갈을 물린 개는 물론 사람을 물지 않을 거다. 그런데 그게 그 개의 착함을 증명하나? 김재규를 재평가하는 의의는 여기에도 있다. 개발독재 시대는 분명히 공과 과가 있다. 그러나 그 공이 박정희에게 전적으로 돌아가는 것의 허구성을 널리 알리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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