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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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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하와 관련된 트리비아== 이 분들 역시 10.26의 주역들로 잊어서는 안 되는 분들이다. 김재규는 마지막 유언에서까지 부하들은 그저 자신의 명령을 따랐을 뿐이니 극형을 면해달라고 탄원했지만 묵살되었다. 오히려 그저 자신의 명령을 따랐다고 말하는 김재규의 옆에서 아래와 같이 꿋꿋하게 말하며 목숨을 구걸하기보다는 자신들도 신념을 가지고 행동한 것임을 증명하려고 들었다. 참고로 당시 10.26에 참여한 이들은 아래와 같다. 보직은 사건 당시 기준이다. 중앙정보부장 김재규, 중앙정보부 비서실 의전과장 박선호, 중앙정보부장 수행비서, 육군 포병대령 박흥주, 중앙정보부 안가 경비조장 이기주,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운전기사 유성옥, 중앙정보부 안가 경비원 김태원 여기에 사형당하지 않았지만 중앙정보부 안가 경비원 유석술과 중앙정보부 안가 경비원 서영준이 징역을 살았다. 여기는 김재규 장군의 가장 가까운 부하였던 박선호, 박흥주를 소개한다. ===박선호=== 1934년 경북 청도 출신, 박선호는 김재규와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이다. 현재의 해병대 대령에 해당되는 해군 보병 대령으로 전역했던 박선호는 상명하복식의 군대와는 전혀 다른 사회의 구조에 적응하지 못하고 어려움을 겪고 있었으나 김재규의 도움을 받아 중앙정보부에 들어왔고 평소 김재규가 "거만하게 행동치 말라", "책을 많이 읽어라"등 따뜻한 조언을 해주었기에 김재규에게 큰 존경심을 가졌다. 하지만 의전과장이란 자리가 박정희의 술시중을 드는 여자나 섭외하는 소위 채홍사 같은 자리라는걸 겪게 되고 독실한 크리스챤인 그는 사퇴를 고민하였으나 김재규가 "자네가 없으면 궁정동 일을 어떻게 하겠나"하고 간곡히 만류하여 10.26 직전까지도 재규어 때문에 일을 하고 있었다 한다. 최후 진술에서 박선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용문|김재규 부장님을 모셨다는 것을 첫째 영광으로 생각하고, 저로 하여금 항상 인간으로 일깨워 주시고, 국가의 앞날을 버러지의 눈이 아니라 창공을 나는 새의 눈으로 볼 수 있게, 똑바른 눈이 될 수 있도록 길러 주신 데 항상 영광으로 생각했습니다. 지금 또 그와 같은 상황에 처해도 저는 그 길 밖에 취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박흥주=== 1939년 평안남도 평원군 출신, 박흥주는 당시 국내 최고 명문 고등학교중 하나였던 서울고를 최고 수준의 성적으로 졸업하였으나 집이 너무도 가난했기 때문에 학비를 댈 형편이 안되어 서울대가 아닌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하였다. 육사에서도 공부벌레란 말을 들을 정도로 학문에 열중하여 18기 생도 중 최우수로 졸업하며 포병소위로 임관하였다. 박흥주가 전속부관이 되었을 때 사단장이 재규어였는데 이때부터 박흥주는 재규어에게 충성을 맹세하게 된다. 굉장히 유능했기 때문에 39세에 대령을 다는 초고속승진을 했으며 엄청난 권력을 가진 중앙정보부장의 수행비서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성동구의 허름한 판자촌에서 사는등 군인으로서 흠잡을데 없는 청렴함과 인간성을 보였다. 10.26 이후 사형을 선고받았을때는 김재규를 원망키는 커녕 "남자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는다"(士爲知己者死)는 글을 적었다고 한다. 다음은 비운의 현역 육군대령 박흥주 수행비서의 사랑하는 아내와 자녀들에 대한 유서의 일부이다. -부인에게- '애들에겐 이 아빠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으며 그때 조건도 그러했다는 점을 잘 이해시켜 열등감에 빠지지 않도록 긍지를 불어넣어 주시오. 앞으로 살아갈 식구를 위해 할 말은 못하고 말았지만 세상이 다 알게 될겁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가 죽지 않았다면 우리가정을 그대로 놔두지는 않을게요, 정신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도와줄 것이라고 생각하오.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의연하게 떳떳하게 살아가면 되지 않겠소.' -두 딸에게- '아빠가 없다고 절대로 기 죽지 말고 전처럼 매사 떳떳하게 지내라. 아빠는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이다. 너희들은 자라나는동안 어머니와 친척어른들의 지도를 받고 양육되겠지만 결국 너희 자신은 커서 독립하여 살아야 하는것이다. 독립정신을 굳게 가져야한다. 조금 더 철이 들 무렵이나 어른이 된 후에도 공연히 마음이 약해지거나 기죽지 말고 용기를 가지고 헤쳐나가려는 강한 정신력을 가져야한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것이 바로 선택을 어떻게 하느냐가 아니겠느냐. 자기 판단에 의해 선택하면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은 지게 되어 있다. 후회하지 않는 선택을 해야한다.' 참고로 이분이 김재규의 업적을 알린 분이다. 1심 재판 중 면회온 태윤기 변호사에게 업적 몇가지를 알려주셨다. 김재규 장군님께서 재평가를 받으신 후, 반드시 재조명받고 특진되셔야 하는 참군인 중 한 명.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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