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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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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사 이후 == [[10.26]] 사건 다음날 보안사령관 전두환의 명령에 의해 체포되었다. 이후 1979년 12월 18일 군사재판을 통해 '내란목적살인 밎 내란미수' 죄로 사형이 확정되고 군교도소를 거쳐 사대문형무소로 이전되었다가 1980년 5월 24일 서대문형무소에서 부하들과 함께 사형 집행이 내려졌다. 사형장면 나온 자료 : [http://blog.naver.com/aa6753/220795466265] 현재는 지옥에서 벌집핏자 전문 요리사로 활동하고 계신다. 한강에서 떠오를 예정인 주갤럼들은 가서 꼭 맛보도록 하자. 사후 [[경기도]] [[광주시]] 오포읍 능평리 4-1 삼성개발공원묘원에 안장되었다.<ref>[http://blog.daum.net/yacho2011/1002 자동차 네비게이션 검색 시]에는 [https://place.map.kakao.com/1647768583 오포읍 능평리 4-1]로 하는 것이 가장 편리하며, 실제 지적상 묘소의 정확한 지번은 경기 광주시 오포읍 능평리 21-3이다. [https://place.map.kakao.com/294625471 다음 지도에 김재규 장군 묘소의 위치가 등록되었다!]</ref> 혹시라도 가고싶으면 1150번, 1500-2, 17번 버스를 타고 '시안공원묘지.주성 엔지니어링' 정류소에서 내리면된다. 참고로 묘지 꼭대기에있어서 버스에서내려서 한참 걸어야한다. 묘지는 [[반달리즘]]에 의해 '의사' 단어가 훼손된상태다. 내가 역사배울때 김재규장군님에 관한 내용은 그냥 내부분열로 박정희 총쏴죽였다.라고 한줄로 적혀있었고,역사선생도 "엥?김재규??그놈??차지철이 박정희에게 총애받는 것에 질투를 느껴서 박정희 쏴죽였는 놈 아냐?"라는 식으로 김재규장군님의 거사를 희화화했다. 최순실게이트 터지기 이전까지만해도 그렇게 배웠고,그렇게 기억하고있었다만... 죄송합니다 장군님ㅜㅜ 이제서야 진면목을 알게돼니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전땅크 일당은 자신들의 "거어어어어사"를 숭고한걸로 만들기위해 때려죽여야 할 탐욕스러운 개새끼를 창조해내야 했고 검소했던 김재규를 탐욕의 화신으로 만들고저 재산이 얼마니 이런 썰을 유포시켰다. 그중 집에서 비싼 미술품이 수두룩하게 나왔다고 주장 하는데 그중 하나가 아직도 논란을 빚고있는 [[미인도]]다. [[천경자]] 미인도 위조 사건과 이래저래 연관이 있다는 썰이 많다. 아직까지는 몇몇 언론사와 재야 인사들의 개인적 노력 말고는 제대로 된 검증이 안 일어나서 애매하긴 하지만 한 번 읽어보는 것도 좋다. === 평가받지 못하고 묻힌 이유 === {{인용문|특이한 사람이다. 중정부장이면서도 항상 민주주의에 대해서 얘기하고 다녔다.|윌리엄 클락, 전 미 대사관 정치참사관}} 유신 정권을 이어 자기 독재체제를 구축하려고 들었던 전문어에게 있어 김재규는 당연히 족쳐야 되는 대상이었고 유신 권력의 핵심이었던 중정부장이라는 출신 때문에 좌파 인사들은 선뜻 그를 옹호하려고 들지 않았다. 중정부장으로서 권력의 중심에 서 있던 그가 돌연 민주주의를 외치며 독재자를 암살한다는 것은, 소설이나 드라마에 맞는 일로 여겨졌지 현실적인 추론으로 여겨지질 않았다. 고로 자연스럽게 그가 주장하는 '자유민주주의'는 실패한 암살범의 변명으로 여겨졌고, 집권에 실패한 암살자에게 따라붙는 유서깊은 평가인 '권력욕에 찬 시해범','우발적 살해범' 따위의 모멸적인 낙인이 찍혔다. 그의 원 세력인 유신 세력에게서 그는 등을 돌렸으며, 좌파 진영은 혹 민주화의 공을 빼앗길까봐 그리고 권력을 맛보는 동안 자신들의 지지층이 등돌릴까봐 그가 권력욕과 집권욕 때문에 박정희를 시해한 쿠데타범이라는 우파의 말에 침묵으로 동조해서 죽게 내버려뒀다. 그렇게 김재규는 쓸쓸히, 들어 주는 사람 하나 없는 가운데 '자유 민주주의를 만끽하라'고 외치며 사형대로 홀로 걸어올라갔다. 하지만 민주화가 이뤄진 후 공개된 수많은 기록물,증언들을 살펴보면, 그는 정말로 자유민주주의라는 막연해보이는 대의를 위해서 10.26을 결행했음을 의심하기 어렵게 된다. 적어도 그를 접하고 그의 인품을 알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김재규가 야망이나 야심이 아니라 개인적인 민주화에 대한 신념으로 10.26에 나섰음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다. 일례로, 시큰둥해서 그를 변호하러 왔던 인권변호사는, 김재규를 만난 지 30분만에 그에게 감화되어 열과 성을 다해 그를 변호하려 들었다고 한다. 12.12가 터진 이후, 신군부는 대놓고 김재규를 개새끼로 몰아가려고 내란사범은 아니다는 소신을 내비친 판사를 끌고가 고문하는 등 서슬이 퍼렇게 압박을 하기 시작했다. 이 당시의 상황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없는 사람들이 가끔 김재규가 말한 자유민주주의적 철학과 신념은 다 변호사가 써 준거 아니냐? 좌파세력이 써준 걸 읊은 것 뿐 아니냐?고 하는데, 당시 좌파세력은 전술되었다시피 김재규를 덮는게 더 이득이었고 변호사들 역시 이런 상황에서 김재규를 옹호해서 얻을 이득이 없었다. 정말로 김재규에게 감화되어 변호를 끝까지 시도했다고 보는 게 올바르다. 실제로, 이 때 김재규를 변호한 강신옥 변호사는 재판 후 김재규를 너무 열심히 옹호했다는 죄목(?)으로 신군부에 끌려가 2개월간 갖은 고초를 겪는다. === 김재규를 재평가하는 의의 === 좌측의 경우, 10.26 이전에도 유신은 이미 '자연적으로' '민중에 의하여' 몰락할 정권이었는데 이를 실현하지 않고 인위적으로 끼어들어 결과적으로 유신을 청산하지 못하게 만들었다는 이론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현실성보다는 정치성에 치중하여 쓰여진 주장이다. 박근혜의 집권 이후 박사모 등을 통해 새삼 우리 사회에 뿌리깊게 남아 있는 유신의 힘을 재각하면서 과연 유신이 그렇게 간단하게 무너질 수 있는 적이었는지에 대한 회의가 대중들 사이에 공유되며 이 주장은 설득력과 호소력을 잃었다. 유신의 연장선상에 가상의 몰락을 설정하여 '영원히 번영하는 독재정은 있을 수 없다'는 역사적 교훈을 인위적으로 생성하고자 했던 것이 이 주장의 궁극적인 목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 의도가 좋다 하더라도, 현실로부터 괴리된 역사관은 반드시 사회에 그 대가를 치르도록 한다. 이러한 주장은 후대의 사람들에게 '과연 그 당시의 지식인들에게 유신이란 무엇이었는가?'에 대한 이해를 어렵게 만들어 그 당시의 지식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박정희의 영구집권에 대한 현실적이었던 우려, 박정희의 세습에 대한 우려, 공포정치의 실상 등을 명확하게 전달하지 못하게 되었다. 10.26은 그러한 지식인 사회의 불안감을 한껏 머금고 이루어진 것이다. 이 점에서 이 주장은 수정되어야만 한다. 거기에, 이 주장의 뒤에 깔린 민중을 민주화의 수단으로 이해하는 방식은 은연중 민중의 희생을 긍정하고 있어 반감을 불러일으킨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라지만 그게 너희 피는 아니지 않느냐?는 물음 역시 직접적인 민주화의 실현 대중 사이에서 공유되고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또, 박정희 신드롬이 박정희에 대한 연민이 근본적인 원인이라면 10.26 의거 직후부터 계속 그 신드롬이 이어져왔어야 하지만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code=113&artid=201612191730461&pt=nv 주간경향 칼럼]에서 보여주듯 박정희 신드롬은 IMF 이후 시작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또, 운동권의 경우 10.26을 평하는 것이 부마항쟁의 의의를 축소하는 것이라고 두 사건 사이에 그릇된 대립항을 설정하여 10.26을 공격하는 경우가 잦다. 이 역시 개인과 사회 간의 유기적인 영향을 통찰하지 못하여 일어난 소리다. 상술되었다시피 수도 없이 물리적 혁명을 계획했던 김재규가 마침내 그 실현을 하도록 강력한 동기를 제공한 것이 부마항쟁이었다. 부산과 마산의 시민들이 들고 일어나 공포 정치 하에 억눌러지던 민의를 김재규에게 전달하지 않았더라면 10.26 역시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부마항쟁이 김재규를 자극했고 또 김재규는 부마 시민을 구원한 것이다. 또 부마항쟁의 성립 배경에는 김대중과 김영삼을 위시한 민주화 세력의 결사적인 저항이 있었다. 민주화의 논공행상이라는 정치적 현안에서 벗어나 바라보면 개인과 개인, 사회와 개인간의 관계는 이렇게 긴밀하게 형성되어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양측 모두 민주화에 지대한 공헌을 한 것으로 파악해야지 한 사건이 다른 사건의 역사적 의의를 깎아내리는 것은 결코 아니다. 우측의 경우, 10.26 때문에 박정희의 치세가 끊어져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을 잃고 이 나라가 요모양 요꼴이라는 건데 야...이건...솔직히 진지하게 다뤄주기도 싫어서 그냥 생략하겠다. 후대의 사람들이 몸젠의 로마사를 읽고 평하듯이 대중의 독재자에 대한 갈구는 일종의 해소 불가능한 대중적 정서의 하나이지 진지하게 이론화되어 정당성을 얻기에는 신빙성과 설득력이 매우 떨어진다. 지금 한국의 보수 세력은 매우 비정상적이다. 한국 외의 모든 나라, 평화로운 정권 교체를 경험하였으며 민주주의가 공고화된 나라에서, 어떤 보수당도 그것을 지지하는 게 독재를 옹호하고 지지하는 것을 함의하지는 않는다. 냉전 시대가 종식된 지 오래임에도 불구하고 경제적 어젠다가 아닌 안보적 어젠다를 제 1의제로 삼아 당론을 구성하지도 않는다. 때문에 세계는 이미 21세기에 촛점을 맞추고 당쟁을 구성하고 있는데, 우익 세력의 독재에 대한 향수와 집착으로 인해 구시대적인 독재와 반독재 담론에서 정치 담론이 진보하지 못한 채 발목을 잡혀 있다. 김재규는 안보를 직접적으로 담당하는 중앙정보부장으로서, 일부는 우익 계열과 사상을 공유하는 지점이 있었으나 자유민주주의에 대해서만큼은 매우 뚜렷하고 확고한 신념을 가진 인물이었다. 정상적인 우익이라면 마땅히 김재규와 같아야 한다. ㄴ 한국은 보수가 없는 나라다. 한국의 정치성향 구조는 빨갱이 아니면 친일파만 존재할 뿐이다. 마치 독일이 진보 아니면 나치만 존재하는 것과도 같다. 오늘날 다시 김재규를 평가하는 것은 친일파로부터 이어지는 수구 세력화된 보수 전체가 반성하고 바라볼 수 있는 전범을 공고히 세우며, 박정희에 길항하는 역사적 대립항을 새로 만들어내는 의의가 있다. 중정부장이라는 그의 형식적 신분 탓에 과거에는 그를 평가하기 꺼려했던 좌파 쪽에서 먼저 재평가의 물결을 일으키고 손을 내밀어 모범적인 우익적 인물상을 제시해준 것은, 독재의 긴 터널에서 빠져나온 후 중립적인 관점에서 과거를 조망하고 평가할 수 있는 역사적 역량을 드디어 한국이 소유했음을 의미한다.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를 만끽하는 날, 김재규는 분명히 재평가받을 것이다' 그 손을 잡고 안 잡고는 아직도 김재규라는 말만 들어도 경기를 일으키는 틀딱 새끼들에게 달렸다. ㄴ 민중에 의해 자연적으로 몰락할 정권이었으면 북한은 언제 무너지는거냐 현실성 하나도 없는 개소리는 안하는게 답이다 글 개잘썼네 책 내용같은 거 스크랩 해온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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