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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위 국민 보호 === 말년의 박정희가 자신의 영구집권을 위한 [[유신 헌법]]을 개정하자 군중들은 시위를 일으켰다. 당시 대학생은 걍 대학만 나오면 엘리트 소리 듣는 시대였는데 박정희가 지시한 사항 땜에 시위하면 무조건 영구제적에 앰생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대학생들은 그런거 좆까라고 하며 시위를 일으켰고 긴급조치 9호땜에 수천 명이 감옥에 가게 됐다. 김재규는 이에 안타까워하며 당시 문교부 장관인 박찬현에게 "먼 훗날 우리가 어떤 심판을 받겠나", "국민이 백번을 잘못해도 백한번을 용서해야 되는게 정부인데 제발 학생들을 복교시키자"고 3번이나 간청했지만 학생들 복교시키고 시위 일어나면 자기가 책임져야 된다고 거절당했다. 1979년 10월 16일 [[부마항쟁]]이 일어나자 중정부장으로 조사를 시행한 김재규는 충격을 받았는데 그것은 민간인이 시위대와 의기투합해 음료수와 맥주를 날라주었으며 배후세력 없는 일반의 사람들이 항쟁을 일으켰고 그 분노가 엄청나 수십개소의 파출소가 파괴되었다는 것이었다. 당시 항쟁 참여자의 인터뷰에 따르면 김재규가 최루탄 속에서 어린 소년을 보호하려 드는 등 나름대로의 노력을 했다고 하는데 그 혼자만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느끼고 청와대로 입성한다. 이 시위가 부마에서 끝나지 않고 전국 5대도시로 확대될거란 정보와 판단을 내린 김재규는 박정희에게 대책 강구를 요청했으나 어이없게도 박정희는 "앞으로 부산같은 일이 또 일어나면 내가 총을 쓰도록 허가하겠다. 자유당 때는 최인규나 곽영주가 발포명령을 하여 사형을 당하였지만 내가 직접 발포명령을 하면 대통령인 나를 누가 사형하겠느냐"라며 버럭 화를 내었고 김재규와 대립관계였던 [[차지철]]은 박정희를 옹호하며 "캄보디아에서는 300만 명 정도를 죽이고도 까딱 없었는데 우리도 데모대원 1∼200만 명 정도 죽인다고 까딱 있겠읍니까"라는 말을 했다는 것이었다. 이 시위는 김재규가 [[발터 PPK]]와 [[M36 치프 스페셜]]을 드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ㄴ여기까지의 내용은 김재규 회고록 아니면 항소진술문에만 적혀있는 내용이다. 진위여부는 김재규 혼자만이 앎. 상식적으로 자기를 변호하는 글에서 자신에게 불리한 내용을 적을리가 없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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