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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기록=== ====왕조의 반란==== 후한서에는 최리가 없고 신나라가 세워질 때 낙랑군에서 '''출신불명'''<ref>어떤데서 국뽕이 김치맨이라고 구라까서 반달방지를 위해 출신불명이라고 문서에 기재</ref>의 왕조(王調)가 서기 25년에 반란을 일으켜 군태수 유헌(劉憲)을 죽이고 자기가 태수직을 차지했다. 이 반란을 서기 30년 왕굉(王閎)과 그 부하양읍(楊邑)<ref>둘다 짜장맨이다. 그중 왕굉은 서주라고 출신지까지 명확히 나와있음.</ref>이 진압하고 광무제가 동년에 진압하라고 새로 보낸 태수 왕준(王遵)을 맞이했다. 후한서에는 이 사건이후로 낙랑에 대한 언급이 없다. ====낙랑군의 행정개혁==== 광무제가 후한을 다시 세운이후로 조정은 돈아깝다고 일부 관직들을 없애고, 관리안된다고 일부현들을 폐지했다. 이때 변방지역인 유주, 병주, 서량일대에 오랑캐들 방어하라고 설치된 군정직 '도위'가 이때 폐지되었다. 그리고 도위가 폐지되면서 걔가 일하던 현도 같이 폐지되는 경우도 있었는데, 낙랑군의 경우는 단단대령<ref>낭림산맥</ref>동쪽에 있는 영동7현(현재의 원산근처~함흥까지)에 동부도위가 있었는데, 이 동부도위를 폐지하면서 영동7현을 폐지했다. 그것도 걍 이전부터 토착민으로 살던 남옥저를 독립시켰음.<ref>이런일이 후한유주, 병주, 구삭주에서 자주 일어났다. 낙랑군외에 요서군과 우북평군도 저렇게 되면서 본의아니게 한나라가 오환에게 땅을 상납하는 꼴이 됐음. </ref> ====삼국사기에 추가로 언급되는 내용==== 신라본기쪽에서 다른 기록이 나온다. 서기 36년에 낙랑의 군대가 신라 타산성을 박살냈고, 낙랑국이 무너진 서기 37년에 신라에 낙랑난민들이 들어와서 왕이 경주일대에 살도록했다는거. 그리고 훗날인 44년 한군이 낙랑을 침공해 고구려를 쫓아냈다는 기록도 있다. ====대충 타임라인 정리==== 이걸 정리하면 서기 25년 왕조가 반란일으켜서 낙랑군장악(후한서)-서기30년 왕굉이 반란진압(후한서), 낙랑국왕 최리가 옥저로 사냥나감(삼국사기)-서기36년 낙랑군이 신라공격(삼국사기)-서기37년 낙랑국띨망(삼국사기)-서기44년 후한이 낙랑을 뺏음(삼국사기)-서기313년 미천왕이 낙랑군 정복(진서, 삼국사기) 이렇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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