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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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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현대 [[사회주의]] 이념의 기본 토대가 되는 이념'''<ref>사회주의 개념 자체는 마르크스 이전부터 존재해왔는데, 우리가 마르크스를 사회주의의 대표자라고 아는 까닭은 흔히 사회주의라 불리는 것이 이전의 사회주의가 아니라 마르크스의 사회주의이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이전의 사회주의를 공상적 사회주의, 자신의 사회주의를 과학적 사회주의라고 불렀다. 이는 마르크스가 이전 사회주의를 깍아내리고 자신의 사회주의를 진정한 사회주의로 평가받기 위한 의도적 명칭이라고 할 수 있다.</ref> 소위 말하는 계급론, 노동자, 생산수단, 분배와 같은 담론의 첫 시조격이기 때문에,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사멸로 인해 집권한 사회민주주의마저도 마르크스의 이론을 차용할 수 밖에 없다<ref>사회주의와 사회민주주의가 상당히 대척관계에 있지만 기본적인 세계관, 사회경제적 이론은 공유한다 다만 운동과 정치의 방향성에서 (정통)마르크스주의와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따라서 사회민주주의가 사회주의와 충돌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마르크스주의를 자기대로 수용하는 과정에서 국가주의적, 독재적 성격이 강하게 나타나는 레닌-스탈린주의(혹은 레닌-트로키츠주의)와의 충돌이라고 보면 된다</ref> 칼 마르크스 본인은 본인이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라고 말한 바 있다. === 이론 === ==== 마르크스주의 경제학 ==== 사실상 사회적으로 거론되는 좌파적 이념은 사실상 마르크스의 『자본Das Kapital』<ref>흔히 '자본론'으로 알려진 그 책</ref>에서 시작했다고 봐도 무방하며, 좌파들에게 아주 기본적인 세계관, 사회경제관을 제시한다. 즉 대부분의 좌파들의 입에서 나오는 사회경제적 용어나 태도, 이론은 사실상 『자본』의 내용을 읊조리거나 각색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 [[노동가치론]] =====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알파이자 오메가. 영국 고전파 경제학의 이론적 기반을 자기가 180도 비틀어서 자기 나름대로 재구성했다. 그러나 고전파 경제학에서도 노동가치론을 끝까지 전개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에 마르크스도 고전파 경제학의 노동가치론을 액면수용하는 것이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마르크스주의의 노동가치론은 한 산업 혹은 한 기업 내 한 노동자의 노동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ref> 사실상 전체 노동자들의 평균 노동시간을 의미한다</ref>을 의미한다. 아무리 단순노동으로 점철된 18,19세기라고 하더라도 비슷한 노동시간인데도 현격하게 그 가치가 다르게 평가받는 현상은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에, 특히 능력의 차이를 해석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사회 전체를 통으로 봄으로서 대략적으로 노동시간은 이렇다 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고 이 노동시간을 가지고 가치를 해석할 수 있게 되었다<ref>마르크스주의에서 말하는 노동이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 시간을 의미할 경우 이때 노동량 노동투입은 노동시간과 동일하게 된다.</ref>. 예를 들어서 가격이 동일한 두 재화(상품)은 어떻게 해서 나오는 것인가? 혹은 어떤 두 재화(상품)이 교환될 수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바로 각 재화(상품)을 생산하는데 들어가는 사회적 필요 노동시간이 동일하기 때문이다. 각기 물리적, 화학적, 문화적으로는 상이하더라도 사과를 생산하는데 10시간의 사회적 필요 노동시간이 소요되었고 배를 생산하는데도 마찬가지로 10시간의 사회적 필요 노동시간이 소요되었다면 사과 = 10시간의 사회적 필요 노동시간 = 배 이런 등식이 성립하므로 교환될 수 있다. ===== 임금철칙설 ===== 가치가 만약 노동시간에서 나온다면 화폐로 측정된 가격은 어떻게 산출될 수 있을까? 노동을 10시간 했다고 했을 때 10시간의 노동에 걸맞는 임금이 얼마인가? 마르크스주의에 따르면 임금노동자는 하루 하루를 연명하는 수준의 임금을 받는다. 따라서 임금은 그 다음날 노동력을 재생산 할 수 있을 만큼의 임금을 받게 된다<ref>마르크스는 이를 유물론적 변증법과 c-m-c 공식을 통해 노동이라는 상품을 팔아서 생기는 화폐수익은 그 다음날 필요한 재화(상품)을 구매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주장한다.</ref> 노동력 재생산이란 그 다음 날에 노동력을 재투자하는 것을 의미한다. 노동자는 일하지 않으면 굶어죽으므로 그 다음날 노동을 재투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재투자는 그냥 이뤄지지 않는다. 각종 소비재를 구매하여 소비함으로서 그 다음날 노동력을 재투자할 수 있는 상태가 되야 한다. 이때 필요한 재화를 (노동력)재생산 재화라고 한다. 그런데 그 재화, 즉 재생산 재화의 가격을 정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그 재화의 가치를 알아야하는데, 마르크스주의는 기본적으로 노동가치론을 택하기 때문에 그 재화, 즉 노동력 재생산 재화를 생산하는데 필요한 노동이라고 할 수 있다. 요약하자면 임금은 노동력 재생산에 필요한 노동, 다시 말해 그 다음날 노동력을 재투자 하는데 필요한 재화나 상품을 생산하는 요구되는 노동과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재생산에 필요한 상품 가격의 합이 곧 임금이라고 할 수 있다. '''더 쉽게 말해서 노동력a의 가치(임금) = 노동력a를 재투자하기 위해 필요한 재화b의 가격 = 재화b를 생산하는데 필요한 노동력c''' 라고 할 수 있다<ref> 이 때 가치론은 사회적 필요 노동시간 즉 평균 노동시간으로 계산해야한다.</ref> ===== 잉여가치론 ===== 위에서 말한 임금은 당연히 자본주의 사회 즉 브루주아가 생산수단을 사적으로 소유하고 노동자가 자기 노동을 판매하고 화폐이익을 얻는 경우의 임금을 말한다. 이런 자본주의적 체제에서 노동자는 노동력 재생산 노동과 동일한 임금을 받는다. 왜 더 많은 임금을 받지 못하는가? 자본가가 노동력에 걸맞는 임금을 '온전히' 주지 않기 때문이다<ref>자본가는 분명히 노동력에 보상한다. 그러나 그것이 노동시간과 일치하는 임금이 아니라 그보다 모자란 임금을 준다. 이를 주의해야한다.</ref>. 이때 자본가가 노동자에게 미지급한 임금만큼의 노동(시간)을 마르크스는 잉여노동이라고 부르며, 그 금액을 잉여가치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자본가가 줬어야할 총 임금 액수는 얼마인지를 어떻게 알아낼 수 있는가? 노동가치론에 의거하면 모든 생산물들에는 노동이 투여되며, 투여된 노동시간 만큼 생산물에서 가치가 발생한다. 따라서 어떤 상품이 판매되었다면 그 상품을 생산하는데 특정노동시간이 판매된 것이므로 그 노동시간만큼 노동자는 자기 몫을 받아야 한다. 만약 비용 100을 들여 120원의 매출이 발생하였다면 이 120원 전액이 노동자에게 귀속되는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상품의 생산과정에는 그 상품 자체를 생산하는데 필요한 노동만 들어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상품a를 만드는데는 노동력뿐만 아니라 원료, 도구 등 생산수단도 같이 요구된다. 따라서 상품a 그 자체를 만드는데 오로지 노동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므로 노동 외적 요소에 대해서는 노동자 몫을 요구할 수 없다. 순수하게 노동의 산물에 대해서만 보상해야한다. 일전에 임금은 노동력 재생산 비용만큼 받으므로 노동자는 부분적으로 자기 몫을 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질문이 요구된다. 얼마만큼의 임금을 추가적으로 받아야 온전한 몫을 받았다고 할 수 있는가? 바로 판매해서 얻은 모든 이윤 즉 순이익(혹은 차익 전부)을 노동자에게 줘야한다. 왜냐하면 노동가치론에 따르면 상품 가격은 노동시간에 의해 정해지고, 상품이 특정 가격에 팔렸다면 그 가격의 원천이 되는 노동시간이 팔린 것이게 된다. 따라서 당연히 생산수단에 들어가는 비용을 제하고 남은 모든 화폐이익을 노동자가 가져야 한다. 만약 100원의 비용을 들여 120원에 팔았다면 분명 거기에는 20원에 해당하는 노동시간이 존재한다는 뜻이므로 20원을 노동자에게 보상해야한다. 그러나 자본가는 이윤을 축적하는 존재기 때문에 생산물의 모든 순이익 혹은 이윤 총액을 다 가져간다. 따라서 노동자가 재생산에 맞는 임금만 받고 자본가가 가져간 이윤을 돌려받지 못한다면 당연히 노동자는 무임금노동을 한셈이다. 이 무임금노동'만'을 바로 잉여노동이라고 하고 이 그 잉여노동에 해당하는 금액, 즉 '''자본가가가 벌어들인 판매 순이익 혹은 이윤을 잉여가치surplus value라고 한다. 단순히 임금만 놓고 봤을 경우 임금 그 자체는 재생산 비용과 일치하므로 노동자들이 자신의 삶을 살기 위해서 필요한 만큼 받게 된다고 볼 수 있으므로 이 이금에 해당하는 노동시간을 필요노동시간이라고 한다.''' 이 잉여가치가 즉 무임금노동이 임금노동과 관련해서 어떤 관계를 가지며 그 정도가 얼마나 큰지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잉여가치를 좀더 명확하게 알기 위해 이윤율과 비교해자. 자본가는 자본을 투입해서 이윤을 얻는다. 따라서 자본가는 자기들이 투입한 자본을 통해 이윤 즉 잉여가치를 늘릴려고 한다. 그런데 자본에는 2자기 요소가 있다. 바로 가변자본과 불변자본이다. '''가변자본variable capital은 바로 노동'''을 말하고 '''불변자본constant capital은 생산수단(원료나 도구 혹은 기계)'''를 일컫는다. 원료와 기계를 불변자본이라고 하는 까닭은 원료나 기계로서는 이윤 즉 잉여가치를 늘릴 수 없기 때문이다. 자본가a가 원료와 기계를 자본가b로 부터 사올때 자본가 b는 자본가a에게 이미 잉여노동을 붙이고 판매하기 때문에 그 가치가 변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자본가b가 기계 없이 순수하게 원료를 생산하여 판매하려 하고 이때 임금을 70으로 주고 차익으로 30을 번다고 치자. 그럼 자본가b는 a에게 총 100에 판매할 것이다. 그러나 자본가a가 생산과정에서 불변자본을 어떤식으로 쓰건 결국 100의 지출을 하는데 지출하고 나면 이제 가격에 +100이 될뿐 101이나 102가 되도록 할 수 없다. 과거에 이미 다 노동이 투여되고 나온 산물이기 때문에 더이상 자본가a가 어찌할 수 없는 '죽은 노동'인 셈이다. 반면 가변자본은 자본가가 노동시간을 연장하거나 감소시킴으로서 그 가치가 변동하므로 가변자본이라고 한다. 생산과정에서 노동시간을 더 투입하면 노동가치론에 따라 가격이 올라가고 따라서 이윤이 늘어나며 결국 잉여가치가 늘어난다. 불변자본과 달리 과거에 투입되버리고 난 노동이 아니라 실제 생산에서 잉여가치를 좌우하는 '산(살아 있는) 노동' 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둘을 자본의 가변부분 그리고 자본의 불변부분이라고 달리 부를 수 있다. 이윤율은 어떻게 계산하는가? 자본가는 자신이 지출한 총 자본과 자신이 벌어들인 이윤의 정도를 계산 할 것이다. 계산 식으로 보자면 이윤율잉여가치/(가변자본 + 불변자본)<ref>s/(c+v)</ref>라고 할 수 있다. 반대로 잉여가치율은 어떻게 계산할까? 노동자 입장에서 중요한 것은 지급받은 임금과 지급받지 못한 임금간의 관계지 원료나 기계와 같은 불변자본이 아니다. 그래서 잉여가치의 정도 즉 잉여가치율s이란 잉여가치/가변자본<ref>s/v</ref>이다. 이윤율과의 차이점은 바로 불변자본이 빠졌다는 점이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자본가와 노동자는 본질적으로 바라보는 세상이 다르다는 것이다. 잉여가치, 가변자본, 불변자본이 모두 고정되어있을 때 자본가의 이윤율 계산과 노동자의 잉여가치율 계산은 절대 같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생산하는데 있어 불변자본은 반드시 0을 초과하기 때문이다. 즉 자본가 입장에서는 항상 잉여가치율보다 낮은 이윤율을 갖을 것이며 노동자는 항상 이윤율보다 높은 잉여가치율을 바라볼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자본가와 노동자는 본질적으로 사는 세계가 다르며 둘은 화해할 수 없다. 여기서 한발자국 더 나아가보면 이런 경제현상을 대표적으로 설명하던 정치경제학은 노동가치론에 기인하면서도 정작 자본가는 계약된 임금만을 주는 것을 두고 뭐라고 하지 않는다. 결국 정치경제학은 자연스럽게 자본가의 이익만을 옹호하는 학문이게 된다. ===== 잉여가치율 계산 ===== 노동가치론을 고려해 실제 잉여가치율을 한번 계산해보자. 먼저 용어를 깔끔하게 정리하면 불변자본은 원료와 생산수단을 말하고 가변자본은 생산에 투여된 노동을 말한다. 재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과 재화(상품)가격이 각각 10시간, 5만원, 불변자본이이 20시간, 10만원이며 가변자본이 10시간 일경우 금액으로 환산했을 경우 임금철칙설에 의해 재생산 노동시간에 비례하는 임금을 받아야 하므로 5만원이 된다. 만약 가변자본이 5시간일 경우 임금은 2.5만원이 된다. 10시간:5만원 = 5시간: x 이 비례식을 풀면 자연스럽게 답이 나온다. 그렇다면 이렇게 가변자본과 불변자본을 모두 투자하여 생산한 생산물의 가격은 얼마인가? 가변자본이 10시간일 경우 가격은 총 자본의 합과 동일한 15만원<ref> 총자본=가변자본+불변자본이므로 두 자본을 노동시간으로 환산하면 30시간이고 모든 가격은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에 비례하므로 상품가격은 15만원이 된다.</ref>. 반면 가변자본이 5시간일 경우 가격은 총 자본의 합과 동일한 12.5만원이 된다<ref>노동시간으로 환산하면 25시간이며 노동가치론에 의해 상품가격은 12.5만원이 된다.</ref>. 그렇다면 자본가의 이윤율은 얼마인가? 둘다 0이다. 왜냐하면 잉여가치가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불변자본 역시 노동시간에 비례해 가격이 산출되었고 그 가격만큼 지출되었으며 임금 역시 노동시간에 비례해 가격이 산출되었고 그 가격만큼 지출되었기 때문이다. 이럴경우 자본가가 이윤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위에서 말한대로 잉여노동을 시켜야 한다. 따라서 자본가는 노동시간을 연장하되 그 연장된 시간만큼의 보상을 하지 않고 자기가 가져감으로서 이윤을 축적한다. 예를 들어 노동자에게 20시간의 노동이 발생하였을 경우 잉여노동 시간은 10시간이다. 따라서 가격은 총자본의 합과 동일한 20만원<ref>노동시간으로 환산하면 40시간이며 노동가치론에 의해 상품가격은 20만원이 된다.</ref>이며, 자본가는 10만원의 이윤 즉 잉여가치를 획득하였기에 10시간은 필요노동시간으로서 노동자는 재생산비용에 걸맞는 임금을 받는반면 나머지 10시간은 임금을 지급받지 못하는 잉여노동이 된다. 이때 조심해야할 점은 가변자본은 필요노동시간 즉 재생산비용과 일치한다는 점이다. 5시간만 보상하고 15시간을 잉여노동으로 삼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렇지 않으면 생산이 지속될 수 없다. 계속 생산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재생산비용은 온전히 주되 잉여노동을 발생시키는 방법을 써야한다. 잉여노동을 통해 가격상승, 잉여가치를 발생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 잉여가치율은 잉여가치/가변자본이다. 잉여가치와 가변자본 모두 10시간이므로 100%다. 즉 다음날 필요한 재생산비용을 모조리 자본가가 가져간 것이다. 잉여가치를 돌려주었다면 노동자는 다음날을 온전히 놀고 먹을 수 있었을 것이다. 말이 길었지만 '''가변자본 = 사회적으로 필요한 '총' 노동시간 = 노동력 재생산에 필요한 '총' 노동력'''이고 '''잉여가치 = 판매 수익''' 이기 때문에 '''잉여가치율은 자연스럽게 순이익/임금'''이 된다. 특정 기업에서 노동자가 500만원을 벌고 기업 순익이 1000만원을 번다면 잉여가치율은 단순하게 200%로 계산하면 된다. 그렇다면 잉여가치율은 이윤율과 얼마나 차이가 날까? 현실에서 불변자본의 크기는 가변자본에 비해 무척 크다. 만약 불변자본이 62, 가변자본이 38 잉여가치가 38이라고 한다면 이윤율 = 잉여가치/총자본 = 38/(62+38) = 38%인 반면 잉여가치율은 잉여가치/가변자본 = 5/5 = 100%가 된다. 실로 어마어마하게 큰 차이가 난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대게 잉여가치율은 4~50%라고 한다. 이때 이윤은 오로지 잉여노동에 의해서만 발생하기 때문에 잘나가는 기업은 산업의 선봉장, 국민을 먹여 살리는 존재가 아니라 노동자의 고혈을 쥐어짜는 잔혹한 착취자가 된다. 만약 잉여가치가 100 가변자본이 50일 경우 아무리 이윤율이 1%라고 하더라도 잉여가치율은 무려 200%이기 때문에 기업이 아무리 침체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자본가가 탐욕을 주체하지 못하고 불변자본만 디립다 퍼붓는 바람에 생긴 현상일뿐 이며 여전히 잉여가치를 임금에 비해 어마어마하게 받아먹는 세상에서 가장 잔혹학 아귀중 하나일뿐인 셈이다. 또한 노동자가 100억을 번다고 하더라도 기업이 200억의 순익을 번다면 노동자가 재벌같은 삶을 사느냐와 상관없이 기업은 노동자를 잔뜩 부려먹고 돈 많이 준 척 생색내는 탐욕스러운 자본가일뿐이다. ===== 착취론 ===== 생산을 통해 판매하면 판매 차익 즉 이윤이 발생한다. 자본가가 생산하려는 까닭은 이윤을 벌기 위해서다. 만약 이윤이 0이라면 자본가는 생산하려 하지 않을테고 따라서 이윤을 노리지 못하므로 자본주의 체제라고 할 수 없다. 그런데 노동가치론에 의거하면 모든 이윤은 모조리 노동자에게 귀속되야 한다. 하지만 현실에는 노동자가 아니라 자본가가 이윤을 독차지한다. 결국 노동자는 자신에게 귀속되야할 금액을 부분만 받게 되는거다<ref> 임금을 받기 때문에 '부분'만 받는다.</ref>. 즉 노동자는 부분적으로 임금도 받지 못한 채 노동을 투입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다시 말해 자본가가 임금도 주지 않고 노동자를 부려먹은 것으로서 자본가는 노동자를 착취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때 마르크스주의의 착취는 일반적으로 착취라고 부르는 것과 약간 다르다. 우리는 흔히 착취를 즉 일을 (왕창)시켰는데 임금을 조금 주거나 안주는 경우를 가리키지만, 마르크스주의에서는 노동자에게 정당하게 지급하지 않는 모든 화폐금액을 말한다. 그런데 그 금액이란 바로 '모든' 판매차익을 말한다. 즉 판매했을때 발생하는 모든 화폐이윤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본주의 체제 자체는 영구적으로 착취체제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자본가가 선심을 써서 자기가 벌어들인 대부분의 판매차익을 노동자에게 돌려준다고 하더라도 착취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애초에 '모든' 판매차익은 노동자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런 선량한 모습을 보여줌으로서 착취당한다는 사실을 은폐하는 일종의 기만술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화폐차익을 전부 노동자에게 줄 경우 자본가는 사실상 수입이 0이다. 이런 상황에서 자본가가 생산할리가 만무하다. 설령 자본가가 판매차익을 '모두' 돌려준다고 할 경우 이는 사실상 자선과 다를 바가 없으며, 이는 화폐이윤을 목표로 하는 자본주의 체제라고 할 수 없는 체제다. 결국 자본가와 노동자는 본질적으로 화폐이윤을 가지고 더 많이 가지기 위해 싸우는 대립구도에 처해 있을 수 밖에 없다. 이는 어떤 의도와 마음씨를 가지건 상관없다. 자기가 어떤 계급에 속할 경우 상대 계급과 더 많은 이윤을 위해서 '''계급 투쟁'''을 벌일 수 밖에 없다. 이는 자본주의 체제의 숙명과도 같다. 이때 투쟁은 계급과 계급의 투쟁이지 특정 기업의 노동자들이 특정 기업을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착취란 개별적인 자본가가 단순히 악랄해서 생기는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착취는 자본주의 체제가 만들어낸 구조적 산물이기 때문에 개별 자본가를 무너뜨리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자본주의 체제의 근본적인 착취를 근절할 수 없다. 자본주의 체제는 자본가의 어떤 야망이나, 성심과는 무관하게 돌아가는 체제다. 착취라는 것 또한 자본가가 아무리 선량해도 (비도의도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현상인 것이다. 따라서 특정 자본가에만 비난의 화살을 집중시키는 것은 자본주의 체제의 구조적 모순을 보지 못하고 한 인간만을 공격하는 아둔한 행태라 할 수 있다. 더 나아가서 특정 자본가의 선량함만을 근거로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것 역시 기득권에 부역하는 행위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체제가 여전히 강력하게 작동하는 상태에서 특정 자본가의 선량함만을 근거로 자본주의를 옹호하거나 단순히 개선하자고 말하는 것 역시 사회구조 전체를 보지 못하는 행태기 때문이다. ===== 혁명론 ===== 자본가는 아무리 선량해도 착취자라면 그리고 노동자가 자기 삶을 발전시키고 싶다면 먼저 착취구조를 끊어야 한다. 즉 자본주의 체제를 전복해야 한다. 혁명만이 유일한 방법인 까닭은 소위 노조투쟁은 본질적으로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노조활동을 하더라도 자본가의 착취를 근절할 수 없으며 자본가는 국가권력을 이용해 노조를 탄압하려하기 때문이다. 이런 국가를 통제하는 의회민주주의제도 역시 브르주아들의 이익을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기에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의 혁명은 자본-국가 체제를 동시에 절멸시켜야 한다. 이런 논리로 인해 브루주의 독재체제라 불리는 의회민주주의에 기대는 사민주의 역시 마르크스주의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렇다면 노동자가 자본가에 투쟁할 수 있는 각종 수단이 제약된 상태에서 소규모적, 난잡한 투쟁은 노동자 운동의 힘을 소모시킬 뿐이며 이래서는 탐욕스러운 자본가 체제를 엎을 수 가 없다. 즉 자본주의 체제를 전복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렇다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가? 바로 자본가들이 몰락할때 까지다. 마르크스주의에 따르면 자본주의 체제는 본질적으로 자본가들이 몰락할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바로 이윤율 저하 경향 법칙 때문이다. ===== 이윤율 저하 경향 법칙 ===== 마르크스주의에서 가장 대망의 역사를 뽑자면 바로 역사발전론이다. 그 중에서도 자본주의 체제에서 공산주의 체제로의 이행이 대미를 장식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 넘어가는 과도기를 분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 과도기는 어떻게 나타나는가? 다시말해서 공산주의로 이행할려면 자본주의 체제는 이전의 역사단계처럼 스스로 자기 모순을 겪어야만하는데 자본주의에는 어떤 자기 모순이 존재하는가? 자본주의는 자본가가 이윤을 추구하고 축적하는 체제다. 그런데 이런 자본주의 체제에서 자본가의 이윤획득이 지속되면 지속될수록 사회적으로 이윤을 추가적으로 획득하기 어렵게 된다. 즉 개별적인 자본가들의 이윤추구가 결국 사회 전체의 이윤 추구를 저지하는 셈이다. 왜 그러한가? 바로 이윤율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이윤율은 잉여가치/총자본(=가변자본+불변자본)이며 공식으로 쓰면 r=s/(c+v)다 이때 자본가는 더 많은 이윤을 벌기 위해 더 많은 불변자본에 투자한다. 가변자본을 늘려서는, 즉 착취만 해가지고는 대규모 이윤이 쌓이지 않기 때문이다. 가변자본만을 늘려서는 이윤율이 크게 늘어나지 않는다<ref>다만 잉여가치율은 빠르게 증대된다.</ref>. 그렇다면 왜 불변자본의 증대가 이윤율 증대에 더 획기적인 방법이 되는지 공식을 통해 알아보자. 이윤율은 s/(c+v)다 이때 분모 분자를 가변자본v로 나눠보자 그러면 이윤율은 (s/v)/(c/v+1)이 된다. 이때 c/v는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라고 한다. 쉽게 말해 생산이 노동집약적이냐 자본집약적이냐는 뜻이다. c가 클수록 혹은 v가 작을 수록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심화되었다고 말하며 이 경우 그 생산은 자본집약적으로 이루어진다. 결국 이윤율 공식은 잉여가치율/(1+자본의 유기적 구성)으로 풀어 쓸 수 있다. 생산에서 불변자본이 가변자본보다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자본이 구성이 유기적일수록 결국 이윤율은 낮아지는 경향이 나타날 것이다. 공식에서 도출된 이윤율 저하를 사회현상 관점에서 바라보면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심화되었을 때의 장점은 바로 대량 생산 즉 생산성의 압도적 증대에 있다. 이런 생산성 증대는 이윤의 대규모 획득을 가능케하기 때문에 자본가는 기를 쓰고 불변자본을 늘리려 한다. 그러나 불변자본의 증대는 많은 비용을 수반하며, 대부분의 노동자가 착취당하는 사회에서는 높은 이윤율을 이전만큼 확보할 수 없다. 그래서 이윤율이 낮아지지만, 자본가는 이 낮아진 이윤율을 만회하기 위해서 더 많은 불변자본을 늘리려 한다. 결국 악순환에 빠지게 됨으로서 이윤율은 0에 수렴하고 결국 자본주의체제는 요동치기 시작한다. 이때가 바로 혁명의 시작점이다. 이때를 위해 자본가와의 계급투쟁 속에서 '만국의 노동자가 단결할 것'을 그리고 각성하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이런 계몽된 노동자 조직의 단결력은 혁명의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공산주의 사회는 곧바로 찾아오는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자본가 역시 바보는 아니라서 이윤율 저하 경향을 저지하려 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이윤율 저하 경향을 상쇄하는 요인으로서 6가지를 드는데, 그중 가장 대표적인 요인이 바로 잉여가치 증대, 즉 무보수노동인 잉여노동시간의 증대 혹은 휴일 단축이다. 이런 요인으로 인해 자본가는 이윤을 늘리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쉽사리 망하지 않는다. 그래서 혁명의 길은 어려운 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좌절할 이유는 없다. 왜냐하면 자본가가 늘리는 이윤은 이윤율이 아니라 이윤액이기 때문이다. 즉 아무리 이윤을 늘려도 새로 투자하기 이전의 이윤율로 돌아갈 수 없다. 새로 투자함으로서 낮아진 이윤율을 그나마 끌어올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윤율 저하 경향은 근본적으로 막을 수 없기에 종국적으로는 이윤율이 0에 수렴하게 되어 자본주의 체제는 흔들릴 수 밖에 없다. 물론 이과정에서 자본가 계급은 이윤율을 늘리지 못할망정 이윤액이라도 늘리려는 시도 때문에 노동자계급은 노동시간 연장, 임금감소, 휴일 단축, 해고 같은 착취에 더 고통받고 신음할 수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 체제가 망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기 때문에 노동자 계급은 자본주의를 무너뜨리는데 더 적극적으로 싸울 수 있는 것이다. ==== 역사발전론 ==== *불평등한 봉건주의 무너뜨리고 귀족없는 평-등한 자본주의 사회 건설! *불평등한 자본주의 무너뜨리고 과도기단계인 사회주의 건설!!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를 무너트리고 모두가 평-등한 공산주의 사회 건설!!! 정확히는 발전 양상이다. 인류는 당연하게 원시사회-봉건사회-자본주의-사회주의-공산주의 로 이어지는 역사를 겪는다는 소리임. 또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차이점은,사회주의는 노동자 계급이 생산 시설을 국유화하고 독재하는 시대를 일컫고, 공산주의는 무정부 + 생산 시설의 완전 국유화 시대를 일컫는다. 즉 봉건주의-자본주의-사회주의-공산주의 이렇게 로드맵을 제시한것이다. 그러나 레닌새끼는 쌩까고 봉건주의에서 바로 사회주의를 하는바람에 사회주의마져 제대로 실현하지못하고 좆망하였다... 자본주의가 막장을 달리던 시절 (극심한 빈부격차 노동권 무시 심지어는 아동노동 등) 자본주의의 위협이자 마이신으로 작용해 오늘날의 수정자본주의를 이끌어냈다. ====사적 유물론==== 위에 역사 발전론에서 말했듯 마르크스는 역사가 원시사회-봉건사회-자본주의-사회주의-공산주의 순서대로 변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들이 변하는 핵심적인 조건과 원리 바로 <상부구조> 와 <하부구조> 를 통해 설명할 수 있다 주장했다. 우선 상부구조와 하부구조에 대해서 이야기 하면 사회는 상부 하부로 구성되었다고 이야기 하는건데 1) 상부구조: 정치, 행정, 문화, 입법, 사법 등등의 정신적 요소 이고 2) 하부구조: 경제, 기술 등을 말한다. 그러니까 상, 하 라는 말을 들으면 알 수 있듯이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지탱하는 거라 볼 수 있다. 물론 사회를 경제 원툴로 설명하려는 털보새끼답게 상부구조는 그냥 장식이고 하부구조가 가장 중요한데 이 하부구조가 흔들리거나 변화하면 상부구조는 무너지고 기존 체제라고 볼 수 있는 (왕정, 민주정 과 같은) 사회체계가 무너지고 시대가 전환된다는 거라 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중요한 경제, 기술을 담당하는 하부구조를 마르크스는 <생산력> 과 <생산 관계> 로 나눠서 설명하는데 일단 생산력은 한마디로 정리하면 "기술, 자원" 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고 생산관계는 이런 기술의 소유자가 노동자와 맺는 관계 구도라 볼 수 있다. 예로 중세 때는 영주와 농노였고, 산업사회에서는 사장과 노동자로 볼 수 있다. 이런 노예와 주인의 구도의 패러다임이 변하는 때가 오는데 바로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불일치가 일어 날 때다. 이 개소리가 존나 중요한 이유는 기술(생산력)은 지속적으로(기하급수적으로) 발전하는데 생산관계는 천천히 발전하기 때문인데, 이들 간의 마찰을 누적이 점차 새로운 생산관계를 요구하게 되고 여기서 이 전체적인 구도를 통제하는 위에 정치, 입법, 문화 등이 자연스럽게 변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예로 프랑스 혁명을 들면 간단한데 기존의 상공업자들이 사회의 생산을 차지하는 기술과 수단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 노동자(생산관계) 는 기존의 상부구조(귀족) 의 신분제로 자리잡혀 있으므로 -> 이에 의해 기술을 둘러싼 생산관계가 지체 되었고 -> 이 마찰에 힘입어 투표권을 요구하는 혁명이 발생했고 정치 체제같은 상부구조도 변한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털보는 이런 방식으로 자본주의가 고도화 되며 자본가와 노동자라는 생산관계의 콘텐츠가 소진되고 이 법칙에 의해 사회주의가 필연적이게 올거라고 말 한 것이다. 문제는 그 시절처럼 공장주-노동자 라는 관계 하나로 자본주의 구도가 설명 할 수 없을 정도로 다원화된 업종이 있고, 그 나름의 자정능력 및 축척체제를 가지고 있다는 거지만 옛날 놈이어서 그런지 병신이라 그런 건지는 알아서 판단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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