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무위키
조무위키
둘러보기
대문
최근 바뀜
임의의 문서로
미디어위키 도움말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
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
특수 문서 목록
문서 정보
행위
문서
토론
편집
역사 보기
명호작전
편집하기 (부분)
경고:
로그인하지 않았습니다. 편집을 하면 IP 주소가 공개되게 됩니다.
로그인
하거나
계정을 생성하면
편집자가 사용자 이름으로 기록되고, 다른 장점도 있습니다.
스팸 방지 검사입니다. 이것을 입력하지
마세요
!
==개요== 1940년과 1941년, 일본은 비시 정권과의 협정에 근거하여 프랑스령에 군대를 전개시켰다(일본 제국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침공). 이후 태평양 전쟁 중에도 프랑스의 인도 차이나 식민지 정부가 통치는 계속했고 군사 면에서는 일본의 인도 차이나 주둔군과 프랑스군이 공동 방어의 형식을 취하고 있었다. 주둔 프랑스군은 대형 함정의 무장 해제됐지만 기본적으로는 그대로의 기존 전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유럽 방면에서 추축군의 전황이 악화되면서 일본에서는 외무성에서 부처별로 프랑스령 정부 해체의 의견도 나왔다. 19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 작전 이후 연합군의 대륙 반격이 시작되면서 8월 25일 비시 정권은 붕괴, 일본의 패색이 짙어졌다.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총독이었던 장 드쿠 해군 수석 중장(Vice-amiral d' escadre)은 2월 18일 시점에서 본국과 연락이 두절된 경우는 필리프 페탱 원수로부터 전권을 부여한다고 했다. 주둔 프랑스군이 점차 드골이 이끄는 프랑스 공화국 임시 정부 성향의 행동을 하면서 일본 육군은 곧 상륙이 예상되는 연합군 부대와의 협공을 경계했다. 1944년 12월에 인도 지나 주둔군에서 개편한 제38군 사령부는 주둔 프랑스군을 무장 해제하는 작전 계획을 검토하며 이를 최종적으로 "명호 작전"으로 명명. 이 동안 제38군 사령관 쯔찌하시 유우이츠 중장은 1944년 말에 가진 회담에서 프랑스의 인도 차이나 식민지 수뇌측의 반응을 보고난후, 공동 방위는 곤란하다는 판단이었다. 마지막 통첩이라고 할 요구 사항은 1945년 2월 1일 최고 전쟁지도회의에서 결정됐다. 2월 28일, 대본영은 남방군에 대해서, 3월 5일~10일 사이에 명호작전을 발동하도록 명령했다.
요약:
조무위키에서의 모든 기여는 CC BY-SA 4.0 라이선스로 배포된다는 점을 유의해 주세요(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조무위키:저작권
문서를 읽어주세요). 만약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문서를 저장하지 말아 주세요.
또한, 직접 작성했거나 퍼블릭 도메인과 같은 자유 문서에서 가져왔다는 것을 보증해야 합니다.
저작권이 있는 내용을 허가 없이 저장하지 마세요!
취소
편집 도움말
(새 창에서 열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