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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화민국 === {{눈물}} '''요약하자면 안습이였다''' 중국의 경우에는 우선순위에서 밀린 탓에 영국과 소련에 비해서 규모가 매우 적었고 국부군이 처한 열악한 상황과 연합군 수뇌부의 비협조로 제대로 전달되지도 못했다. [[중일전쟁]]초에는 [[나치 독일]]이 [[일본 제국]]과 동맹을 맺기 전이라 독일은 중화민국에 대량으로 무기를 수출했고 많은 고문관들까지 파견했을 정도로 지원을 해줬다. 하지만 독일이 일본과 동맹을 맺으면서 고문관들이 철수했고 많은 병력과 장비를 상실한 국민당군은 [[천조국]]에게 큰 기대를 했다. 당시 중국의 사정은 [[국민혁명군|국민당군]]과 [[팔로군|공산당군]], 그리고 각종 [[군벌]]들로 세력이 나뉘어진 복잡한 구조 땜에 실제로 도움이 되기 힘들었다. 당시 일본군과는 공업적, 군사적으로 격차가 많이 차이나서 자력으론 발릴 상황이었고 그나마 정예였던 국민당군은 미국이 태평양 전쟁에 참여하기 이전의 4년간 거의 홀로 싸우는 과정에서 기력을 많이 상실한 상태였다. 군벌들의 군대는, 군사력의 질은 제각각이었지만 서로간에 단합심과 신뢰성이 부족하여 신용할 수 없었기에 지원을 하기에는 어려웠다. 공산당도 마찬가지였다. 2차 국공합작은 말이 합작이지 현실은 신뢰따윈 배제한 합작이였다. 그냥 [[장학량|씹쉐량]]이 [[만주|지 나와바리]]찾을려고 [[서안 사건]]일으키고 어그로 존나 끌어서 이뤄진 합작이 2차 국공합작이었으니 그딴걸 기대하는게 사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격적으로 물자보급이 시작된 1942년 5월부터 1945년 2월까지 공중수송으로 물자가 왔다. 왜냐하면 좆본 섬숭이들이 인도차이나와 미얀마를 장악해서 중국으로 가능 통로는 하늘밖에 남지 않았던것 그러나 대부분이 중국 주둔 미공군용이었고 중국군에게 돌아간 물자 중에도 장개석이 그토록 원했던 지원물자는 적었다. 그리고 중국측과 연합군측의 사이도 안좋았는데 당시 고문관이였던 스틸웰 대령이 인종차별적 시각이 있었던 것을 감안하면 모든 책임을 중국에 떠넘기며 물자를 나눠쓰는 것도 거부할 정도로 안좋았다. 그리고 맥아더가 사이판을 점령함으로서 일본 본토를 공습할 수 있는 전진 기지를 확보되었기에 미국에게 중국이 적극적으로 지원할 필요성도 없어진 것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라잉 타이거즈'같은 미국 조종사들로 이뤄진 용병단이 중국편에 들어서 싸우기도 해서 무난하게 이끌었다. 전쟁 말 쯤에는 물자량이 3할 이상 증가하며 국민당군의 장비 부족도 어느 정도 해소되고 일본군이 되려 밀리기 시작했다. 결국 랜드리스에 따라 국민당으로 들어간 물자는 상당량이 [[국공내전]]에서 사용되었고 국민당이 공산당한테 줫발린후 대부분 물자는 중국 [[인민해방군]](이라고 쓰고 인민훼방꾼이라고 읽는다)에 돌아갔고 심지어 이들 물자중 일부는 얼마뒤에 일어난 [[한국전쟁]]에도 사용되어 [[천조국]]의 은혜를 원수로 갚기도 했다. 어쨌든 하도 막장이라서 그런지 천조국이 빚 받기를 포기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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