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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나드 로 몽고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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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럽 전선 === 노르망디에 상륙한 연합군. 연합군은 교두보에서 벗어나 빌레르 보카주로 진격했다. 몽고메리는 사막에서 실전경험을 쌓은 제7 기갑사단을 동원해서 빌레르 보카주를 뚫고 제51 하일렌드사단과 합류시켜서 캉을 포위하려고 했다. 6월 10일 제7 기갑사단이 빌레르보카주에 도착은 했지만 이 마을은 독일군의 기갑교도사단이 지키고 있었다. 영국군은 마을에 들어가는 데에만 사흘을 썼다. 게다가 미하엘 비트만의 공격을 받고 시간이 또 지체됐다. 이날 오후 기갑교도사단은 반격했고 제7 기갑사단은 틸리까지 후퇴했다. 독일군이 굉장히 잘 싸웠기 때문에 밀고 당기는 싸움이 계속됐다. ==== 굿우드 작전 ==== 7월 초 무렵 연합군의 점령지는 노르망디 해안가에서 24km정도 뿐이었다. 이러다간 참호전이 될 것 같았지만 몽고메리는 그 전에 지역을 돌파해버릴 생각이었다. 7월 18일 몽고메리는 휘하 부대에게 노르망디 돌파 지시를 내렸다. 이 작전이 굿우드 작전.<ref>미군의 돌파작전은 코브라 작전이다</ref> 영국군이 생 로를 점령해야 미군이 나갈 수 있는데 점령이 늦어져서 7월 19일 아침에야 생 로를 점령했고 코브라 작전은 24일로 미뤄졌다. 7월 19일 기갑부대는 생 로를 점령하고 진격하다 부르게뷔스 능선에서 반격을 당해 멈춰섰다. 작전이 실패한 것 같지만 몽고메리는 독일군 주력부대를 영국군 쪽으로 유인해서 미군의 돌파작전을 지원하겠다는 목표를 달성했다. 어그로를 잘 끈 덕에 가드인 영국군은 독일군 13개 사단을 주공인 미군은 9개 사단을 상대하게 됐다. 이때쯤 몽고메리가 원수로 승진한다. ==== 마켓가든 작전 ==== 자신이 지휘하는 제21 집단군이 주인공이 되길 원한 몽고메리는 평소 그답지 않은 과감한 작전 수립도 마다하지 않았다. 몽고메리는 영국군과 미군 공수부대 3만명을 주요 하천 교량에 공수시키고 그 사이에 호럭스의 제30군단이 마지막 공수부대가 있는 지점까지 약 100km를 진격한다는 내용의 마켓가든 작전을 수립했다.<ref>마켓은 공수부대 가든은 지상군</ref> 몽고메리는 이 작전으로 독일군의 전투 의지를 꺾고 지크프리트선 앞에 교두보를 마련하자고 주장했다. 실제로 교두보 구축은 가능했고 작전지 맨 끝에 투입될 부대도 영국군이 맡겠다며 작전을 강하게 밀었다. 아이젠하워는 일리가 있는 말이라며 작전을 승인했다. 아이젠하워의 승인이 난 작전은 1944년 9월 17일로 정해졌다. 9월 17일 연합군 수송기들이 기지를 출발해 날아올랐다. 미군의 제82 공수사단과 제101 공수사단은 그나마 원활하게 임무를 완수했지만 영국군의 제 1공수사단은 만만치 않았다. 작전의 끝자락에 있는 목표지점 아른헴을 지키는 수비대는 예상 외로 탄탄했다. 여기에 발터 모델 원수가 공수부대의 침투를 눈치깠기 때문에 제9 친위대 호엔슈타우펜 사단이 아른헴으로 제10 친위대 프룬츠베르크가 네이메겐으로 투입됐다. 영국군의 제30 군단 전차들은 당연히 도로로 이동했는데 도로가 1차선이라 지뢰 하나로도 길을 봉쇄할 수가 있었다. 결국 독일군 대전차포와 온갖 이상한 공격을 얻어맞은 30군단은 19일이 되어서야 네이메겐을 지났고 목적지인 아른헴에서 16 km 떨어진 지점까지 접근했다. 제1 공수사단은 사흘간 아른헴에서 포위된 채 싸웠고 9월 21일 아른헴 다리를 뺏겼다. 아른헴에서 제1 공수가 싸우는 동안 공수로 물자를 보급하려는 시도는 있었으나 날씨까지 작전을 도와주지 않았다. 30군단은 이번에도 온갖 독일군을 맞아 싸우며 9월 23일에야 라인 강 남쪽에 도착했다. 하지만 강을 건너진 못 했다. 몽고메리는 작전이 실패했기 때문에 부대를 빼야 한다고 판단했다. 9월 25일 밤사이에 제1 공수사단 병력이 탈출하며 작전은 끝났다. ==== 안트베르펜 ==== 이때쯤 연합군의 보급선은 너무 늘어져 있었다. 언제까지고 노르망디에서 보급품을 수송할 순 없었기에 안트베르펜 항을 점령해서 보급로를 터야 했다. 안트베르펜은 연합군이 장악하고 있었지만 진입로를 독일군이 점령하고 있어서 항구를 쓸 수 없었다. 마켓가든 작전이 진행되는 동안 캐나다 제1군에게 알아서 진입로를 치우라고 시킨 몽고메리에게 안트베르펜은 시선에서 AUT인 상황이었다. 아이젠하워는 몽고메리에게 최대한 빨리 안트베르펜을 점령하라고 시켰고 여길 점령하지 못하면 작전이 중단된다고 얘기했다. 최고사령관이 이렇게까지 얘기하는데도 몽고메리의 싸이코 또라이 기질은 줄어들 줄을 몰랐다. 영국군에게 안 중요한 임무를 주고 미군이 공을 다 가로채게 하려 한다고 생각한 몽고메리는 아이젠하워의 명령을 무시했다. 아이젠하워는 몽고메리에게 말을 듣지 않는다면 처칠에게 꼰지르겠다고 협박했고 몽고메리는 동맹관계 유지를 위해 꼬리를 내렸다. 몽고메리가 주공을 돌리기 전부터 캐나다군이 이 지역을 공격하고 있었다. 독일군도 멍청이가 아니기 때문에 이 지역이 아주 중요한 지역임을 깨달았고 방어를 증강시킨 상태였다. 특히 발헤렌 섬은 섬 하나를 통째로 요새로 만든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영국군은 발헤렌 섬을 점령하려면 강둑을 터트려 물로 공격해야 한다고 결론내렸고 폭격기를 이용해서 강둑을 터트렸다. 11월 1일 영국군은 물이 찬 섬에 진입할 수 있었고 11월 4일까지 교전한 끝에 섬을 점령했다. ==== 베를린 전투 ==== 몽고메리는 베를린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다. 베를린 근처에도 안 갔다. 소련이 베를린을 딸 것이 확실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단 몽고메리는 북독일 평원을 건너 베를린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4월 18일까지 제1군과 제30 군단이 각각 조이데르와 브레멘을 점령했고 제8 군단은 뤼네부르크를 점령하고 엘베 강에 다다랐다. 제21 집단군 본대는 네덜란드와 발트 해 쪽으로 방향을 틀어 4월 18일 제12 군단과 함께 함부르크를 땄다. 4월 마지막 주 동안 소련군이 베를린을 청소했다. 히틀러의 자살이 알려졌고 휴전이 가까워 왔다. 5월 4일 뤼네부르크하이데 평야에 있던 제21 집단군 사령부에서 네덜란드, 덴마크, 독일 북부에 주둔한 독일군 부대가 제2차 세계대전 최초의 전체 항복문서에 조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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