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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마민주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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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인 == === 경제 불황으로 인한 민심 악화 === 여기에서 짚고 넘어갈 점은, 70년대에는 영남 지역이 각종 개발과 공업화로 경제적인 꿀을 빨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는데 석유 비축은 생각도 않고 중화학에 마구 돈 퍼부은 경제정책 때문에 경공업이고 중공업이고 중소기업들 대부분이 대출에 허덕이다가 줄줄이 도산했다는 것이다. 당시 중화학 공업의 기수는 울산, 포항, 여수였고 부마항쟁의 중심인 부산과 마산은 경공업 중심이었다. 돈이 아예 돌지 않았던 그 지역은 대공황에 준할 만큼 혼파망이었다는 것이다. 결국 1978년 2차 오일 쇼크로 공업을 위해서 석유가 반드시 필요했던 부산 지역의 경제가 완전히 무너졌고 부산 시민들은 유신 정권에 불만이 쌓여갔다. === 김영삼 제명 사건 === [[파일:YS 제명.jpg]] 1979년 10월 초, 미국 뉴욕타임즈와의 인터뷰를 통해서 YS가 이딴 병신 같은 독재 국가에 원조를 그만 하라고 얘기한 걸 가리켜 국회의원이 국가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제명해버리자 신민당은 거센 저항을 했다. 또한 YH무역 여공 파업 당시 신민당 당사를 빌려 썼는데 이 파업을 진압하기 위해 신민당 당사를 개작살낸 것까지 화근이 되어 신민당 국회의원들이 '그래 어디 니 새끼들끼리 열심히 해먹어라' 하면서 국회의원 배지를 줄줄이 내려놓는 형국이 되었다. 이게 박정희한테는 더 좋은 일 아니겠느냐고 볼지도 모르지만, 실제로 대놓고 일당 독재 하면 누가 봐도 북괴 새끼들과 판박이인 느낌이 나고, 당시 박정희는 '우리는 북괴와는 다르다'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했으며 안 그래도 코리아게이트 사건으로 미국과 사이가 더럽게 나빠졌는데 대놓고 독재하면 밥줄 아예 끊겨버리겠다 싶어서 박정희 패거리에게도 상당한 위기로 다가왔다. === 학생들의 유신 반대 === 시위의 중심이 된 곳은 부산대이다. 당시 부산대 학생들은 유신의 눈치를 살피며 시위를 하지 않는다며 다른 학교로부터 유신대학교라며 까이고 있었다. 또한 경남 기반의 김영삼이 제명 당하자 학생들도 딥빡이 밀려왔다. 결국 날 잡고 부산대 운동장에서부터 시위를 일으켰으며 안 그래도 살림살이 좆망해서 낙동강 온도 재러 가던 경남의 민심이 폭발하고 죽을 각오로 시위에 뛰어들었다. 첫날 10월 16일 시위는 학생 위주의 시위였으나 다음날부터 경기 불황으로 불만 쌓인 시민들의 참여가 더욱 두드러졌다. 이 사건으로부터 불과 4년 전인 1975년 4월에 있었던 제2차 인혁당 사건을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각하 심기 잘못 건드리는 순간 빨갱이 되고 모가지 날아가는 건 식은 죽 먹기였던 시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 아니면 도의 상황을 맞은 경남 주민들은 대대적으로 길거리에 뛰쳐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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