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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제]] == 삼국시대에는 수렵이나 어로, 열매채취 등의 방식이 여전히 존속하고 있었으며 일부 종족 사이에는 목축도 비중이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보아 농업의 비중이 거의 절대적인 농업 사회였다. 따라서 농토의 소유와 경영은 사회경제적으로 중대한 의미를 가졌다. 삼국시대 초에는 인구에 비해 대지가 상대적으로 많아 주민들의 집단적 이주도 가능한 정도였다. 따라서 토지를 둘러싼 주민 간의 갈등은 크지 않았다. 토지에 대한 일반적이고 국가적인 분급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공동체적 성격이 존속하던 읍락사회였기 때문에 토지를 점유하고 경작한 자의 해당 토지에 대한 권리가 관습적으로 인정되었으리라고 추정된다. 그러나 시간이 경과하면서 토지에 대한 소유관념이 강화되고 사회경제적 분화가 심화됨에 따라 토지의 소유를 둘러싼 갈등도 발생하게 되었다. 최초의 기록으로 ≪삼국사기≫ 고국천왕 12년(190) 9월조에는 왕후의 친척들이 타인의 자녀와 특히 전택(田宅)을 빼앗아 왕의 처벌을 받은 사실이 전한다. 이같은 사실과 이후의 자료들로 보아 삼국에서는 전공에 의한 사전(賜田) 혹은 매득이나 강제겸병 등을 통해 귀족들의 대토지 소유가 진행되고, 일반민 중에는 경영상의 실패나 천재 등으로 토지를 상실한 무전농민도 등장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신라 촌락문서 등을 통해 보면 삼국시대의 많은 농민들은 자영소농으로서 존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토지제도와 관련하여, 삼국에는 귀족들의 식읍(食邑)이 존재하였다. 고구려의 경우 큰 전공을 세운 경우 토지를 지급한 다수의 사례가 확인되며 신라에 귀순한 금관가야 왕의 경우 본래의 지배지인 김해지역을 식읍으로 받았다. 식읍은 소유권보다는 일정한 행정구역에 대한 조세 수취권을 준 것이다. 따라서 식읍민에 대한 지배 정도는 국가권력의 의지나 행정력의 수준 등에 달려 있었을 것인데, 현물 수취와 더불어 부역에 대한 수취도 행해졌을 가능성이 높다. 통일신라 초기에 녹읍을 혁파한 사실이 나타나므로 삼국시대에도 녹읍(祿邑)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 녹읍은 식읍과 유사한 성격을 가졌을 것으로 보이나, 식읍이 일시적이며 매우 큰 공로에 대한 대가로 지급된 데 비하여 녹읍은 문자대로 보면 관직 복무에 대한 대가로 일정 행정구역의 수취권이 지급된 것으로 보인다. 녹읍은 국가성립기로부터 귀족들에게 종래 연고가 있던 지배지에 대한 경제 및 경제외적 지배를 인정해 주었던 데서 비롯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 제도는 삼국시대 후반이나 말기에 국가지배체제 및 관직 체계의 정비 과정에서 관료 보수의 체계화와 관련되어 비롯되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수조권 역시 해당 지역의 조세 전량에 대한 수취권인지 일정률에 한한 수취권인지 현재로서는 확인할 길이 없다. 조세제도는 국가의 지속적인 유지 발전을 위하여 주민들로부터 항상적 강제적으로 현물 및 노동력을 무상 수취하기 위해 마련되었다. 이에 따라 주부(主簿)나 사자(使者), 품주(稟主) 등 조세와 관련된 관직들이 일찍부터 나타나고 물장고(物藏庫) 등 창고가 운영되었으며, 특히 지방관을 통하여 수취체계가 운영되었다. 삼국 각국 주민들의 조세 부담액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수서 隋書≫ 고려전 등을 통해 볼 때 고구려의 경우 그 후기에는 일반민들은 아마도 정남인 호주를 기준으로 곡 5석과 포 5필을 내었고, 부가적으로 3등의 호등제에 따라 5두, 7두, 1석의 곡을 더 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백제나 신라의 경우도 유사했다고 하는데, 특히 백제에서는 풍흉의 정도에 따른 차등 수취가 있었다. 이같은 사실을 통해 삼국시대 초기나 중기에는 보다 소량의 수취가 있었으며 특히 균일액의 호별 수취 부과와 더불어 그 이전에 인두별 부세 수취가 있었으리라고 추정해 볼 수 있다. 농업은 국가나 지역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산지가 많은 고구려 지역은 논농사보다는 밭농사의 비중이 월등히 높았다. 백제나 신라의 경우에도 밭농사의 비중이 컸으나 점차 논농사가 보급되어, 삼국시대 말에는 논농사의 비중도 무시할 수 없는 정도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콩·보리·밀 등 다양한 곡식과 채소가 재배되었으며 벼도 점차 보급되어 재배되었다. 농사에는 철제의 호미, 따비, 괭이, 낫 등이 이용되었으며 삼국시대 후반에는 소를 이용하여 철제 쟁기로 논밭갈이를 함으로써 더욱 많은 땅을 경작하고 기왕의 경작토지의 이용도도 크게 높였다. 1993년에 발굴된 서울 근교 한강가의 미사리유적에서는 한 지점에서 시기가 다른 삼국시대의 밭 경작 유구 2개가 발견되었는데 하층의 유구는 휴한농법을 보여주고 있는 반면 삼국시대 중후반에 이용된 상층의 유구는 이미 상경화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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