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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 {| class="wikitable" style="text-align:center"; border="1" | [[파일:서울조선.jpg|380픽셀]] || [[파일:서울현대.jpg|380픽셀]] |- |} [[조선]]의 [[태조]]이신 [[여진족]]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한 후 이전 [[고려]][[왕조]]의 잔향이 강한 개성을 떠나서 이곳으로 [[천도]]하기에 이른다. 그 후 500년 동안 변함없이 조선의 수도였고, 한국이 건국 된 이후에는 한국의 수도가 되었다. 구한말쯤에는 사람들은 '한양'이라는 말을 알지 못하고 이미 '서울'이라고 해야 알아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 삼국시대 이전 === 고구려에서 남쪽으로런한 왕자2명이 자리잡아 동생 온조가 벡제를 건국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한강의 큰 수로를 둔 자원적, 전략적 중심지였고, 이 지역을 차지하려 삼국이 치열한 사투를 벌였으며 이 한강 유역을 차지하는 국가는 전성기를 누렸다. 즉 [[삼국시대]]부터 서울은 한반도의 중심이었다는 거다. === 고려시대 === 남경이 이곳에 있었다. 풍수지리적으로 좋은 곳이었기 때문에 고려 시대에 이곳으로 수도를 옮기려는 시도도 있었다. 수도인 개경과 지척의 거리였고 서경과 함께 [[고려]]의 준수도 취급이었다. === 조선시대 === [[파일:한양전경.jpg|400픽셀|섬네일|한양의 전경]] [[파일:한양지도.jpg|200픽셀|섬네일|도성도(都城圖)]] {{인용문2|우리나라는 한양만 벗어나도 시골 티가 납니다.|[[박제가]](朴齊家)}} 상기한 대로 이성계가 개성에서 이곳으로 천도하여 조선 왕조 500년 동안 누대의 수도로 작용했고 이때의 이름은 한양(漢陽)이었다. 다만 지금의 서울특별시보다 면적이 훨씬 좁았다. 조선 시대 국왕과 왕실 사람들이 사는 궁궐들, 종묘,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을 하는 양반들이 모두 한양에 살았다. 심하게 좆멍청한 새끼가 아니라면 누구나 아는 사대문 등의 서울 소재 문화재들은 이때 생긴 것이다. 한양을 관리하는 '''한성부(漢城府)'''라는 기관이 따로 있었는데 한성부의 책임자인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은 품계가 '''정2품'''으로 존나게 높았다. 수도도 수도지만 왕정 국가였으므로 한편으로는 '''왕이 사는 곳'''이라는 상징성이 컸다. 조선시대의 [[벼슬아치]] 등용 목적의 [[시험]]이었던 [[과거]]는 최종 시험을 한양에서 치르게 되어 있었고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과거를 보기 위해 한양으로 걸어서 오려면 거의 일주일을 들여야 하는 피똥을 쌌는데 이렇게 되면 한양 사는 인간들이 빡세게 공부할 시간에 얘네들은 걸어오느라 시간 다 쓴다... 물론 경비도 엄청 많이 들었다. 과거는 시험 날이나 과목이 바뀌는 경우가 있었는데 서울 즉, 한양에 사는 사람들은 이런 정보를 쉽게 바로 아는 반면, 지방에서는 이런 이런 정보를 얻기가 어려워서 기껏 피똥 싸면서 한양까지 걸어온 다음에 시험장에서 [[과목]]이 바뀐 것에 [[데꿀멍]]한 뒤 좆망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경우도 많았다. 서울이 그냥 짱이라는 인식은 이미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퍼지기 시작했고 이 시점에서 [[조선]]의 미개한 다른 지방들을 압도했다. === 일제시대 === {| class="wikitable" style="text-align:center"; border="1" | [[파일:경성시절.jpg|650픽셀]] |- ! 경성(京城)의 전경 |} 구한말 시절 한성군으로 명칭이 변경돠었던 것이 다시 한성부로 개칭된 후 한일합병이 일어나 경성부(京城府)로 개칭된다. [[일제강점기|식민지 조선]]의 중심지였다. 이 시절 행정 구역 변동이 있었는데 은평면(현재의 은평구)의 대부분이 고양군에 떼여가 서울의 범위가 한성 도심 안으로 축소되었다. 3.1운동이 여기서 처음으로 일어났다. 뭐 그 이후로는 알다시피 일본 군인들이 대량 학살을 저지르고 서울은 피바다가 되었다. === 현대 === {| class="wikitable" style="text-align:center"; border="1" | [[파일:80년대서울.jpg|650픽셀]] |- ! 80년대 서울의 풍경 |} 해방되자 한양으돌아왔다가 순우리말로 수도를 의미하는 서울로 바꿨다. 서울로 개명되면 한자로 못써 불편하다한걸 김형민시장이 걍 한글로 쓰고 애국 부심부리라고 설득해서 바꼈다한다. 이와중에 이승만빠들이 우남시로 바꾸자 생때부렸는데 다행히 씹혔다한다. [[산업화]]가 이어지면서 인구가 무시무시하게 모여들었다. 80년대 들어서면서 본격적인 서울 몰빵이 시작되었고, 이 몰빵 정책은 서울과 그 주변 지역에만 대한민국 인구의 절반이상이 몰려서 사는 충격적 결과로 나타난다. (서울 1000만, 경기 1300만, 인천 300만) ...라고는 하지만 사실 조선 시대부터 한반도는 서울 몰빵 시대였다. 말은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한양으로 보내라는 말이 일찍이 있지 않았는가? 잘난 사람들만 서울에 올 수 있었지만. 1949년까지만 해도 수도권 400만, 경상도 600만, 충청도 300만, 전라도 500만이었다. 현재는? 수도권 2600만, 경상도 1300만, 충청도 550만, 전라도 500만이다. 역사적으로 [[평안도|서북지방]]에게 좆털리기 좋아하는 지역이었다. 광개토왕, 장수왕 그 이후 신라의 한강 지역 강점 이후로도 고구려의 철기 러쉬를 받았으며 조선 시대에 잠깐 서북 사람을 개무시했지만 그때 서북지역은 광산업, 상업 발달로 경기 지역 경제력과 맞먹은 지 오래고 지금은 북한의 수십 배 경제력과 군사력을 가졌음에도 북한에게 찍소리 못하고 미국 응딩이 뒤에 매달려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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