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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닌]] 시기 === '''쏘련의 국부''' '''쏘오오련을 건국했다''' 이보다 더한 업적이 있을까? 아, 물론 저들 입장에서. 업적으로 신경제정책 시행과 1차 대전 포기, 그리고 적백내전 승전 등이 있다 ====신경제정책, NEP==== 신경제정책, 즉 NEP는 러시아어로 НЭП,역시 네프라고 불렀는데, 소련 수립이후 가혹한 공산주의 전시 경제정책을 채택, 모든 공업의 국유화, 모든 사업장의 국유화, 농민들의 수확물 사적처분 금지와 강제징발, 사적 상거래 금지와 화폐제도 폐지 등을 포함하는 일련의 정책이 실시되었다. 하지만 농민들의 불만이 극에 달하고, 당연히 이런 순수 공산주의 이론에 입각한 경제정책이 성공할리가 없었고 부작용만 잔뜩 일어나자 1921년 레닌이 신 경제정책을 발표하고 파탄난 국가 경제를 수습하기 위해 자본주의 요소를 일정부분 받아들인 일련의 조치를 의미한다. 식량 징발 제도를 중지하고, 잉여 농산물의 자유 판매, 사기업의 인정, 국영 기업의 부흥, 외국 자본의 도입 등 자본주의적 요소를 도입하고 화폐제도를 다시 부활시킨다. 이로서 소련은 1925년에 1차대전 이전 수준까지 경제력을 회복시키기에 이르렀고, 이 결과 비록 가난한 소농들은 불리할지언정 토지를 소유한 부농들은 유리했고, 소련교역량의 40%에 육박할 정도로 사기업 활동이 번성하였다. 이로서 많은 부자와 부농(쿨라크)이 출연하였고 소련 정부도 이 시기에는 이러한 부자와 부농들을 눈 감아 주기에 이른다. 이런 부농들을 네프맨이라 불렀다. ====1차대전의 포기==== 레닌과 볼셰비키들의 공약은 1차대전 중지였으므로 이 공약을 지킨다. 이로서 연합군에서 러시아가 단독으로 무단 이탈하게 되었고 그 결과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이 1918년 체결되었다. 독일제국 측은 소련을 최대한 약화시키는 것으로 방침이 정해졌다. 이로서 소비에트 러시아는 전승국 대우를 사실상 포기한것과 다를바 없게 되었다. 조약 결과 구 러시아 제국령인 핀란드, 폴란드, 발트3국, 우크리이나, 조지아 가 독일령/오스트리아령/오스만령으로 들어간다. 사실 레닌과 볼셰비키들의 구상은, 조약이 체결된 해를 보면 짐작할수 있듯이, 어차피 독일 제국은 망할 나라이고, 막판에 무단 이탈했더라도, 소련이 러시아 제국의 계승국인 만큼 연합국으로서 전승국 대우를 받아, 구 독일령 영토들을 다시 편입할수 있으리라고 기대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다면, 서유럽이나 독일에도 공산혁명이 전파되어, 이 조약이 무효가 될것을 기대했을수도 있다. 실제로 독일은 11월 혁명으로 제정이 무너지고 바이마르 공화국이 수립되었으나, 실상은 소련의 기대와 달리 사민주의자들이 주축이 되어 우파와 연합한 연립정부 형태였다. 그러나 최초의 공산국가인 소련을 달가워 할리 리가 없는 자본주의 승전 연합국은, 소련의 일방적인 조약 파기 선언에 아랑곳 하지 않고 베르사유 조약에서 당시 독일령으로 들어갔던 구 러시아 제국 영토에 대한 소련의 클레임은 모조리 묵살되고 동유럽 신생 독립국들이 탄생하였다. 이로서 폴란드 분할이후 멸망했던 폴란드가 제2공화국으로 부활했고, 발트 3국, 핀란드가 독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적백내전(러시아 내전)의 승리==== {{본문|적백내전}} 한편 1차대전이 끝나고 평화의 시대가 도래하나 싶었지만, 제정 러시아를 지지하는 구 귀족들과 구 제정 장교들, 우크라이나 독립운동가들과 무정부주의자들 등이 소련에 반기를 들고 반란을 일으켰고 소련은 내전상황에 빠진다. 거기에 최초의 공산국가 소련에 대한 두려움과 공산혁명의 전파를 우려한 서방 연합국들은 간섭군을 파견한다. 초반엔 물적으로도 밀렸다. 사실상 내전 초반 소비에트 정부가 지배하던 지역은 유럽 러시아 정도 뿐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국방장관 레프 트로츠키가 뜻이 있는 구 제정 장교들 까지도 적극적으로 영입하고 공산당 입당또한 허가하여 전문성을 높히고 도시 노동자를 혁명의 주체요 농민을 반동으로 보아 신뢰하지 않던 관행을 깨고 전국적 징병제를 실시해 병력을 500만까지 불려놓았다. 제정 장교들은 황실 뒤엎은 빨갱이 놈들 밑에서 일하기 싫다고 은퇴했더니 백군이라는 새끼들이 꽁무니에 서방놈들을 줄줄히 처달고 들어오자 오히려 반란군 쒜끼들과 침략자들한테서 러시아를 지키자며 재입대를 했다. 반면 백군이나 간섭군은 온갖 이해관계를 가진 잡다한 집단들이 소련 싫다는 거 하나만 보고 모인 어중이 떠중이 들이고, 간섭 연합국도 다들 꿍꿍이 속이 달라서 불협화음을 내고 있었다. 결국 1921년에 사실상 적군이 백군과 간섭군을 격파하며 사실상 승리하였고 1922년 외몽고까지 점령하여 세계 2번째 공산국가인 몽골 인민공화국을 수립하고, 1923년 연해주까지 탈환하면서 완전히 내전을 끝낸다. 하지만 1930년대까지 부농이나 민족주의 세력등 산발적 봉기나 저항은 있었고 이후 스탈린 대숙청의 계기가 되었다. ====10월 태제==== 레닌은 소련이 세계의 파쇼 식민제국에게 핍박받는 피압박 식민대중의 해방을 지원하겠다고 나섰다. 이 덕에 한국의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고무되어 1920년대에 고려 공산당이 창당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임정에선 독립운동가 모씨가 소련으로부터 지원받은 독립자금을 자기 계파에게 딲아썼다가 딱 걸려서 일대 파란을 야기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결국 킬구선생이 소련에게 지원받은 자금을 왜 공산당끼리만 나눠쓰냐며 격분하여 운반책이 처단당하는 사태가 터지기도 하였다. 그래서 결국 임시정부한테 돈 안주고 지들끼리만 돌려썻다고 오늘날 까지 공산주의계열 독립운동가들이 두고두고 까이는 원인이 되고 말았다. 근데 이건 우파 민족주의 독립운동가들도 할말은 있는게, 결국 세상에 공산주의자들 끼리도 10원 한장이라도 대가없이 움직이지 않기때매 이렇게 돈 받은 공산주의 계열 독립운동세력들은 소련 코민테른과 나아가 크렘린의 지도(라고 쓰고 사실상 지시, 조종)을 받는 위키로 전락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영향 및 평가==== 이러한 업적들이 결국 후세에 특히 스탈린 시기에 도움이 많이 되었다고 한다 경제적으로도 불평등했던 러시아 제국 말의 현실을 극복시켜 평-등한 공산주의 락원을 이룩했다... 물론 현실은 그정도까진 아니고... 러시아 제국보다는 살만한 나라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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