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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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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요 == 시발 문서마다 [[강제개행]]하는 새끼 여기도 왔다갔었네. 대충 고쳤지만 또 올지도 모르니 감시 바람. 휘는 '유' 1453년 [[계유정난]]을 일으켜 권력을 잡고, 1455년 단종의 선위를 받아 즉위하였다. 과거 이새끼의 고평가는 제5공화국 시절에 수양대군이 지들이랑 비슷한 거 보고 빨기 시작한게 시작이라고 한다. ㄴ 일제 때부터도 빨긴 빨았다. [[김동인]]의 '대수양' 같은 작품도 있었고. ㄴ박정희때도 졸라 빨았다. ㄴㄴ 박정희때 빨았다던 팩트좀 가져와봐라 단종 폐위가 왜 문제였는지를 모르는, 역사를 드라마로 배운 [[급식충]]과 [[박시백]]만화만 본 역알못들이 세조를 빨더라. 그래도 요즘은 이새끼 밑천에 대해 알려진게 많아서 그런가 [[공주의 남자]], [[관상]]등 인성터진 악당으로 묘사하는 작품도 늘고있다. 열심히 빨았던 높으신 분들과 세조에게는 왠지 크나큰 공통점이 보이는 것 같다. 이 호로새끼의 역적질로 말미암아 조선의 견실한 고급 공무원들이 대거 갈려나가고,ex) 김종서, 황보인, 후일 사육신들.<ref>뭐 다 없애버린건 아니고 신숙주나 정창손같은 재빨리 배신 때리고 수양대군한테 붙은 기회주의자들은 계속 살려두고 우대해줬다. 참고로 정창손이 누구냐면 세종대왕이 [[훈민정음]] 만들려 할때에 백성 개돼지론을 들어 반대했다가 파직당한 그 새끼다. 그리고 이 새끼는 결국 세조 치하에서 영의정까지 오름. 그것도 본인이 부담스럽다고 사양했는데 세조가 억지로 시켜줬다. 수양좆 시절의 조선이 얼마나 인재풀이 박살나 있었는지 알 수있는 대목.ㅋ</ref> 그 자리에 빡촌을 전전하던 한명회, 홍윤성, 권람 등 밑바닥 엠창인생들이 대거 등판, 바야흐로 조선의 흑역사가 개막되는 것이었다. 역적질의 명분을 '권신들이 왕권을 좃으로 보는 걸 막기 위함'이라고 내세웠으나, 당대의 명신, 충신 소리 듣던 [[김종서|갓종서]], 황보인 등을 골로 보내고 좆명회 좆숙주 등의 권신들이 수양 사후 왕권을 좃물로 전락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시발 [[태종]]이 왕권 강화할려고 미친놈 소리 들어가며 인척들 쳐내고 권신들 모가지 잘랐는데 이 새끼 때문에 단숨에 도로아미타불이 되어버렸다. 숙청을 안한게 지 할배 이방원이랑 가장 큰 차이다. 애초에 쿠데타 명분도 이방원보다 없고 존나 엉성한 계획이라 부하들이 말린다. 그러자 발로 뻥뻥 차가면서 김종서 집으로 닥돌해 어떻게 영혼의 한타 성공시킨게 이새끼임. ㄴ세조가 신하들 앞에서 중국의 위인들을 얘기하면서 유방은 공신들을 토사구팽해서 별로라 하면서 존나깠다고 한다. ㄴㄴ 왜 토사구팽한지도 모르는 빡대가리라서 그렇다. ㄴㄴㄴ지는 조카 통수쳐서 죽여놓고 주제를 알아야지ㅋㅋ 그런 주제에 사마천 고자만들고 이릉 팽한다음 아들까지 의심해서 죽인 한무제는 물고빨았댄다. 역알못새끼ㅉㅉ ㄴㄴㄴㄴ솔직히 서로 비슷한새끼다. 좆나 무능한데 부지런하기만 한새끼가 멀쩡한 나라 거덜내서 국가 전반 개털만들고 미친놈이 외척에 권력을 몰아주고 지 민폐짓은 웃고넘기라면서 쓴소리한번하면 엄근진하는 새끼잖아 그래서 그런지 공신들 몇몇이 술처먹고 세조한테 모가지 짤릴 말좀 했는데 이거 포함해서 왠만한건 다 봐줬다. 다만 양위할 것을 직접적으로 운운한 양정은 봐주는 거 없이 모가지를 날려버렸다. 태종이 한 공신숙청이 세종한테 어떤 영향을 줬는지 생각하면 세조의 정치 수준은... ㄴ만약 진짜라면 세조는 진짜 노답이다. 유방이 토사구팽을 괜히 한게 아닐텐데? ㄴㄴ 애초에 수양자체가 좆문가에 자부심 쩔어서 모든걸 지좆대로 생각하는 탓이다. ㄴㄴㄴ 만약 진짜가 아니라 그냥 진짜다. 왜 숙청을 못했을까?? 서로 해쳐먹고 빨아주기 바쁘니 그렇지. 세종 때의 양반들이 토지 보유를 어느 정도 했는지 세종 10년에 강원도감사가 보고한 내용을 통해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데 강원도감사의 보고 내용에 따르면 강원도 호적에 등록되어져 있던 11538호 중 50결 이상을 보유한 호가 10호, 20~50결을 보유한 호가 71호, 10~20결을 보유한 호가 1641호, 5~10결을 보유한 호가 243호, 5결 이하를 보유한 호가 7773호였다. 그리고 세종실록지리지를 보면 강원도의 밭은 도합 65916결이였다. 이 때까지만 하더라도 양반들의 토지 겸병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이 시기를 기점으로 조선에 다시 권신들이 득세하기 시작하면서, 조선의 토지들이 대거 권신들에게 빨려들어가기 시작했다.<ref>이건 논란이 있다. 알다시피 이때까지만 해도 특별히 하사받은 공신전을 제외하면 귀족들은 토지를 사유할수 없었다. 조선의 전제개혁의 요지가 바로 과전제인데 이 과전제가 바로 토지의 소유권을 허락하지 않고 토지에서 나온 소출로 관료의 생계를 허락하는 토지제도다. 이 시기의 조선 공신들의 토지 비리는 백성들을 시켜 황무지를 개척하고 이를 사유화 하거나 관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과전의 소출을 빨아먹는게 고작이었다(물론 이것도 악질이지만) 고려시대에 자주 벌어지던 토지겸병은 이 시기엔 일어나지 않는다. 공신들이 주로 치부하는 방법은 매관매직 뇌물수수 과전 편법으로 오래 사용하기 황무지 몰래 개간 후 사유화 정도이다.</ref> 이 새끼가 조져버린 정책은 한두가지가 아니지만 그중에서도 탑을 꼽으라고 하면 바로 조선의 수취제도를 작살내버린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원래 고려와 조선초까지의 과전법 체제에선 국가수조지가 중앙 각 기관과 지방에 나뉘어 속해 있어 각 기관은 별도로 전조(田租)를 거두어 재정에 사용했다. 쉽게 말해 각 기관에서 지가 쓸 돈을 지가 걷어서 사용했다는 이야기. 당연히 딱 필요한 만큼만 걷는 경우는 거의 없었고 요즘 지자체들이 하듯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필요이상의 세금을 걷어가 횡령하는 사태가 비일비재했다. 이걸 보다못한 [[세종대왕|갓종대왕]]께서 지방기관의 수조지 외의 토지를 국용전으로 통합해 국가재정의 출납을 일원화하는 국용전제 정책을 시행하였다. 쉽게 말해, 재정을 하나로 통합해 국가재정의 운용을 일원화한 것이다. 이렇게 하면 국가재정출납이 간편하고 효율적이 되고, 농민의 부담도 줄어들게 된다. 근데 수양 이 씹새끼가 지가 맘껏 돈 좀 써보고 싶다고 이걸 박살내 버렸다. 이미 통합 다 해놓은 이조에 지 멋대로 내수사라는걸 설치하여 왕실재정을 분리시켜버린 것이다. 즉, 세종대왕의 정책하에서는 왕실이 돈을 쓰고 싶으면 이조에 손 벌리고 돈을 타써야했지만, 수양새끼는 그런거 없이 그냥 지 멋대로 쓰고 싶을때 좆대로 걷어다 쓸 수 있게 제도를 고쳐버린 것이다. 게다가 나중엔 기껏 통합해 놓은 중앙재정도 박살내 다시 고려시대 정책으로 되돌려 놓음. 즉 조선 역사 500년 내내 조선의 골칫거리가 되었던 수취제도의 문란의 발단이 바로 이 인간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사실 수양 이새끼는 기록보면 백성생각 안한것도 아니고 백상을 위한 정치를 생각했던 건 맞다. 근데 공신새끼들이 다 해쳐먹는데 무슨 소용이 있냐. 오죽하면 백성들이 수양 이새끼 행차하는데 출동해서 징치고 지랄발광해서 시선 끈 다음에 억울함 해소하기도 했다. But 이새끼는 그 백성의 억울함을 듣고 해결해주긴 하는데 정작 문제의 근원인 공신들은 처리안하고 남겨둬서 결국 진통제 한 방 놔주고 "병치료 끝!" 이지랄 한거임. 공신한테 맞아죽은 사람 아내가 억울하다고 하소연하니 아내의 마음이 아름답다고 칭찬하고 상 내리면서 정작 억울한 사람 때려죽인 공신은 처벌 안하는게 세조식 애민이였다. ㄴ 그러니 뇌내망상질인거지. '나는 백성을 존나 생각해' 라고 말만 쳐 하고, 원인은 내빌라두는 거. 징 잘친 몇 사람 구제해 주는거 어디서 많이 본 짓거리다. 아직도 우리나라 정치인들은 크리스마스면 라면박스 갖고 사회복지시설가서 사진을 찍더라지. 징 친 놈 구제한 정도로 백성을 사랑한다고 광고질이나 해 대는 미칭개이 새끼. 더불어 왕 해먹겠다고 친형 무덤도 파해치고 동복 동생들과 조카들을 죽이고 선왕이던 단종까지 죽인 희대의 패륜아. 거기에 한술더 떠 순흥이라는 이름의 멀쩡한 동네를 완벽하게 도륙낸 학살자다. [[선조|애비]]부터 아들까지 병신 같다는 소리를 듣는 그 [[인조]]도 광해군을 족치지는 않았다. ㄴ 근데 인조 아버지가 왜 선조냐?;; 인조 아버지는 정원군이고 정원군이 선조 아들이지;; ㄴ 사실 수양은 역대 임금중 명분없기론 역대급이라 단종을 살려두고는 왕자리 해먹기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역모라면서 안평대군 족쳤는데 지가 왕자리 가져간걸 무슨 명분으로 왕하냐? ㄴ 수양도 처음엔 상왕으로 만들어놓고 허수아비로 세워놓으려고했다 사육신의 성삼문이 칼받았다고 자백하는 바람에 죽일마음 품은거고 애초에 계유정난이 일어난일 자체가 말도안되는 수준의 사건이다. 오히려 광해군 입장에선 단종이 죽었기 때문에 목숨 부지할수 있었음 게다가 문종이 거의 토대를 잡아놓은 조선 군사력을 완전 상병신으로 만든 것도 이 새끼. 갑사라는 현대의 부사관같은 애들을 한부대로 모아놓으면 존나 짱짱 세겠지하면서 갑사 부대 창설. 이 때문에 부사관 역할을 해줘야 할 갑사들이 죄다 한 직위로 통일되어 계급이 씹창났으며 이 때문에 군 지휘 체계 전체가 개박살났다. 창기병은 적과 근접해서 싸워서 위험하므로 멀리서 화살 뿅뿅 쏘고 적이 접근하면 튀니까 손실없이 적을 죽일 수 있는 궁기병이 짱이라고 생각하여 창기병을 삭제하고 궁기병 올인. 이 초보 밀덕 좆문가같은 발상을 보면 이 새끼가 과연 능력이 있긴 한 건지나 의문이다. ㄴ 설명충 등판하자면 궁기병은 적을 쏴죽이라고 있는 게 아니라 적을 교란하면서 진형을 무너뜨려 다른 병력이 쐐기를 박을 수 있게 하는게 주목적이다. 기마궁술이 기동성은 있어도 완력이랑 조준점이 분산되서 적이 장갑만 제대로 갖춰도 살상력이 팍 떨어진다. 애초에 기마궁술로 몇백년을 먹고 산 몽골민족들도 9세기부터 궁기병 전술에 한계점을 느끼고 창기병을 육성하기 시작했는데 이새낀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궁기병이 딜을 잘 뽑을거라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ㄴ 감사합니다. 설명충님 환영입니다. ㄴ 일단 수양놈이 단순히 궁기병만 육성한게 아니라 그냥 냉병기 자체를 무시하고 활에다 올인한게 문제다. 창기병만 삭제한 게 아니라 보병도 삭제했다. 궁기병에 대한 설명까지도 필요없는게 시발 상식적으로 앞에서 받쳐주는 부대가 없으면 활이 뭔 소용이냐? 현대 전투 마냥 기관총 긁어모아서 화망을 펼칠 수 있던 시기도 아니고 활만으로는 적의 접근을 막기 어렵고 근접전을 허용하는 순간 전멸 ㅅㄱ링.<br>진짜 밀레 좆문가 수준이라 '헤헿 오기 전에 다 쏴죽이면 손실이 없겠지?' 하면서 뇌피셜 굴렸든지, 아니면 유교 씹선비 기질이 이때부터 붙으면서 선비라면 활을 잘 쏴야지 엣헴 하면서 활을 숭상했든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암튼 확실한 건 실전 고려라곤 씨알만큼도 안한 편성이었다고 할수밖에 없음. 게다가 화약무기의 여명기인 이 시점에서 화포부대인 총통위를 돈이 너무 든다고 삭제했다. ㄴ총통위는 화약 무기에 관심이 많았던 세종대왕이 직접 창설한 부대인데 세조 이새낀 쌀없다고 폐지시켜버림 그러면서 불꽃놀이는 존나 좋아했다고 한다. 위에 씨부린 내용들도 중요한 요인들이지만,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바로 보법. 예전 봉족제에서는 군인이 하나 뽑히면 그 군인 집안을 씨다바리하는 봉족이 호별로 편제되어 있었는데 우리 수양대군 나으리께서 군비 부담 좀 줄이겠다고 봉족을 사람 단위로 때려버린 것. 그 결과 한 집에서 군인을 보조해야 하는 부담이 늘어나면서 농민들이 파산하기 시작했고 그 연쇄효과로 군인을 씨다바리해줄 인구가 줄어들면서 군인한테까지 각종 잡일을 부과하기 시작했다. 쉽게 말해 역사 시간에 귀에 대못 박히도록 배우는 군역 붕괴의 원인을 제공한 인간이 바로 이 새끼라는 것. 이렇게 군역의 부담이 가중된 상황에서 공신들의 수탈을 세조가 방관한 덕에 가난한 양민들은 이대로는 도저히 살 수가 없을 지경이 됐고 그냥 도망치거나 자발적으로 공신들의 사노비가 되는 일이 비일비재해졌다. 그리고 양민들이 자발적으로 공신들의 사노비가 되는 현상은 세조가 확립시킨 일천즉천제와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며 조선 중기에 노비 비율이 크게 증가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어 버렸다. 이러면서 백성들의 삶은 당연히 피폐해졌고 양민의 비율이 감소하면서 군사력과 재정도 장기적으로 심하게 약화되었다. 한마디로 조선 중기에 군대와 관련해 나타난 문제점 대부분은 이 인간이 원인제공한거다. 형은 진짜로 군잘알이었는데 이 새낀 그냥 스타 게임 가지고 현실 전쟁 논하는 좆초딩 수준. 이새끼 빠는 놈이 있으면 또라이나 역사 좆도 모르는 병신이라고 보면 된다. ㄴ 역사책에 진관체제로 국방력 강화 했다 나왔는데 이거 교과서 태워야 되냐? ㄴ 사학과 양반들이 군알못이라 그렇다. 시발 멀쩡한 체제였으면 진관을 그대로 가지 왜 제승방략으로 바꾸자는 의견이 나오겠니 ㄴ 진관체제 병력 분산시켜서 각개격파 유도하는 시스템 아니냐 ㄴ 조선 군사력이 건재할 때는 진관체제로도 버틸 수 있지. 그런데 지가 한 다른 조치들 때문에 군사력 씹창나기 시작하니<br>나중에 가선 그냥 무의미하게 병력 분산한 것 밖에 안 돼서 이 쪽이 반대로 각개격파당하기 딱 좋게 변한 거. ㄴ 진관체제는 대규모 침략에는 불리한 체제였다 그래서 제승방략으로 변형된 거지<br>진관체제는 사실상 수양새기가 지한테 대들 군벌의 출현 막으려는 의도 하나뿐이었다고 보는 게 맞다 조선 흑화의 시조새. 특히 지가 이징옥의 난 처리하면서 북방 방비 씹창난 걸 가지고 "4군은 지형상 지키기 어려워" 구랏빨 까면서 4군을 폐지했고, 여기에 여진족들이 다시 들어가 살기 시작했다. 세종대왕이 여진족 견제 국토 확장이라는 목적 하에 사람들 강제로 전염병 나도는 불모지 헬게이트에 꼬라박는 무리수까지 둬가면서 강경하게 진행했던 게 4군 6진이었는데 세좆새끼의 트롤링으로 이게 다 백지화당했고 영토가 도로 쪼그라들었다. 본래 '세' 자가 들어가는 시호가 '''영토 확장'''에 기여한 임금한테 붙여주는 걸 생각하면 이 문서의 제목처럼 시호 받으면 안됐음. 결국 이때 세좆이 포기했던 4군은 300년이 지난 정조 시절에야 조금조금씩 다시 복구하기 시작해서 지금의 한반도 경계선을 복원하는 데 성공했다. 아 씨발 좆나 암 걸릴 것 같다. 개 병신 좆같은 새끼. 그래도 저승에서 현덕왕후가 가만볼 수는 없었던지 이 새끼가 왕위 찬탈후 문둥병걸려 왕위에 근 10년정도 밖에 못있었고 아들인 의경세자와 덕종, 예종은 단명했다. 예종은 조선의 왕중 제일 병신같이 죽었던 왕인데 죽은 원인이 다리가 아파서라고 한다. ㄴ좆병신새끼답게 병걸리고 아들 죽은게 꿈에서 형수를 본 탓이라고해서 무덤을 파고 형수시체를 부관참시했다. 유교국가 왕이라는 새끼가 괴력난신을 믿고 왕실의 일원인 형수의 무덤과 시체를 훼손했다. 미친새끼 ㄴ근데 형수는 형(문종대왕)하고 합장된 상태였다. 즉, 형수 밉다고 형 무덤까지 파헤치고 관뚜껑 따서 강제이혼시킨 셈. 진짜 미친 새끼. 뒈질 때는 시체가 빨리 썩어야 한다고 석곽과 묘실을 만들지 말라고 명령했단다. 에라이 부관참시 당하는 건 겁났냐 개쉐끼야. ㄴ이거 말고도 깔건 많으니 굳이 메갈마냥 거짓선동은 하지 말자. 이건 능 만들 때 돈 많이 드니까 백성들 힘들게 하지 말고 간소하게 장례 치르라는 의미에서 한 말이다. 애초에 왕조가 아예 망하지 않는 한 왕으로서 죽은 쟤는 부관참시 같은거 걱정할 필요 자체가 없었다. 안 그래도 깔거 많은데 괜히 이상한 구라까지 상상해서 창조경제 실천하다가 선동충이 되진 말아라. ㄴ근데 완전히 말도 안되는건 아니다. 당장 이새끼부터가 지 형 무덤 파내서 형수 욕보이지 않았냐 ㄴ 형수(현덕왕후) 부관참시랑 관을 파낸건 다소 과장된 야사다 실제 있었던일은 계유정난 당시 형(문종)의 능앞에서 비석만들던 이조판서 민신을 자기 반대파라고 묫자리에서 그대로 숙청해버린 일과 단종 복위 사건때 상왕이던 단종을 노산군 즉, 왕자로 강등시켜버리면서 왕후였던 자기형수를 폐비로 만들어 서인으로 격하시킨게 와전된듯 ㄴ 억지부리지 마십시오 그게 아니더라도 수양을 욕할 방법은 많습니다콘 아무튼 제대로 된게 하나도 없다. 왕권은 왕권대로 신권은 신권대로 열화하고 6조업무 방식도 죄다 열화버전만 낸 꼴이라 장점이 없다. 말년에 불교빨던건 덤 이새끼 저승가면 일단 단종이랑 세종이 나라꼴 박살난거 보고 식읍 전폐하면서 통곡하고 그모습 보고 열뻗친 문종이랑 칼방원한테 존나게 두들겨 쳐맞았을듯 ㄴ 저승서 조카나 안 만났기를. ㄴ 이미 그 질알을 한 시점에서 숙부와 조카 사이가 아니다. 단종 목 조였던 활줄로 목을 똑같이 졸라 버려야지. 이미 저승이라 죽지 않을테니 영원히 고통받게.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다. 좆선이 유교탈레반 위주로 돌아가던것도 이새끼탓이 크다. 집현전을 없에는 통에 국왕 친위세력은 쓰레기같은 공신세력뿐이고 이들이 뒤지니까 튀어나온건 지방 중소지주 출신의 혈연, 학연, 지연으로 묶인 유교탈레반 새끼들이다. 기반이 지역유지 출신이다보니 노예제 폐지나 수미법, 공물제도 개선을 기를쓰고 막았으며 조선은 농업몰빵, 상공업 쇠퇴, 지역주의만 클수밖에 없었다. 중앙집권화를 빨리갖춰놓고도 자영농은 좆망하고 국가상태가 중세급으로 떨어진건 사실상 이새끼가 뿌린 씨앗이다. 유교국가의 수장으로서, 유교의 최고위 사제로서 행동했어야 할 넘이 불교에 미쳐있었다.(절대 종교로서의 불교를 폄하하고자 하는 말이 아니다.) 조선초 숭유억불을 기조로 해서 여말의 부패한 거대사찰을 개혁하고자 선대 왕들이 얼마나 애를 썼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의 폐풍을 일시에 다 쳐갈아엎을순 없으니 큰 사찰 정도는 남기고 이외엔 천천히 없애자며 정책을 추진하고 있었는데.. 당장 이놈의 치적만 봐도 불교문화융성 따위가 있는걸 보면, 지금에야 유물이니 뭐니 많이 남아있어 눈이 즐겁고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있지만 당대 생산력 대비 런 것들을 제작하기 위한 공력들을 무수히 소비한 셈이 된다. 말 그대로 유학을 기반해 세운 조선인데 이게 말이 되는 소린가? 이후 사림들을 유교탈레반이라 부르지마는, 왕이라는 새끼가 이러니 당대 유학자들 특히 벼슬안한 외방의 유력 산림들이 얼마나 분개했을지는 안봐도 비됴다. 그러니 탈레반화 됐을수도.. 생각해보라. 우리 절의 큰스님이 알고보니 개신교도여서 여기 절 시주돈을 다 갖다 붓고 십자가 만들고 계시면 절 신도들이 빡치지 않겠음?? 세조 이새끼가 딱 이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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