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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량위(당시 상하이시 당서기)가 당시 총리이자 권력서열 2위인 원자바오를 향하여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짓을 저질렀지만, 당연히 꼬라지가 꼬라지인터라 후진타오는 찍소리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그해 가을 들어서 중앙군사위 주석까지 결국 주긴 했지만 이건 장쩌민이 어차피 중앙군사위 주석 역시 언젠가는 후진타오에게 반드시 물려줘야 했다. 즉, 장쩌민이 중앙군사위 주석까지 줄 무렵에는 더 이상 장쩌민이 더 이상 중앙군사위 주석자리를 무리하게 유지할 필요가 없었던 거다. 그래서 물려준 거다. 그래봐야 후진타오는 반쪽짜리 주석으로 사는 건 변함없었다. 이렇게 별 탈없이 장쩌민의 재집권 플랜이 순조롭게 이뤄지나 싶더니, 2006년 장쩌민이 후진타오의 뒤를 이을 차기 주석으로 밀던 천량위가 비리문제(를 명분으로 한 권력투쟁)로 낙마해 버리는 사태가 벌어진다. 이건 후진타오가 반쪽짜리 주석으로서 칼을 갈고 갈아서 일격을 가한 거다. 즉 상하이방에 일격을 먹인 거다. 전형적인 와신상담으로 천량위를 들이친 건데, 사실 천량위의 비리수준은 장쩌민조차도 실드를 쳐 주지 못할 정도로 개판을 벌인 터라, 천하의 장쩌민조차도 어찌 해 볼 수 없는 불가항력의 일이었다. 어쨌든 기회를 잡은 후진타오는 비록 반쪽짜리 주석이라는 신세는 변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장쩌민의 재집권 플랜에 제동을 가했다는 커다란 성과를 올릴 수 있었다. 마침 1년뒤인 2007년에 17차 공산당 대회가 열리는데 이렇게 천량위의 숙청에 성공한 후진타오는 기회를 놓칠새라 자기가 후계자로 밀던 리커창을 후계자로 내세운다. 천량위 실각 이후 장쩌민은 천량위를 대체할 만한 인물이 없었기에, 후진타오가 내세운 후계자인 리커창에 대해서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할 수 밖에 없는 처지에 놓이는 등, 잘못하다간 재집권 플랜이 거기서 끝이 날 수밖에 없었다. 이게 바로 시진핑이 집권할 수 있었던 배경이다. 장쩌민으로서는 천량위를 대체할 만한 확실한 대체제가 필요했으니까. 물론 천량위가 낙마했다고 해서 후진타오가 반쪽짜리 주석에선 벗어난 게 아니다. 결국 리커창은 주석이 되지 못하고 총리로 만족해야 했고, 당시 태자당 소속인 시진핑이 차기 주석으로 결정나 버렸다. === 폭풍전야 === 17차 당대회에서 벌어진 장쩌민과 후진타오간의 권력투쟁의 승자는 결국 장쩌민이었다. 그 예시로 후진타오가 밀던 리커창은 국무원 총리로 낙점되었고, 후진타오의 후계자는 시진핑으로 결정난것이 바로 그 증거다. 이런 배경속에서 시진핑은 차기 주석으로의 행보를 걷게 되지만, 장쩌민이 아무런 생각없이 시진핑을 지명했을리는 없고 사실 보시라이라고 장쩌민 측에서 키우는 조커가 하나 있었다. 일단 보시라이에 대해서 말하자면, 당시 충칭시 당 서기로서 중국 공산당의 8대 혁명원로중 하나인 보이보의 아들이며 태자당의 핵심인물중 하나이자 장쩌민의 사람이었다. 이 정도 스펙이면 천룡인이나 다름없지. 문제는, 보시라이의 경우 야심이 매우 커서 그런지, 사방에 적을 많이 만들었다는거다. 결국, 2007년경 후진타오에 의해서 상무위원의 꿈은 물거품이 되어버리고 충칭시 당 서기로 좌천되어버렸다. 이 때문에, 보시라이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고 충칭시의 당 서기로 있으면서 재기를 도모하게 된다. 이렇게 보시라이가 충칭시 당 서기로 재임한 동안 자신의 측근인 왕뤼진(당시 충칭시 공안국장)과 함께 창홍타흑 정책(공산당과 사회주의를 예찬하고 범죄 및 부패와의 전쟁)을 추진하여 충칭시의 깡패조직들을 소탕하고 대중적인 인기를 한 몸에 받게 된다. 여튼간에 이 범죄와의 전쟁덕에 보시라이는 물론 그 심복 왕뤼진도 치안영웅, 충칭의 포청천 등으로 불릴 정도이니 후진타오 입장으로서는 존나게 좆같겠지. 참고로 이 범죄와의 전쟁을 치루는 도중 원창이라고 하는 전직 충칭시 사법국장을 체포하여 사형을 때려버리는데, 이 원창이라고 하는 인물은 전직 광둥성 거시 왕양의 최측근이자 상무위원중 하나인 허궈창과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공청단 소속이라, 당시 주석인 후진타오의 최측근이라는 참 웃기는 관계가 성립한다. 즉, 보시라이는 대놓고 후진타오를 엿처먹인거지 일전에 자신을 충칭시 당서기로 쫒아보내버린 복수를 한 셈이기도 하다. 어쨌든 보시라이는 왕양과 허궈창의 옛날 부하들을 모조리 깡패로 몰아서 처형시켜 버리고, 자신을 따르지 않는 민간기업들 역시 흑사회로 몰아서 처벌해 버렸다. 어쨌든 간에 이 창홍타흑 정책덕분에 중국내의 마오쩌둥 추종자들은 보시라이를 마오쩌둥의 정신을 이어받은 후계자라고 치켜세워졌으며, 또한 앞서 말한 왕양의 광동성 또한 후진타오의 지원을 받아 광둥모델을 내세우고 있는 상황이고 자연스럽게 광동모델은 충칭모델과 경쟁하게 된 처지에 이르게 되었다. 이는 사실상 장쩌민 vs 후진타오라고 봐야 한다. 보시라이는 이를 기반으로 충칭모델과 창홍타흑 정책의 성과를 충칭여론을 통하여 끊임없이 조명하여 후진타오를 압박했고, 이로 인해서 후진타오 역시도 보시라이를 경계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이대로라면 보시라이가 차기 상무위원에 무난히 안착하는 건 시간 문제였다. 이렇게 하여, 비록 장쩌민은 천량위가 제거된 후폭풍으로 인해 상하이방 내에서 내세울 만한 인물은 없었지만, 태자당의 맴버이면서도 장쩌민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보시라이가 이렇게 인기를 얻으면서 차츰 입지를 강화해나가니 이를 눈여겨 보기 시작한다. 보시라이는 태자당이지만 굳이 분류하자면 장쩌민의 사람이다. 즉, 이 충칭모델과 광둥모델은 바로 장쩌민과 후진타오간의 일전의 대리전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장쩌민은 무난하게 정권을 되찾아오나 싶었다. 여전히 후진타오가 반쪽짜리 주석이라는 점은 변함이 없었기 때문이다. === 보시라이 사건 === ==== 사건 배경 ==== 2011년 11월 경 "닐 헤어우드"라는 영국인이 충칭의 한 호텔에서 사망한 채 발견되었고, 충칭 당국은 닐 헤이우드가 급성알콜중독으로 사망했다며 사인을 발표했지만, 정작 사망자인 닐 헤이우드는 평소 술을 마시지 않는다는것이 밝혀지면서 당연히 타살의혹이 제기된 상황이다. 이에 영국정부는 중국정부에 당연히 진상조사를 요청했고, 이로 인해 왕리쥔 당시 충칭시 공안국장이 이 사건을 조사하게 되는데, 문제는 이 사건을 수사하던 중에 보시라이의 부인인 구카이라이가 바로 이 사건의 진범임을 알게 되면서부터 상황이 반전된다. * 닐 헤이우드에 관해 : 닐 헤이우드는 원래 보시라이 부부의 브로커 역할을 하던 사람으로서, 이 날도 어김없이 구카이라이가 헤이우드에게 거액의 자금을 해외로 송금해줄 것을 부탁했고 헤이우드는 이들의 내세운 조건보다 더 많은 수고비를 요구했다. 이에 구카이라이는 격노하였으나 헤이우드는 자기 요구에 따라주지 않는다면 이 돈세탁 계획을 폭로해버리겠다고 협박해버렸고, 결국 구카이라이는 헤이우드를 죽여버린다. 물론 왕뤼진은 사건의 진범이 누군지 보시라이에게 보고했지만, 당연히 이 사건이 드러나면 좋을 것이 없는 데다 본인 역시도 천량위 꼴이 날걸 알던 보시라이는 당연히 덮으려고 들었다. 이 때문에 둘 사이에서 갈등이 생기게 되었고, 어차피 보시라이가 충칭의 1짱이기에 왕뤼진은 이런 배경으로 경질당하고 말았다. 왕뤼진의 경우에는, 이미 보시라이의 최측근으로서 너무 많은 비밀을 알고 있었기에 이대로 가다가는 당연히 보시라이의 손에 쥐도새도 모르게 죽임당할것은 뻔할 뻔 자이기에 결국 왕뤼진이 선택할 길은 하나밖에 없었다. ==== 미국 대사관 망명 ==== 2012년 2월 6일 충칭이 아닌 청두에 있는 미 영사관에 망명을 하게 된다. 충칭이 아닌 이유는 그곳이 바로 보시라이의 나와바리이기에 절대로 안전한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왕뤼진의 행동에 매우 놀란 보시라이는 당시 자신의 지휘하에 있는 충칭의 공안을 청두로 보내서 청두에 있는 미 영사관을 포위해버리는 짓거리를 저지른다. 당연히 미국측은 웬 미친놈들이 난데없이 대사관을 총들고 서있으니 야마가 제대로 돌아버려서 베이징에다 격렬하게 항의했고, 이에 놀랠대로 놀란 당에서도 역시 급히 쓰촨성의 공안병력을 출동시켜서 충칭의 공안병력과 대치하는 상황을 직면케 했다. 이렇게 서로 대치하다가 결국 보시라이측이 물러나면서 상황은 일단 철수했지만, 그래도 왕뤼진의 신변을 손에 넣을 필요성이 있었던 충칭시와 당 중앙은 서로 왕뤼진의 신변을 손에 넣으려고 했고, 결국 당 중앙에서 왕뤼진의 신변을 확보하여 베이징으로 데려가게 되었다. 보시라이라는 거대한 성벽에 잔금이 간 상황에, 이를 바라보고만 있을 정복자가 있을까? 후진타오는 급히 잔금에 공성추를 때려박기 시작했다. 그렇다. 후진타오는 왕뤼진의 신변을 확보한 것이다. 후진타오는 왕뤼진의 신변이 확보한 다음, 그를 조사하면서 보시라이의 비리를 전부 알아차리고, 이를 통해서 장쩌민에게 또 다시 일격을 먹일 수 있는 기회를 포착했다. 비록 10년동안 반쪽짜리 주석이었지만, 결국 장쩌민에게 두번이나 빅엿을 선사하고, 결국 재집권계획마저 물거품이 되어버리는 커다란 성과를 올리는 쾌거를 올린 것이다. ==== 제2의 천량위 ==== 당연히 보시라이는 이러한 혐의를 부정하기에만 바쁜데다가, 애초에 천량위 떄랑 마찬가지로 너무나도 빼도박도 못한 상황이었고, 결국 3월 8일 원자바오(당시 총리)에게 직접 실명을 거론되면서 맹비난을 받았다. 거기다 원자바오는 문화대혁명이 다시 돌아올 수도 있다는 발언으로 쐐기를 박아넣음으로써, 사실상 보시라이를 완전히 끝장내버렸다. ==== 결과 ==== 후진타오는 끝까지 반쪽짜리 주석신세였다는 점은 변함없었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서 리커창이 차기 주석이 되는 이변이 연출되지 않았을 뿐, 장쩌민에게 두 번이나 치명적인 일격을 먹여 결정적인 순간에 핵심 카드가 줄지어서 낙마하는 사태가 벌어지게 하는 것으로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시진핑이 주석이 될 당시의 배경은 바로 이런 상황이었다. 비록 상무위원 수에서는 공청단은 리커창 단 하나였고 나머지는 상하이방과 태자당 출신들이 독차지하는등, 여전히 장쩌민이 우위에 있는건 변함없었지만, 시진핑 역시 장쩌민의 바지사장 노릇을 하려고 들지 않았고, 이렇게 장쩌민에 대항하기 위해서 이 둘은 각자 서로 손을 잡을 수 밖에 없었다. 후진타오가 즉석에세 시진핑에게 중앙군사위 주석까지도 이양한건 그런 배경 때문이다. 사실 하다못해서 보시라이가 무난히 상무위원으로 안착해서 저우융캉의 뒤를 이어서 정법위 서기가 되었다면, 시진핑으로서는 지금과 같은 강력한 부패척결이라는 명분의 정적숙청은 전혀 불가능했다. 사실 장쩌민이 시진핑을 지명한 것 역시 일단은 중립적인 인사를 내세우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핵심기관인 정법위 서기(후진타오 당시 정법위 서기는 공안부장이 겸직했고, 이 때문에 정법위의 위원인 검찰총장과 대법원장이 공안부장의 휘하에 놓이게 된다. 또한 이 정법위 서기는 정보기관등도 총괄하고 준군사조직인 인민무장경찰의 통수권도 가지고 있기에 사실상 또 다른 권좌나 마찬가지다) 보시라이가 저우융캉의 뒤를 이어서 계승하게 된다면 시진핑 역시도 똑같이 반쪽짜리 주석이 되는거고, 당연히 반부패를 이용한 상하이방 숙청 역시 불가능해지게 된다. 장쩌민이가 이 정법위만큼은 자기의 측근을 앉히고 이 측근을 통해 정법위를 통제함으로서 후진타오를 반쪽짜리 주석으로 만들어버리고 자신은 장막 뒤의 주석으로서 군림한 것이다. 어떻개 됐건 시진핑이 처음부터 강력한 권력을 확보할 수 있었던건 바로 이 보시라이가 낙마한 영향이 가장 크다고 볼 수 있다. 요약: 조무위키에서의 모든 기여는 CC BY-SA 4.0 라이선스로 배포된다는 점을 유의해 주세요(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조무위키:저작권 문서를 읽어주세요). 만약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문서를 저장하지 말아 주세요. 또한, 직접 작성했거나 퍼블릭 도메인과 같은 자유 문서에서 가져왔다는 것을 보증해야 합니다. 저작권이 있는 내용을 허가 없이 저장하지 마세요! 취소 편집 도움말 (새 창에서 열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