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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 2}} {{불쌍}} 임진왜란 당시의 조선군 무장. 본관은 평산이다. [[신립]]이 탄금대에서 패배하고 왜구가 파죽지세로 진격해올때 도원수로 임명된 [[김명원]]과 같이 한강에서 왜구 막으라고 보내졌다. 하지만 당시 남은 군사로는 왜구 막는게 불가능할 정도로 차이가 심했기에 김명원이 임진각으로 후퇴를 결정할때 본인도 갑작스러운 후퇴로 인해 생긴 혼란을 어느정도 수습하고 이양원 등과 함께 양주로 후퇴하였다. 그리고 해유령(지금의 경기도 양주시 백석읍) 근처에서 왜놈 70명을 조지면서 '''왜란 발발 이후 최초의 조선군 승리'''라는 업적을 세운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승리하고 곧바로 장계를 보내지 않았고 그동안 임진강에서 기다리던 김명원은 아무리 기다려도 신각이 오지를 않자 조정에 "신각 그새끼 이양원 따른다면서 튄것 같은데요?"라는 잘못된 상소를 올린다. 그리고 병신같은 [[선조]]놈은 그걸 보고 당장 모가지 잘라버리라고 명하고 결국 목잘려서 죽음. 사실 김명원의 상소가 올라온지 얼마 후에 제대로 된 승전보가 올라와서 뒤늦게 명령 취소하려고 했는데 이미 죽은지 오래였다. 하여간 선조놈의 병신력에는 박수를 보낼 수밖에 없다. 이 사람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 조헌의 권유대로 연안성을 수리하였는데 왜란 당시 이정암이 500명의 의병으로 막을 수 있게 도움을 주어 크게 승리 할 수 있었고, 구로다 나가마사의 3군이 연백평야의 곡식을 취하지 못하게 하여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하게 하였다. 당시 일본은 현지조달을 통한 보급에 상당히 의존하고 있었다. 참고로 김명원은 저 사건 이후 양심의 가책이 컸는지 훗날 선조가 [[이순신]]을 조져버릴려고 작정했을때도 끝까지 찬성하지 않았고 이순신 구명에 힘썼다. 물론, 김명원은 이 사건이 영향을 끼쳐서 도원수 짤리고 후임 도원수로는 [[행주대첩]]으로 진짜 제대로 된 군공을 세운 [[권율]]이 부임하게 된다. [[분류:임진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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