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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규모 신라해적단, 단순한 해적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당시 신라해적의 규모는 구체적으로 얼마나 될까. 신라 배들의 한 척당 승선 인원을 토대로 대마도를 침공했던 신라해적의 총 병력을 추정해볼 수 있다. 당시 신라선에는 약 20~25명이 승선했다는 연구기록이 있다. 대마도를 침공했던 신라해적선은 모두 45척, 병력은 약 900~1000여 명이이었으며, 천여 명의 무장세력은 단순한 해적의 수준을 능가하는 대부대였다. 이전에도 소규모 신라해적들이 대마도와 큐슈의 해안마을을 습격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하지만 천여 명의 대규모 침공은 유례가 없는 일. 실제로 9세기까지 고대 일본은 한 번도 대규모 외적의 침입을 받은 적이 없으며, 신라해적 입장에서는 이날의 침공은 새로운 시도로 볼 수 있다. “모두 302명을 사살했는데 중대장 3명, 부장 12명이었고 손에 넣은 물건 중에 대장군 깃발도 있었다” <부상략기 中> 해적단이 단순한 백성이나 민초들로 구성 됐다면 대장군과 부장군 같은 계급을 조직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러한 대장군, 부장군의 명칭이 등장한다는 것은 이들이 오합지졸 해적 무리가 아니라 규모가 있는 조직이었으며, 게다가 군사지식이 있는 사람이 조직한 부대라는 방증이 아닐 수 없다. 조사를 받은 포로 현춘은 자신들의 근거지에 1백 척의 배와 2천5백의 군사가 있다고 진술했으며, 이는 단순한 해적의 규모를 훨씬 능가한다. 이 정도의 규모라면 궁예의 명령을 받은 왕건이 나주를 공격할 때의 수준으로 894년 신라해적은 상당한 규모를 갖춘 군대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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