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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향 == 고려 전기 일본과의 수교에서 상당히 어려움을 겪었다. 이미 신라구가 [[규슈]] 지방까지 노략질을 해서 [[반한]]감정이 극에 달해있던 상황이었다. 거기서 생겨난 [[고려]]라는 똑같이 생긴놈들이 갑자기 불쑥 찾아와서 교역하자고 하면 누가 교역하겠냐 실제로 태조 20년(937년)부터 수차례 교역을 하기 위해 국첩을 보냈으나 번번히 거절당했고 심지어 고려 해적이 대마도와 이키, 비젠([[오카야마 현]])을 박살내고 교토까지 쳐들어온다는 찌라시까지 돌아서 더더욱 일본의 고려에 대한 적대심은 강해졌다. 하지만 이는 고려 해적이 아니고 "도이"라고 하는 [[여진]]족 해적들이었다. 그런데 이놈들이 서일본을 작살내고<ref>일본 기록상으로는 사망자 365명, 납치된 자는 1,289명, 소와 말이 380필, 가옥 45동 이상이 손실을 입었다고 한다.</ref> 포로들과 노획품들을 잔뜩 실고 자기들 나라로 돌아가는 와중에 고려에도 잠깐 들러서 노략질을 하는데 고려 수군에 의해서 완전히 격파당하고 오히려 일본에서 획득한 노획품과 포로들까지 모조리 압수당한다. 고려는 일본인 포로들이 딱히 필요없었으므로 전원 일본 본국으로 돌려보낸다. 이때 송환시킨 포로들이 <고려사>에 따르면 259명이라고 한다. 이때부터 일본은 조금씩 고려에 마음의 문을 열게 되고 한참 이후지만 정상적인 교류를 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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