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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승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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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그레, 한화 이글스 생활== 1985년 늦가을. 스스로 구단을 나온 뒤 그는 일본생활을 청산하고 무려 34년만에 조국 대한민국의 땅을 밟았다. 그가 한국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에 대한민국이 듫끓었으며, 전두환 당시 대통령도 그에게 환영사를 전했다. 이듬해 그는 고향팀 빙그레 이글스에 입단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플레잉코치를 자처하며 갓 신생팀이 된 빙그레에 힘을 실어주었다. ===1985년=== 꿈에도 그리던 한국프로야구 첫 시즌. 그는 보직을 원포인트 릴리프로 바꾸어서 주로 강타자들을 상대했다. 원포인트 만으로도 충분히 뛰어난 성적을 거두며 성공적인 조국에서의 첫 시즌을 마쳤다. 또한 이 해에 그는 또다른 역사적인 투수 [[장민재]], [[송창식]]과 한 팀에서 만나게된다. 이 때 안승민 옹은 자기 등번호 No.21번을 후배에게 맡긴다는 이유로 다른 등번호를 선택했다. No.15 후일, 송진우는 안승민 옹의 No.21번을 골라 영구결번을 드셨다. 이에 안승민 옹은 자기 등번호를 물려받은 선수가 영구결번을 받은 것에 대하여 매우 기뻐하셨다. ===1986~1989년=== 해태의 4년연속 우승을 멀리서 지켜봐야했지만, 그는 이 기간동안 중간계투로써 4년 통산 0.05라는 경이적인 방어율로 빙그레의 핵심 불펜투수로 거듭났다. 선동열, 최동원도 그의 투구를 보고 많이 배웠다고한다. ===1990~1991년=== 2년연속 무실점을 하며 한국 프로야구 사상 최강의 철벽계투가 되셨다. 한때는 그가 몸을 풀면 타팀팬들이 경기도중 집단으로 경기장을 빠져나가는 웃지못할 일도 종종 벌어졌다고 한다. 그의 엄청난 공은 그 누구도 쳐 내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1992년=== 마무리 투수 보직을 맡으며 25세이브를 달성하셨다. 처음으로 한국시리즈 우승을 일궈 낼 기회였으나 그는 안타깝게도 시즌 막바지에 불의의 안전사고를 당하며 다리에 부상을 입고만다. 결국 한국시리즈 엔트리에 들지 못했고 롯데의 우승을 씁쓸히 지켜봐야만했다. 이 시즌 중간계투로의 성적은 3승 0패 10홀드 25세이브 평균자책점 0.85 ===1993~1998년=== 93년도에 팀명이 한화로 바뀌었다. 다리쪽의 부상여파가 컸는지 그는 매 시즌 많은 이닝을 소화하지 못했다. 그러나 확실하게 막을 이닝은 확실히 막아주며 여전히 팀에겐 소금같은 존재였다. ===1999년=== 이 시즌 그는 [[구대성]] 앞에 등판하는 필승조로 한화의 허리를 맡으며 35홀드를 달성하는 등 대활약하며 팀을 한국시리즈로 이끌었고 한국시리즈에서 롯데를 상대로 92년도의 아픔을 그대로 갚아주면서 한국프로야구 시리즈 첫 우승의 기쁨을 누렸다. 1999 시즌 최종 성적은 7승 0패 35홀드 평균자책점 0.79 "자랑스러운 내 조국의 프로리그에서 우승을 하니 그 기쁨은 이루 말로 표현 할 수가 없다." -우승 당시 인터뷰 中 ===2000~2005년=== 이 기간 동안 그는 선수로는 거의 뛰지 않았고 코치로써의 역할에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조국에서 우승을 하겠다는 목표를 달성했다. 이제는 내가 직접 뛰는것보다 후배들에게 내 경험을 전수하면서 그 후배들이 왕조를 세우게 할 것." -2002년 당시 인터뷰 中 그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멘토링으로 [[송진우]]는 한화의 선발투수들 중 가장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2006년=== 한화가 한국시리즈까지 올라오자, 이제껏 어깨를 아끼고 있었던 안승민이 직접 나서서 등판하는 등 투혼을 불살렸지만 삼성에게 아쉽게 패배하며 준우승에 그친다. ===2007년=== 니시테쓰 시절 가장 친했던 투수인 이나오 가즈히사가 지병을 앓다 세상을 떴다는 비보에 그는 커다란 충격을 받고만다. 국적을 초월한 절친의 죽음으로 인한 정신적 충격으로 그는 한 시즌을 통째로 쉬게된다. ===2008~2009년=== 정신적 충격을 극복하고, 2008시즌에 복귀한 안승민 옹은 2군 투수육성 코치로써 역할하며 한화의 투수들을 키워낸다. ===2010년=== 2010년, [[한대화]]감독이 새로 부임하자, 그는 다시 1군 무대에 모습을 드러낸다. 한대화 감독은 안승민 옹을 다시 선발투수로 쓰겠다고 밝혔고, 안승민 옹도 선발투수 자원이 타 팀에 비하여 부족한 한화의 현실에 수긍하고 2군 투수육성 코치 생활을 접고 온전한 선수로 다시 돌아와 한화의 선발투수로 뛰게된다. 그는 엄청난 노쇠화로 이제 전성기 때의 구속이 더 이상 나오지 않았지만, 이제껏 쌓아 온 100년의 관록이 묻어나는 노련한 피칭으로 한국 프로야구 타자들을 상대했다. 그의 노련함에 특히 [[롯데 자이언츠]] 타선이 힘을 못 썼다고 한다. 2010년 시즌 최종 성적은 9승 3패 평균자책점 3.01 ===2011년=== 한화에서의 첫 선발투수 풀타임 시즌을 맞이했으나 세월은 그를 거스룰 수 없었다. 특히 한화의 타선과 수비가 안승민 옹을 도와주지 못함으로서 그는 7승 9패 평균자책점 5.89으로 2011 시즌을 마무리하셨다. ===2012년=== 시즌 초반에는 선발등판을 하였으나 너무 노쇠화가 진행된 몸에 무리가 와 평균 5이닝 이상을 던지지 못하였다. 이런 그를 본 [[한대화]] 감독은 안승민 옹의 보직을 마무리투수로 변경하였다. 결국 그는 한화의 마무리투수가 되어 수호신으로 거듭나게 된다. 이때 그는 팀 동료 박찬호에게 좋은 대선배였다고 한다. 2012년 시즌 최종 성적은 2승 5패 22세이브 평균자책점 1.55 ===2013년=== 너무 노쇠화가 진행되었는지 시즌을 정상적으로 소화하시지 못하셨다. 옛 눈에 상처가 있어 백내장을 앎은 사실이 드러나서, 수술을 두 차례 받으셨다. 그러나 그는 더욱 강인한 몸을 만들어 노쇠화를 극복하겠다며 시즌 종료 후 군입대를 하셨다. 그는 구한 말 대한제국군 이후 무려 110여 년 만에 재입대를 하셨다. 2014년 기준, 고손자뻘인 동기들과 잘 지내고 있다고 한다. 그들 중 한 명은 자신의 고조할아버지가 안승민옹을 보고 일본 앞잡이질을 그만두고 독립운동가가 되어 순국하셨다고... 이것만 봐도 안승민옹은 한국 근현대사에 한 획을 그은 위인임이 분명하다. ===2014년~2018년=== 군복무를 마친 안승민옹은 다시 고향팀 한화로 복귀하여 그동안의 관록으로 퓨처스리그에서 후배들 육성에 힘을 쏟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2015년 2차 1라운드로 한화에 입단하여 데뷔 7년차에 14승을 거둔 한화의 토종 에이스 김민우가 안승민옹이 키운 대표적인 선수이다. 이후 2018년, 데뷔 113년차가 된 안승민옹. 그는 이제 자신이 야구로 해볼 수 있는 일은 다 한것 같다는 입장을 밝히며 마침내 프로야구 은퇴를 선언하셨다. 그의 등번호 61번은 한화뿐만 아니라 KBO 명예영구결번이 되었으며 그가 은퇴하는 날, 150만 대전시민이 환호하며 그의 마지막 길을 밝혔다. 여담으로 안승민 옹의 은퇴식 1시간전, 갑자기 대전구장에 예정에 없던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안승민 옹은 내리는 비를 보며 감정에 젖었는지 눈물을 글썽이었다. 근현대사와 한국 야구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인만큼 그의 은퇴는 KBS, MBC, SBS 3사 9시 메인뉴스로 보도하였으며 그의 은퇴식을 프로야구 최초로 실시간 공중파 3사 중계하였다. 특히 그의 은퇴식에는 프로야구 인사와, 여러 정재계 인사를 포함한 대한민국 1%가 다 모여서 안승민 옹을 격려하였다.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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