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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일본과 명나라 간의 관계는 무로막치 막부 시절부터 매우 좋지 않았다. 이와 같은 냉기류 상태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동아시아의 중화질서에 도전]]까지 한 바람에 양국간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도요토미 정권의 뒤를 이은 도쿠가와 정권은 중국과의 관계 침체를 타개하기 위해 사신단을 꾸렸으나 명나라의 황제인 만력제에게 퇴짜만 맞았다. 이 사건으로부터 10년이 지난후 명나라가 대내외적으로 위기에 처하자 이번엔 명나라측에서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여 관계정상화를 타진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도쿠가와 막부가 명나라 사신을 퇴짜놓았다. 도쿠가와 막부로서는 명나라로부터 엿을 먹은 이후의 그간의 10년 사이에 각기 다른 수단을 이용하여 관계를 터놓은 류큐와 조선이라는 채널을 활용하여 중국과의 간접교류를 할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굳이 제후국을 자처하면서까지 명나라와 외교관계를 수립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일본과 중국간 관계는 근대시대까지 영구히 단절되었으며 이와 같은 관계단절 상태는 중국의 정권이 청나라로 넘어간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그렇지만 민간분야에서의 대중국 교류는 에도 시대에 활기를 띄게 되는데, 이는 청나라가 발전을 이루어 인물이 번창하여 화폐수요가 급증함에 따라 세계구급 귀금속 산지인 일본과의 무역수요가 중국 내에서 대두함에 그 원인이 있다. 흔히 나가사키 데지마 때문에 일본의 대외무역 주 거래처는 네덜란드인 것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청나라가 에도시대 일본 제일의 무역대상국이었다.<ref>에도막부가 청나라와 네덜란드에 할당한 공무역량은 각기 6,000관과 3,000관으로 2배 차이였다. 하지만 할당제도가 엄격히 지켜진 건 아니기 때문에 실제 무역량은 해마다 변동되었다.</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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