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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외 확장 == === 류큐 === [[파일:Sho Nei.jpg|200px|thumb|right|류큐국 국왕 쇼네이(재위기간 1589-1620)]] '''[[류큐]] 왕국'''은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중개무역을 통해 성장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동아시아의 양강인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 류큐 왕국은 명나라의 조공국이었으나 무로마치 막부에도 조공 사절을 보내 관계개선을 꾀한 바 있다. 그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실상 강요한 조선 침공에 극히 소극적으로 임하면서 류큐와 일본 간 관계는 험악해지기 시작하였다. 당시 류큐를 통치하고 있던 쇼네이 왕은 사츠마의 시마즈 가문으로부터 새로이 수립된 에도 막부에 복속될 것을 요청받았으나 이를 거절했다. 얼마 후인 1602년에 류큐의 선박이 센다이에 표류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류큐 선원들을 이듬해인 1603년에 류큐로 돌려보냈고, 사츠마는 이를 계기로 류큐 측에 선원들을 송환한데 대한 사은사(謝恩使)를 보낼것을 요구하였으나 쇼네이 왕은 이를 묵살하였다. 일본 국내상황이 정리되자 막부는 사츠마를 통해 류큐를 정벌할 계획을 세웠다. 이 정보를 입수한 시마즈 측은 다시금 류큐를 에도에 복속시키기 위해 물밑작업을 벌였으나 나하의 쇼네이 왕과 류큐의 삼사관들로부터 조롱만 당하고 말았다. 결국 막부로부터 류큐를 정벌하라는 명이 사츠마 번에 떨어졌고, 사츠마는 류큐 정벌에 착수하여 개전 한달만에 류큐 왕국의 수도인 나하를 장악하였고, 류큐 왕국은 사츠마 번에 항복하고 만다. 쇼네이 왕은 에도로 압송되어 쇼군을 알현한 뒤 사츠마 번의 수도인 카고시마에서 시마즈에 복속될 것을 서약하였으며, 사츠마에 아마미 섬을 할양하였다. 이로 인해 류큐는 일본의 속국이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류큐는 중국의 속국이기도 하였으며, 명나라의 뒤를 이은 청나라와도 속국 관계를 맺었다. 일본은 류큐의 이와 같은 상태를 유지하여 중국 문물의 수입경로 중 하나로 삼았다. 류큐 왕국은 에도 시대 일본의 주요 설탕 공급지 중 하나로 자리잡게 된다. 일본 본토의 상업이 활성화됨에 따라 설탕 수요가 증가하였고 류큐는 일본의 세력권 하에 있는 지역들 중 설탕 재배에 가장 좋은 자연조건을 갖췄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류큐의 농토가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으로 탈바꿈되어 현지민들은 혹독한 설탕생산노역(서인도제도의 그것과 비슷한)에 시달리게 된다. === 대만 === 과거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대만 섬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조선 및 중국과 더불어 정벌대상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일으킨 임진왜란의 여파로 중국과의 무역이 단절되었고 이는 일본의 경제와 금수저들의 취미생활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히데요시의 뒤를 이은 에도 막부는 이와 같은 현상을 타개하고자 하였고 같은 맥락에서 당시 막부의 위정자들은 대만이라는 섬에 주목하였다. 대만은 일본과 중국, 그리고 동남아시아에 멀티를 건설한 유럽 세력의 중간에 위치한 교통상의 요지였기 때문에 무역기지로서의 포텐셜이 있는 땅이었던데다 당시 대만엔 중국의 세력이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당시 중국은 명 말기로, 본진 지키기에 급급한 상황이었다.) 막부는 1609년 아리마 하루노부를 대장으로 하는 대만 탐험대를 꾸렸다. 이 탐험대는 대만 원주민의 공격을 받아 피해를 입긴 하였으나 대만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귀환하였다. 1616년, 막부는 4000명의 병력과 13척의 대형 선박으로 구성된 정벌대를 편성하였고 같은 해에 이들은 나가사키에서 출항하여 대만을 향하였다. 막부는 이들을 통해 대만의 상륙가능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입수하고 무역전초기지를 설립코자 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항해 도중 폭풍을 만나 치명적인 손실을 입어 궤멸되었다. 13척의 선박 중 겨우 1척의 선박만이 대만의 해안에 당도하였고, 이들마저도 대만 원주민들의 공격을 버틸수가 없었기 때문에 결국 회항하였다. 결국 막부의 대만 개척시도는 충격적인 실패로 귀결되었고, 이를 계기로 에도 막부는 대만에서 영원히 손을 떼게 된다. === 에조치([[홋카이도]]) === [[파일:에도시대 북방식민지.jpg|250px|thumb|right|에도시대 홋카이도 및 부속도서]] 에도시대 '''에조치(蝦夷地)'''는 일본 문화에 동화되지 않은 '외부 세계'였다. '에조'는 [[아이누]]를 가리키는 '''멸칭'''이다. 아이누 들은 홋카이도의 남서부에 밀집해 있는 일본인 집단정착지역(和人地)에 자신들의 토산품을 들고와 일본인들이 생산한 물품으로 바꿔가곤 하였다. 당시 일본의 행정력은 에조치의 일부 지역에만 미쳤지만, 에도 막부는 에조치를 일본의 종속지역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바꿔 말해 에도 시대 에조치는 류큐와 거의 같은 포지션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8세기부터 이양선들이 에조치 부근에 출몰, 특히 러시아인들이 아이누를 포섭하고 있다는 의혹이 일본 사회 내에서 제기되자 막부는 홋카이도는 물론, 인접 지역인 사할린(일본명 카라후토)과 쿠릴 열도(일본명 치시마 열도)에까지 탐험대를 보내 이 지역들의 일본 귀속을 공고히 하고자 하였다. 에도시대 중기까지 북방의 러시아 제국은 시베리아의 거의 대부분 지역들을 접수하였고 협소한 해협을 두고 일본 세력과 러시아 세력이 마주하게 되어, 러시아인들이 사할린이나 쿠릴에 접근하는 일이 빈번히 일어나게 되었다. 이에 막부 측은 관군을 출동시켜 로스케들을 쫓아내는 등의 강경대응을 하였고 북방영토 각지에 일본영토라는 표식을 세웠다. 에도 막부 하의 일본과 러시아의 국경분쟁은 1855년에 체결된 시모다 조약으로 종결되었다. 이 조약으로 사할린 섬은 러시아가 차지하게 되었고, 반대급부로 일본은 쿠릴 열도 전역을 영유하게 되었다. 여담으로 정확히 50년 후인 1905년 포츠머스 조약으로 사할린 섬 남부의 영유권이 일본으로 넘어갔으나 또 그로부터 정확히 40년 후인 1945년에 소련이 사할린과 쿠릴 열도 전역을 다쳐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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