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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업&제련업=== 전국시대 일본은 이미 유럽에 귀금속의 나라로 알려져 있었다. 16세기 전기에 조선 혹은 중국과의 무역을 통해 광석 제련기술인 회취법(灰吹法 <I>하이후키호</I>)를 전수받은 하카타의 상인 일행들이 이와미 은산(石見銀山)개발에 성공하였다. 이와미 은산은 당시 전세계 은 생산량의 1/3을 담당하였고, 이는 이 지역을 지배하고 있는 세력의 두둑한 돈줄이 되었다. 이와미 은산 이외에도 여러 중소규모의 금광,은광들이 일본 각지에 산포되어 있었고, 이들은 전국시대 일본 영주들의 주요 군자금 출처가 되었다. 막강한 세력을 보유한 다이묘들은 최소 하나 이상의 은,금광은 보유하고 있었고,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와미 은산 관리를 통해 막대한 부를 거머쥐기도 하였다. 이와미 은산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막부직할령으로 지정되었다. 초기 에도 막부는 이와미 은산에서 산출되는 막대한 양의 은을 주요 교역품으로 삼아서 대외무역을 활발하게 전개해나갔다. 17세기 초중엽 일본은 전 세계의 은 산출량의 30~40%를 점해 스페인의 남미 식민지인 누에바 에스파냐에 비해도 그리 꿀리지 않는 수준이었다. 일본의 귀금속은 대부분이 이웃해 있는 귀금속 블랙홀인 중국에 수출되었다. 그러나 17세기 말기에 이르러 일본 내 귀금속의 부존량이 바닥을 찍게 되면서 일본의 광업은 귀금속 광업 중심에서 구리 광업 중심으로 무게추가 옮겨가게 되었다. 구리 광업이 활발해지면서 막부의 후원을 받는 오사카의 구리제련업 나카마(仲間 / 일종의 길드)가 일본에서 콧방귀 좀 뀌고 다니게 된다. 당시 오사카의 구리제련업자들은 유럽으로부터 전래된 고급기술인 남만취법(南蠻吹法 <I>난반부키호</I>)을 독점하고 있었고 이를 통해 막대한 수익을 얻는 한편, 나카마 결성을 통해 외부로의 기술유출을 철통같이 방어하였다. 이로 인해 당분간 일본 각지에서 회취법을 이용하여 생산된 황동(荒銅)이 오사카로 운송되어 이곳에서 정동(精銅)으로 제련되었고, 이 정동이 다시 일본 각지의 소비시장과 해외에 수출하기 위해 나가사키 항으로 반출되었다. 황동을 정동으로 제련하는 과정에서 황동에 함유되어 있는 소량의 금이나 은을 추가로 획득할 수 있다. 나카마는 이 제련과정에서 추출되는 귀금속을 추가로 횡령하여 부수적인 수입기반으로 삼았다. 그러나 일본 내 구리생산량이 감소가 오사카의 구리제련업 수요 위축을 불러일으키자 나카마 사이에서 내분현상이 발생하였고, 결국 일부 오사카의 구리제련업자들이 이를 타개하기 위한 활로를 모색하기 위해 구리생산지로 이동함에 따라 19세기 초엽에 오사카의 구리제련업 독점은 무너지게 되었다. 광산업은 막부 직할령 및 각 제번의 상업에도 파급효과를 미쳤다. 새로 개발된 광산에는 일본 전역에서 한 밑천 챙기려는 제련업자들과 날품팔이꾼들이 몰려들었고 이들이 모여 광산촌이 형성되었다. 광산촌은 일반 농촌에 비해 소득수준이 높아 구매력이 상당했고 큰 광산촌의 경우 인구가 만 단위를 넘기기도 하는등 규모도 컸기 때문에 이들의 상업적 수요를 맞추기 위해 소매상인이나 이발사, 매춘부 등 서비스업자들도 광산촌에 가세하였다. 막부나 제번은 광산촌으로 운반되는 상품들에 통관세를 매겨 짭짤한 조세수익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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