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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분사회== ===무사=== 무사들은 여전히 지배계급이었으나, 과거처럼 지나가는 평민을 마음대로 일본도로 베어 죽이는 만화에나 나올법한 행동은 죽고싶은게 아닌이상 못 했다. 사실 전국시대에도 이러지는 못했다. 조선시대 양반들이 여종들을 마음껏 따먹었을 거란 것과 같은 수준의 루머이고 망상 이는 평화기에 접어들어 과거 전국시대에 비해 무사의 사회적 필요성은 줄어든 반면, 생산계층의 사회적 필요성은 상대적으로 증대된 사회변화가 반영된 것이다. 에도시대의 법전인 공서방어정서(公事方御定書 <I>쿠지카타오사다메가키</I>)에 의하면 키리스테고멘(切捨御免 / 무사가 무례한 자를 베는행위)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키리스테고멘의 대상이 된 평민이 무사에게 위해를 가하려고 한 정황이 입증되어야 했다. 그러나 대개 평민을 벤 무사는 할복형에 쳐해졌는데 이는 이를 입증하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당시 무사사회에서는 칼을 함부러 쓰는 행위 자체를 일종의 수치로 여겼기 때문이다. 게다가 평민에게 조롱을 당한것 그 자체도 무사들 사이에서는 수치로 여겨졌기 때문에 그냥 지나가던 미친놈에게 욕을 얻어먹은것만으로도 할복을 한 무사들도 가끔 있었을 정도이다. 이렇다보니 에도시대에는 오히려 지배층인 무사들이 평민을 피해다니는 진풍경이 연출되기도 했었다. 평화시대에 이르러 사무라이들의 본 스킬인 싸움질은 사실상 무쓸모가 되었고, 재능충 사무라이들은 붓을 들고 막부나 번에서 공무원으로 활약하게 된다. 그러나 사무라이 인구 수에 비하면 공직의 수는 적었기에 대다수의 하급 사무라이들은 쥐꼬리만한 연공으로 가난하게 살 수 밖에 없었다. 이 시기 무사들은 무사도에 정신적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하였다. 전국시대 사무라이들에게 있어서 싸움은 일상이었지만, 이 시대 사무라이들은 전쟁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기 때문에 칼질이 일종의 로망이 된 것이다. 이 시기에 정립된 오리지널 사무라이와는 별 관계없는 무사도는 현대시대에도 사무라이의 이미지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평민=== ====도시민==== 도시산업인 상업과 공업이 발전함에 따라 신흥상공인들인 죠닌(城人)계층이 성장하였고, 이들이 문화적 취향에 눈뜨게 됨에 따라 서민문화가 탄생하기도 하였는데, 우키요에, 카부키, 조루리(인형극) 등이 대표적인 그것이다. 에도시대 초기인 17세기까지만 해도 죠닌들은 사무라이 계층과 엄격히 분리된 생활을 영유하였고, 정치적인 권한은 전혀 없었다. 도시의 시민들은 기본적인 자치권마저도 보장받지 못하였다. 죠닌이 축적한 재산은 언제든지 막부나 다이묘 등에 의해 몰수될 수가 있었기에 죠닌들은 높으신 분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노오오오력해야만 했다. 그러나 18세기에 들어 문치주의가 확립되면서 서민들에 대한 지배계층의 일방적인 태도는 전례없이 누그러졌다. 이 시기부터 죠닌들이 사무라이와 함께 겸상하며 담화를 나누는 것은 쉽게 볼 수 있는 광경이 되었다. 이는 일본에서 학문을 중시하는 풍조가 자리잡았고 따라서 아무리 사무라이라고 할 지언정 학식있는 죠닌들을 업신여기기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죠닌들은 여전히 정치적 권리를 부여받지는 못하였으나, 막부의 고위인사와의 친목질과 로비 등으로 간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통로를 얻게 되었다. 반면 농촌에서 도시로 유입되는 인구도 증가했다. 농촌에서 수전(水田)이 보급되고 이앙법이 확산됨에 따라 일손수요가 줄어들었고, 이에 잉여인간이 된 농촌의 청년들이 도시로 유입되었다. 1700년경 일본의 도시화율은 약 12%로, 이웃해 있는 중국에 비해 3배, 조선에 비해 5배 높은 수치를 보였다. 당시 도시로 유입된 독신청년들은 3일만 날품을 팔아도 한 달 먹고사는데 별 지장이 없었다고 한다. 청년들이 도시로 대거 유입됨에 따라 일본의 도시들은 남초현상이 심각해졌다. 이로 인해 욕구불만에 사로잡힌 청년들이 대거 양산되었고, 이는 선비스럽지 못한 방향으로 분출되어 일본의 풍속업의 발전(?)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당시 일본의 어지간한 도시들은 모두 유곽과 목욕시설들을 갖추고 있었다. 일본의 유곽들 중 가장 유명한 것은 17세기 초 막부가 도시계획의 일환으로 에도의 매춘부들을 수용한 매춘지구인 요시와라(吉原)이다. 에도는 거대도시인만큼 요시와라는 그 규모에 있어서 최대였다. 한때 요시와라에는 일본 전국에서 모인 3000명에 이르는 매춘부들이 존재했다고 한다. 이러한 유곽들은 고위관료로부터 도시 하층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의 욕구를 해소해 주는 통로가 되었다. ====촌민====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카타나가리(刀狩 "칼 사냥")를 시행하여 농민들이 소유하고 있는 무기를 몰수하였고, 도쿠가와 가문 또한 이 정책을 계승하여 농민과 무사를 철저히 분리하였다. 막부는 농민에 대한 통제를 보다 더 원활히 하기 위해 고닌구미(五人組)에 편성하였고, 농촌의 대장인 햐쿠쇼다이(百姓代)로 하여금 이들을 관할하게 하였다. 고닌구미는 막번에 의해 설치된 일종의 계층 내 분열용 장치였다. 고닌구미는 일종의 운명공동체로, 연대의무, 연대책임을 졌고 구성원의 실책에 대한 처벌들을 함께 받았기 때문에 고닌구미에 배치된 이들은 늘 다른 소속원들을 서로 감시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일본 특유의 민폐끼치기를 꺼리는 문화(迷惑 ''메이와쿠'')도 이 고닌구미의 전통에서 파생된 사회문화이다. 다만 고닌구미 제도는 농촌사회에 결속력 강화라는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하였다. ====잇키(一揆)==== 초기 막부의 폭정은 농민계층의 불만을 사 잇키(一揆)라는 집단무장봉기가 일어나는 원인이 되었다. 막부는 쿠죠 잇키와 조쿄 소동으로 홍역을 치른 바 있으며, 기독교 탄압으로 일어난 잇키인 시마바라의 난은 네덜란드 선단의 화포지원까지 받아서 겨우 진압하였다. 문치기 막부의 위정자들은 이에 대해 보다 더 '문화적인' 측면에서 접근하였고 백성들의 직소를 받아들이기 위해 메야스바코(目安箱)라는 투서함을 설치하는 한편, 양생소(養生所)를 설립하여 구빈활동과 빈민 직업훈련 등을 실시하는 등 문리적으로 이에 대응하였다. 그러나 잇키는 줄어들지 않았고, 오히려 19세기에 이르면 이의 건수는 이전 시대에 비해 증가한다. 잇키에 대한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에도시대 초기의 잇키는 주로 먹고살기 힘들어서 일어나는 생계형 잇키였으나, 후기의 잇키는 지배층에 대항해 평민들이 그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형태의 잇키가 주를 이루었다고 한다. 즉, 막부는 평민들의 먹고사는 문제에만 집중했을 뿐 평민들의 권리신장욕구에 대해서는 여전히 압제로 일관함으로써 이들의 잇키를 초래했을 뿐만 아니라 이들의 막부에 대한 지지조차 잃어버렸고, 이는 막부 멸망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잇키는 막부 멸망 후 메이지 시대에 민권운동으로 진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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