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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민==== 도시산업인 상업과 공업이 발전함에 따라 신흥상공인들인 죠닌(城人)계층이 성장하였고, 이들이 문화적 취향에 눈뜨게 됨에 따라 서민문화가 탄생하기도 하였는데, 우키요에, 카부키, 조루리(인형극) 등이 대표적인 그것이다. 에도시대 초기인 17세기까지만 해도 죠닌들은 사무라이 계층과 엄격히 분리된 생활을 영유하였고, 정치적인 권한은 전혀 없었다. 도시의 시민들은 기본적인 자치권마저도 보장받지 못하였다. 죠닌이 축적한 재산은 언제든지 막부나 다이묘 등에 의해 몰수될 수가 있었기에 죠닌들은 높으신 분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노오오오력해야만 했다. 그러나 18세기에 들어 문치주의가 확립되면서 서민들에 대한 지배계층의 일방적인 태도는 전례없이 누그러졌다. 이 시기부터 죠닌들이 사무라이와 함께 겸상하며 담화를 나누는 것은 쉽게 볼 수 있는 광경이 되었다. 이는 일본에서 학문을 중시하는 풍조가 자리잡았고 따라서 아무리 사무라이라고 할 지언정 학식있는 죠닌들을 업신여기기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죠닌들은 여전히 정치적 권리를 부여받지는 못하였으나, 막부의 고위인사와의 친목질과 로비 등으로 간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통로를 얻게 되었다. 반면 농촌에서 도시로 유입되는 인구도 증가했다. 농촌에서 수전(水田)이 보급되고 이앙법이 확산됨에 따라 일손수요가 줄어들었고, 이에 잉여인간이 된 농촌의 청년들이 도시로 유입되었다. 1700년경 일본의 도시화율은 약 12%로, 이웃해 있는 중국에 비해 3배, 조선에 비해 5배 높은 수치를 보였다. 당시 도시로 유입된 독신청년들은 3일만 날품을 팔아도 한 달 먹고사는데 별 지장이 없었다고 한다. 청년들이 도시로 대거 유입됨에 따라 일본의 도시들은 남초현상이 심각해졌다. 이로 인해 욕구불만에 사로잡힌 청년들이 대거 양산되었고, 이는 선비스럽지 못한 방향으로 분출되어 일본의 풍속업의 발전(?)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당시 일본의 어지간한 도시들은 모두 유곽과 목욕시설들을 갖추고 있었다. 일본의 유곽들 중 가장 유명한 것은 17세기 초 막부가 도시계획의 일환으로 에도의 매춘부들을 수용한 매춘지구인 요시와라(吉原)이다. 에도는 거대도시인만큼 요시와라는 그 규모에 있어서 최대였다. 한때 요시와라에는 일본 전국에서 모인 3000명에 이르는 매춘부들이 존재했다고 한다. 이러한 유곽들은 고위관료로부터 도시 하층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의 욕구를 해소해 주는 통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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