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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몰락 == 1808년 영국 해군의 HMS Phaeton함이 나가사키에서 깽판을 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당시 네덜란드는 프랑스 제국의 위성국가인 바타비아 공화국의 통치 하에 있었고, 영국은 대나폴레옹 동맹의 일원이었기 때문이다. 페이톤 함은 네덜란드 상관원들을 납치하고 데지마에서 수색작전에 돌입하였다. 그러는 한편 일본 나가사키 봉행측에게 물과 식량을 내놓을 것을 요구하였으며 이를 이행치 않을경우 일본 선박을 모조리 불태워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당시 나가사키 봉행이었던 마츠다이라 야스히데는 페이톤 함을 불태워버리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이에 실패하고 결국 페이톤 함의 요구조건들을 수락했으며 본인은 이의 책임을 지고 할복하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인해 양이선에 대한 불안감이 일본 사회에 스며들기 시작하였다. 19세기 산업혁명으로 인해 고래기름의 수요가 늘어나면서 일본 근해에 서양 선박이 출몰하는 일이 빈번해졌다. 일본의 태평양 연안은 고래가 많이 출몰하는 해역이기 때문이다. 1824년 영국의 포경선이 막부의 앞마당인 미토 번에 출몰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1825년 막부는 이양선 출몰로 인한 사회적 불안감을 억제하기 위해 일본 근해에 출몰한 이국선을 무력으로 쫓아내는 것을 골자로 하는 이국선타불령(異国船打払令)을 제정하게 된다. 이 법에 따라 일본 전국에 다이바(台場)라고 불리는 연안포대가 축조되었고 해방론자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게 되었다. [[파일:Daiba.jpg|thumb|300px|right|도쿄의 다이바. 오다이바(お台場)라는 지명은 여기서 유래.]] 그러나 1839년 영국 동인도회사 함대에 의한 아편전쟁이 발발하면서 이양선에 대한 공포감은 한 층 더 격화되게 되었다. 재미있게도 당사자인 중국이나 중화세계의 제1모범생 조선은 아편전쟁에 대해 무덤덤한 반응을 보인 반면 유독 일본이 이에 대한 경계태세를 보였다. 일본인들은 일본 근해에 접근한 이국선을 공격한다고 해서 그들을 정말로 격퇴할 수 있는지 의구심을 갖게 되었고, 1842년 미국 상선을 영국 군함으로 오폭하는 사건을 계기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짐에 따라 이국선타불령은 폐지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네덜란드 이외의 다른 서양세력에 대한 쇄국체제는 한 동안 유지되었고, 일본은 내부단속에 더 열을 올리게 되었다. 1853년, 막부는 네덜란드 상관을 통해 미국의 페리 함선이 미국 동해안을 출발하여 동아시아 방면으로 향하고 있고 그 함대가 일본을 목적지로 할 공산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그러나 당시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요시의 건강상태가 안 좋은데다가 쓸데없는 이국선내항정보를 기정사실화했다간 사회 혼란만 부추길수 있다는 이유로 막부의 고위지도자들은 이를 쉬쉬해 버렸다. 그러나 같은 해 7월 8일, 진짜로 미국의 페리 제독이 증기선 4척을 이끌고 에도의 지척에 위치한 우라가 항에 갑툭튀하여 개항을 강요하는 내용이 담긴 미국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하였다. 당시 막부측은 이에 당황한데다 쇼군이 오늘내일하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개항결정을 미루고 페리 제독 측에 다음번에 확답하겠다고 응답하였다. 당시 막부 측은 에도의 다이바를 확충하는 한편, 다이묘로부터 서민에게 이르기까지 대응책에 대한 자문을 구하며 이 상황을 타개코자 했다. 그러나 1854년 겨울에 페리가 더 큰 규모의 선대를 이끌고 내항하자 결국 막부 측은 반강제적으로 개항에 동의하였고 이에 '''미일화친조약'''이 체결되었는데, 이는 일본이 역사상 최초로 맺은 근대적 조약이자 불평등 조약이었다. 미국이 일본과 수교하자 다른 서구 열강들도 앞다투어 일본과 수교를 맺고 근대적인 무역관계를 확립하였다. 이에 위정척사 사상을 가진 일본의 '''존황양이파'''는 격분하였고, 이들은 과거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일본 정치계에서 아싸집단으로 자리매김한 서부의 토자마 세력권에서 결집하였다. 존황양이파의 막부에 대한 투쟁은 10여년간 지속되었으나 사츠에이 전쟁과 시모노세키 전쟁을 계기로 존황양이파는 기존의 양이사상을 버리고 근대화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된다. 이로 인해 존황양이파는 존황파, 혹은 '''토막(討幕)파'''로 진화 내지는 태세전환하여 막부 빠돌이 그룹인 '''좌막(佐幕)파'''와 대립하게 된다. 토막파의 대표주자가 된 사츠마 번과 쵸슈 번은 원래 대립관계였으나 같은 정치노선을 공유하게 되어 양 세력간 제휴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이에 사카모토 료마의 중재에 따라 동맹관계를 형성되게 되는데, 이를 '''삿쵸동맹'''이라고 한다. 에도 막부의 마지막 쇼군이자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환생으로 일컬어졌던 막부의 마지막 희망 도쿠가와 요시노부(徳川慶喜)는 대세가 천황 쪽으로 기울었음을 감지하고 '''대정봉환'''이라는 과감한 결단을 내린다. 대정봉환이란 막부가 천황 밑으로 기어들어가 막부의 권력을 천황에게 넘기는 것을 의미한다. 대정봉환이 이루어지게 되면 막부는 더 이상 일본 권력의 정점은 아니게 되지만, 대신 막부가 기존에 거느린 막강한 세력을 배경으로 하여 천황으로부터 정통성까지 인정받은 일본 제2의 세력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이가 실현되면 토막파는 그 명분을 잃을 수 밖에 없었고 이에 똥줄이 탄 삿쵸동맹 내 토막파들은 대정봉환이 실행되지 못하도록 공작을 벌였다. 결정적으로 에도에서 파괴공작을 감행하는 어그로가 잘 먹혔고, 이는 좌막파들의 분노를 사서 좌막파들에게 진정할 것을 요구했던 도쿠가와 요시노부조차 과격 좌막파들의 삿쵸타도주장을 받아들였다. 대정봉환을 준비하기 위해 오사카 성에 체재하고 있던 요시노부의 막부군은 '천황을 삿쵸동맹의 마수로부터 해방시킨다'는 명분을 앞세워 쿄토로 진군하였다. 당시 쿄토의 신정부에서는 구 막부군의 진군을 신정부에의 도전인지, 아니면 그냥 삿쵸와 막부간의 사전(私戰)인지를 두고 의견충돌이 벌어졌으나 삿쵸동맹 지지자인 의정 이와쿠라 토모미의 도쿠가와 막부 타도 결정으로 인해 신정부군은 막부에 선전포고를 하게 된다. 쿄토의 인근에 위치해 있는 토바, 후시미에서 막부군과 삿쵸군의 충돌이 발생하였다. 막부군은 그 규모에서 삿쵸군을 압도하였고 막부군에는 프랑스식 훈련을 받은 근대식 정예군들이 대거 포진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삿쵸군에게 충격적으로 패배해버렸고, 이에 막부군의 사기가 저하되었다. 토바, 후시미에서 승기를 잡은 신정부군은 진군을 거듭하여 막부의 수도인 에도를 장악하였다. 1868년, 에도를 접수한 신정부측은 막부를 공식적으로 폐지하였고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 근대 (입헌)군주국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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