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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교관계 == ===유럽=== 일본에 최초로 당도한 유럽인은 포르투갈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포르투갈인들은 당시 전국시대였던 일본에 화승총을 전래하여 군사력의 강화가 절실했던 일본 각지의 다이묘들로부터 호의적인 대접을 받았으나, 수십수백의 지방충들이 난립하는 막장상황이 어느정도 정리되고 일본 본토 통일이 가시화되자 그들이 조총, 중국에서 들고온 교역품과 함께 가져온 카톨릭교가 문제시되면서 일본에서의 입지가 축소된다. 이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포르투갈 선교사를 일본에서 전원 추방시킨 바가 있었고, 도요토미 가문을 몰락시킨 도쿠가와 정권도 카톨릭 교를 경계하고 있었기 때문에 도요토미의 종교정책을 계승하였다. 도쿠가와가 에도 막부를 수립하고나서 얼마 지나지 않은 1609년에 신흥강국인 네덜란드의 선단이 일본에 입갤하여 통교를 개시하게 되었다. 당시 네덜란드는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지 얼마되지 않은 스페인의 적대국가였고, 포르투갈은 스페인과 함께 동군연합왕국으로 묶여있었다. 이미 일본에는 포르투갈인들을 따라 스페인인들도 많이 입갤해 있는 상태였다. 노련한 장사꾼들인 네덜란드인들은 에도 막부의 윗대가리들이 카톨릭을 경계한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자신들은 카톨릭과는 다른 신교도인임을 어필한 다음 카톨릭 뒷담화를 까는 방법으로 일본의 반카톨릭화를 부추겼다. 이로 인해 1613년 금교령이 통과되어 일본에서 크리스트교가 금지되었고, 1639년에 포르투갈 선박의 일본 내 입항이 전면금지되면서 이들은 일본 시장에서의 경쟁에서 밀려나게 된다. 그 후 포르투갈의 사절단이 일본과의 재통교를 위해 교섭을 시도한 바가 있으나 사절단들은 전원 참수되어 리스본으로 보내졌다. 포르투갈과 함께 같은 카톨릭 세력인 스페인 또한 일본에서 추방되었고, 개신교 세력인 잉글랜드는 네덜란드와의 경쟁에서 밀려 자진해서 상관을 폐쇄하고 퇴갤함으로써 네덜란드는 일본에 접근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유럽세력이 된다. [[파일:수교400주년 기념주화.jpg|thumb|250픽셀|2009년 네덜란드에서 발행된 일본-네덜란드 수교 400주년 기념 5유로 주화]] 네덜란드인들은 거의 200년동안 유럽 문물을 일본에 전파하고, 역으로 일본 문물을 유럽으로 전파하는 파이프 역할을 하게 된다. 네덜란드인들이 전파한 유럽 문물들은 막부의 겐세이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일정의 붐을 일으켜 '''난학'''으로 자리잡게 된다. 이는 일본인들이 유럽 문명을 피상적으로 이해하는데 큰 공헌을 하게 된다. 아편전쟁으로 인해 일본 사회 내에서 서구 세력 위협론이 부상하게 된다. 이를 감지한 네덜란드 왕국이 일본의 전면적인 개항을 요구하는 사절단을 보내기도 했으나 아직 일본 사회는 쇄국체제 포기를 운운할 정도로 기존 체제가 위협을 받는 단계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는 퇴짜를 맞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내항한 미국 페리제독의 쿠로후네의 압박으로 인해 일본은 개항의 길을 걷게되고, 유럽세력들과 불평등한 위치에서 수교를 맺게 된다. 일본에서의 외국세력 입김이 강해지자 취약해져 있던 막부의 권위는 실추되었고, 뒤에서 통수를 치기위해 칼을 갈고있던 지방충들이 이때다하고 천황을 앞세워 들고 일어나 막부와 대결하게 된다. 유럽의 양대강국 중 하나인 영국은 원래 막부를 지지하였으나, [[살영전쟁]]을 겪고 지방충들의 포텐을 알아챈 후 지방충 선회노선으로 돌아서서 이들을 지원하였고, 영국안티인 프랑스는 막부를 지원하였다. 이 무진전쟁에서 지방충들이 승리함에 따라 에도막부 이후에 등판한 일본 제국은 영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가지게 된다. ===중국=== 일본과 명나라 간의 관계는 무로막치 막부 시절부터 매우 좋지 않았다. 이와 같은 냉기류 상태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동아시아의 중화질서에 도전]]까지 한 바람에 양국간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도요토미 정권의 뒤를 이은 도쿠가와 정권은 중국과의 관계 침체를 타개하기 위해 사신단을 꾸렸으나 명나라의 황제인 만력제에게 퇴짜만 맞았다. 이 사건으로부터 10년이 지난후 명나라가 대내외적으로 위기에 처하자 이번엔 명나라측에서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여 관계정상화를 타진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도쿠가와 막부가 명나라 사신을 퇴짜놓았다. 도쿠가와 막부로서는 명나라로부터 엿을 먹은 이후의 그간의 10년 사이에 각기 다른 수단을 이용하여 관계를 터놓은 류큐와 조선이라는 채널을 활용하여 중국과의 간접교류를 할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굳이 제후국을 자처하면서까지 명나라와 외교관계를 수립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일본과 중국간 관계는 근대시대까지 영구히 단절되었으며 이와 같은 관계단절 상태는 중국의 정권이 청나라로 넘어간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그렇지만 민간분야에서의 대중국 교류는 에도 시대에 활기를 띄게 되는데, 이는 청나라가 발전을 이루어 인물이 번창하여 화폐수요가 급증함에 따라 세계구급 귀금속 산지인 일본과의 무역수요가 중국 내에서 대두함에 그 원인이 있다. 흔히 나가사키 데지마 때문에 일본의 대외무역 주 거래처는 네덜란드인 것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청나라가 에도시대 일본 제일의 무역대상국이었다.<ref>에도막부가 청나라와 네덜란드에 할당한 공무역량은 각기 6,000관과 3,000관으로 2배 차이였다. 하지만 할당제도가 엄격히 지켜진 건 아니기 때문에 실제 무역량은 해마다 변동되었다.</ref> ===조선=== 임진왜란 당시 군주였던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조선의 선조가 퇴갤한 이후 새로이 일본의 지배자가 된 도쿠가와와 조선의 광해군이었고 그들 모두 양국간 외교관계 수립의 필요성을 인지하고 있었다. 일본의 쇼군직에 취임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국내에서 자신의 위엄을 뽐내기 위해 외국사절단을 게스트로 초빙하고싶어했고, 조선의 광해군 정권은 북쪽에서 그 세력이 막강해지는 여진족에 대비해 남방의 위협을 제거할겸 친선을 도모하기 위해 일본과 통교할 필요성을 느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필요성의 인식과는 별개로 사절단을 누가 먼저 보내냐는 문제를 둘러싸고 양국간 신경전이 계속되었는데, 이는 1598년 일본 군대가 반도에서 철군한 이후에도 양국은 여전히 공식적으로 적대관계였던 탓에 먼저 관계개선 사절단을 보낸 쪽이 GG쳤다는 인상을 받을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양국간의 불편한 관계지속이 가장 불편한 세력이 존재했는데, 바로 일본과 조선 사이에 있는 츠시마였다. 츠시마는 작은 섬을 본토로 하는 세력으로 그 농업기반이 협소하였고 따라서 일본과 조선의 중간에서 양국간 교역에 자국의 경제를 유지할 수 있는 집단이었다. 따라서 일본과 조선 간 무역이 단절된 상태에서 츠시마가 만성적인 피해를 볼 수 밖에 없었음은 두 말할 것 없을 것이다. 따라서 츠시마는 과거 도요토미 히데요시 시절에 했었던 짓과 같은 국서 주작을 획책하였고, 그들의 계략은 성공하였다. 츠시마는 막부의 국서와 조선 왕조의 국서를 중간에 개작하여 각자 상대편의 입맛에 맞는 내용으로 채워 보냈고, 이로 인해 일본과 조선간 관계는 재개되었으며 조선은 비정기적으로 에도 막부에 조선통신사를 보내게 되었다. 비록 양국간 관계는 재개되었지만, 주작질로 인해 재개된 관계인만큼 속은 그만큼 뒤틀려있었다. 양국은 공식적으로는 대등관계를 표방했지만, 일본 측은 대내적으로 조선통신사를 속국의 조공사절단으로 선전하였으며, 조선 측은 일본을 하등국가로 치부하곤 했다. [[파일:Japanese Bridge, Hoi An.jpg|thumb|250픽셀|베트남의 교역도시 호이안의 재팬타운에 있던 일본교(橋)]] 일본의 조선과의 관계는 18세기 중반에 들어 시들시들해졌으며, 1811년 마지막 통신사가 츠시마에서 간략하게 업무를 보고 조선으로 돌아감으로써 이 제도는 폐기된다. ===동남아=== 일본과 동남아간의 상호관계는 거의 대부분이 민간분야에서 이루어졌다. 전국시대 수많은 일본인들이 교역과 용역팔이를 위해 동남아 각지에 진출해 있었고, 이와 같은 활발한 진출로 인해 동남아 각지에 재팬타운이 우후죽순 들어서게 된다. 그러나 에도 막부가 쇄국정책을 펼치면서 해외에 일본인이 나가는걸 금지함과 동시에 나간 일본인이 본국으로 돌아오는 것도 금지하여 통수를 얻어맞은 재외 일본인들은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재팬타운에 눌러앉아있다 현지화되었다. 동남아에서 일본인들은 상업과 함께 용병업에서 그 두각을 드러냈다. 전국시대 실직무사들 중 동남아로 건너간 일본인들이 많았고, 이들이 동남아의 군주들에게 고용되어 현지에서 맹활약을 펼쳤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로는 아유타야 왕국의 친위대 장군 직에 오른 야마다 나가마사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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