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무위키
조무위키
둘러보기
대문
최근 바뀜
임의의 문서로
미디어위키 도움말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
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
특수 문서 목록
문서 정보
행위
문서
토론
편집
역사 보기
영선사
편집하기
경고:
로그인하지 않았습니다. 편집을 하면 IP 주소가 공개되게 됩니다.
로그인
하거나
계정을 생성하면
편집자가 사용자 이름으로 기록되고, 다른 장점도 있습니다.
스팸 방지 검사입니다. 이것을 입력하지
마세요
!
{{한국통사}} == 개요 == [[1881년]] [[조선]]이 근대화의 일환으로 [[청나라]]의 근대식 무기 제조법을 배우기 위해 파견했던 유학생 사절단 == 배경 == [[아편전쟁]]과 [[애로호 사건]]으로 [[청나라]]는 더이상 과거딸치며 천하의 중심이니 뭐니 할 처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무기의 근대화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깨닫게 된다. 그러다 1861년 신유정변으로 [[서태후]]가 집권하면서 1894년 [[청일전쟁]]이 일어날 때까지 [[양무운동]]을 실시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제도는 과거의 봉건사회를 유지하면서도 무기만 발전시키는 온건적 개화를 하게 된다. 그걸 본 [[조선]]의 온건 개화파들은 청나라를 배워서 무기를 발전시키자는 주장을 하게 되고 마침 [[이홍장]]도 "ㅇㅋ 알겠음 조선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요청하면 [[톈진]]의 기기국으로 유학할 수 있게 해주겠음"이라는 화답을 보내왔고 1880년 조선 조정에서 회의 끝에 유학생들을 톈진으로 보내게 된다. [[이홍장]] 역시 [[광서제]]의 재가를 받아서 그렇게 조선은 [[청나라]]를 통해 근대식 무기를 배우기로 결정한다. == 상세 == 물론 위정척사파들의 반대가 존나게 심했지만 [[고종(조선)|고종]]은 "그래도 코쟁이들이나 왜놈보다는 [[중국몽]]이 낫겠지"라는 생각으로 [[통리기무아문]]에게 일을 처리하라고 맡겼고 그렇게 사신인 김윤식과 중인 이상의 유학생인 학도 20명과 천인 신분의 [[공돌이]]인 공장 18명을 포함한 69명의 사절단이 9월 26일 톈진으로 향한다. 그리고 11월 17일 [[베이징]]에 도착해서 김윤식은 [[이홍장]]과 회담하고 밑에 있던 유학생과 공돌이들은 30일 [[톈진]]에 도착해서 화약, 탄약 제조법과 전기, 화학, 제련, 기계학 등 다양한 근대식 무기 제조법을 배우게 된다. 물론 외국어도 같이 배웠다고 한다. == 한계 및 의의 == 하지만 재정문제로 유학생들은 그리 오랫동안 유학을 하지 못하고 대부분 중도귀국을 하게 되고 결정적으로 [[임오군란]]이 터지자 15명을 제외하고 모두 귀국하게 된다. 그래도 이때 무기 제조법을 배운걸 바탕으로 [[1883년]] 영선사 출신 유학생들이 우리나라 최초의 신식무기공장이자 최초의 근대식 공장인 [[기기창]]을 세우게 된다.
요약:
조무위키에서의 모든 기여는 CC BY-SA 4.0 라이선스로 배포된다는 점을 유의해 주세요(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조무위키:저작권
문서를 읽어주세요). 만약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문서를 저장하지 말아 주세요.
또한, 직접 작성했거나 퍼블릭 도메인과 같은 자유 문서에서 가져왔다는 것을 보증해야 합니다.
저작권이 있는 내용을 허가 없이 저장하지 마세요!
취소
편집 도움말
(새 창에서 열림)
이 문서에서 사용한 틀:
틀:한국통사
(
편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