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무위키
조무위키
둘러보기
대문
최근 바뀜
임의의 문서로
미디어위키 도움말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
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
특수 문서 목록
문서 정보
행위
문서
토론
편집
역사 보기
영조
편집하기 (부분)
경고:
로그인하지 않았습니다. 편집을 하면 IP 주소가 공개되게 됩니다.
로그인
하거나
계정을 생성하면
편집자가 사용자 이름으로 기록되고, 다른 장점도 있습니다.
스팸 방지 검사입니다. 이것을 입력하지
마세요
!
== 업적 == 아무리 싸이코 같아도 업적은 꽤 많다. 그냥 존나 오래살았으니 이에 따라 업적도 많아진 것. 붕당정치의 폐해를 줄이고 왕권을 강화한다는 이유로 탕평책을 실시했으나 영조 자신의 정치적 입장으로 인해 자신의 정치적 지지자들을 많이 깔아야 했고, 이는 당파간 세력 불균형으로 직결되어 실질적으로 완벽한 탕평 정치가 이루어지기는 어려웠다. 또한 이 시기에 정치를 주도하던 세력은 여전히 노론이었으므로 이 시기의 탕평책을 완전한 탕평책으로 보기는 어렵다. 초반 영조 즉위 후 노론이 (노론 4대신을 죽이고 삼수의 옥을 계기로 노론을 압박한) 소론을 박살내려 했으나 영조의 반대 등으로 처리하지 못하자 강경드라이브를 걸었고 영조는 이에 정미환국을 단행해 노론을 몰아내고 소론을 등용시켜버렸다. 물론 등용된 것은 온건파인 완론 소론이었지, 준론 소론은 아니었다. 이후 벌어진 준론 소론과 남인이 합세한 이인좌의 난에서 이 완론 소론은 난을 집압하는 데 많은 공을 세웠다. 하지만 이후 남은 준론 소론 잔당들의 난리법석에 서서히 소론의 세는 위축되었고 결국 노론이 집권하게 된다. 일부 드라마 등에서는 영조가 실권없이 노론에게 떠밀려다닌 군주로 묘사되긴 하지만 이는 실상과 정반대다. 민진원, 정호를 비롯한 강경파 대신들이 죽은 영조 10년 이후로 노론은 사실상 영조에게 아부하고 아첨하는 것으로 정권을 유지했어야 할 만큼 영조는 강력한 왕권을 구축했다. 유척기를 비롯한 외골수들은 끝까지 토적을 외치면서 탕평을 무시했지만 그런 이들의 주장에 혹해서 말 한마디라도 잘못하면 바로 조정에서 대숙청의 바람이 불곤 했다. 영조의 즉위 초반에는 노론이 탕평하자는 영조의 말도 듣지 않고 열받은 영조에게 정미환국 한방으로 날아가고 소론 정권이 들어서기도 했으며 영조 즉위 중후반부에 《천의소감》이란 책을 지으면서 집권 노론이 소론을 폄하하고 설치다가 분노한 영조에게 "이 미친놈들이 숙종 시절의 남구만, 유상운까지 들먹이면서 헛소리를 해? 당론을 위해 이 책을 지었느냐? 태아검(왕권을 상징)이 누구에게 있는지 니들이 까먹었나 보지?"란 일갈에 한방에 날아갈 뻔하자 싹싹빌고 다시는 안 까불겠다고 맹세한 일도 있다. 결국 영조는 경주 김씨를 비롯한 노론 명문가들에게 지친 나머지 명문가들을 쩌리로 만들고 풍산 홍씨같은 한미한 가문을 순식간에 조정 영수로 만들어 놓았고 영조 말은 당파가 붕괴되고 척신 정치로 귀결된다. 가혹한 형벌을 없애는 데 신경을 써서 압슬형,낙형,자자형과 같은 고문을 없앴으며, 균역법을 실시해 조세제도의 모순을 어느정도 개혁하는 데 성공했고 서원의 중복 설립 금지,청계천 준설공사,서얼들에 대한 차별 완화 등 긴 재위기간 동안 많은 치적을 남겼다. 통치기간 동안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인한 전화가 그의 재위기에 완전히 수습되어 나라가 상당히 안정적이었으며, 일반 백성들에게는 상당히 너그러웠지만 관리들이 죄를 지으면 엄하게 죄를 물었다. 또한 상당히 검소한 삶을 살았는데, 왕의 침실에 누덕거리는 이불과 베개만이 있고 식사는 밥과 김치, 장류 정도 뿐이었다고 할 정도였다고. 사치스런 가체를 금지하고 족두리로 대신하게 한 것도 영조대 부터다.하지만 잘 지켜지지는 않아서, 순조대쯤에야 사대부나 민가에까지 정착하게 된다. ㄴ 사실 이게 영조의 업적의 대부분이라고 봐야 된다. 예로부터 성군은 백성들을 어여삐 여기고 그들의 삶을 돌봐주는 것. 관리들이나 재상들 집권가들한테 뭐를 한들 폭군의 기준이 안된다. 연산군이 진짜 폭군이었던 이유는 바로 백성들의 삶을 힘들었게 했기 때문이다. 50년 넘는 세월동안 백성이 평화로웠으면 영조가 아무리 양반들한테 어떤 개지랄을 떨든 백성들한테는 영조가 성군이었던 것이다. 또한 연과 여(왕과 왕비가 타는 가마)에 원래는 금으로 칠을 하던 것을 주석으로 대체하게 하기도 했다. "곡물을 낭비하게 된다."는 이유로 수십년 간 금주령을 내린 것도 이런 생각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비슷한 이유로 양반님들이나 살법한 기와집 한채를 능가하는 노애미 가격과 목한번 잘못 굽혔다가 사람 목뼈 작살내서 요단강 태우는 노애미 무게를 자랑하던 당시 여성들의 사치품인 [[가체]]를 금지시키기도 했다. 영조가 가체를 금지시킨 이후 여성의 헤어스타일은 뒤꽂이, 비녀, 족두리가 결정하게 되었다. 하지만 영조 본인도 술에 대한 욕망을 끊지 못해, 조선왕조실록 곳곳에는 몰래 먹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기록이 나온다. 본인은 "오미자차였다"고 변명했다. 또한 말년에 다리병의 고통을 완화하기 위해 송다(松茶)를 마셨다는 기록이 많은데 말이 좋아서 차였지. 이것도 솔잎과 누룩을 넣어 만들었으니 사실상 술이나 마찬가지였다.
요약:
조무위키에서의 모든 기여는 CC BY-SA 4.0 라이선스로 배포된다는 점을 유의해 주세요(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조무위키:저작권
문서를 읽어주세요). 만약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문서를 저장하지 말아 주세요.
또한, 직접 작성했거나 퍼블릭 도메인과 같은 자유 문서에서 가져왔다는 것을 보증해야 합니다.
저작권이 있는 내용을 허가 없이 저장하지 마세요!
취소
편집 도움말
(새 창에서 열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