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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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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 나라의 건국과정과 이런 해괴한 이중국가 구조는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중부유럽을 호령하며 신성로마제국을 대대로 지배하던 합스부르크 왕조의 특수성에서 기인한다. ==합스부르크 군주국== 중부유럽에 존재했던 오스트리아 제국, 오헝제국의 전신이다. 그러나 정식명칭이나 국가체제는 아니었다. 합스부르크는 여기저기에 크킹질로 수많은 씨를 뿌려놓았는데 그 결과로 완성된것이 합스부르크 제국이다. 상속을 통해서 동군연합이라 하여 여러나라의 군주들을 한 명의 임금이 겸임하는 것이다. 즉 단일국가도 아니며 그렇다고 국가연합체도 아니다. 단지 한명의 임금을 모시는 개별 주권국들의 묶음일 뿐이었다. 이덕분에 내가 왜 딴나라 전쟁하는데 우리가 세금을 내야하냐? 며 반란을 일으킬수도 있었다. 그러나 합스부르크 제국의 전성기였던 신롬+스페인왕국 동군연합은 카를 5세 사후 해체되어 각각 스페인은 아들에게 신롬쪽은 동생에게 물려주어 제 갈길을 가게되었고(거기다가 근친 폐해로 합스부르크 왕조마저도 끊기고 부르봉왕조로 교체된다) 이때부터를 독자적인 합스부르크 군주국의 시작으로 본다. 훗날 신롬쪽 합스부르크 가문 즉 합스부르크 군주국도 똥양종법에 따르면 일단 대가끊긴다.(오스트리아 대공국의 왕자들이 모두 죽었다.) 대신 공주인 [[마리아 테레지아]]가 여황제 즉위가 불가능한 신롬빼고 나머질 모두 물려받았다. 그리고 당시 신롬국력 투톱급인 프로이센과 바이에른에게 시비걸려 털릴뻔할 위기에 봉착하는데 그게 바로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 겨우 신롬황제를 비롯한 왕위를 지켜냈으나 세입의 22퍼를 담당핟던 슐레지엔을 날려먹었다.(나중에 폴란드 1차분할 참가로 벌충) 여기서 마리아테레지아의 작위는 대충 오스트리아 대공국의 여대공, 헝가리 여왕, 보헤미아왕국 여왕, 로도마리아-갈라치아 왕국 여왕 겸 신롬황후겸 독일왕국 왕후였다. 즉 오스트리아는 왕국도 되지 않았다. 이윤 오스트리아가 짐도 그렇지만 그때도 땅도작고 인구도 적어서. 그래도 별로 신경안썻는데 당시엔 아직 민족주의 의식도 미약했고 동군연합도 남의 나라에서 왕 꿔오기도 서양에선 그닥 낯선개념도 아니어서였고 조그만 오스트리아보단 신롬황제 작위에 집착해서다. ==오스트리아 제국== 이렇게 나라가 4단 5단 6단 분리합체 변신로봇 같은 꼬라지로 있었지만 별로 불편함을 못느끼고 살았으나<ref>중세에는 최적화된 체제였고 종교전쟁때도 그럭저럭 굴러갔다</ref> 유럽을 순식간에 갈아마시고 다닌 나폴레옹이 혜성처럼 나타난다. 그리고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를 패배시켰고 퇴물 오스트리아 말고 우리편해라는 나폴레옹의 꼬드김을 가장한 반협박에 신롬내 소국들이 프랑스 응디에 모조리 붙어서 형님형님을 외쳤고 선거후국들도 나폴레옹의 그런 따까리 국가들로 교체당했다. 즉 이제 신롬황제유지는 커녕 여태것 자기 따까리로 여기던 듣보 신롬국가 왕한테 황제폐하ㅠㅠ 라면서 머릴 조아리거나 최악의 경우는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신롬황제로 출마해서 당선되는 사태가 벌어질수도 있는것이었다.(실제로 왕정시절 프랑스 국왕들이 신롬황제선거 출마에 도전했다) 뿐만 아니라 나폴레옹이 곧 프랑스 황제를 (참)칭하게 된다. 이에 위기를 느낀 합스부르크 황실은 그간 중부유럽에 흩어진 여러나라의 동군연합 군주국들 묶음이었던 합스부르크 제국을 통합해 대공국에 불과했던 오스트리아를 제국으로 격상시켜 보험에들었으며 영국왕에게도 같이 나폴레옹 엿먹이게 제국 선포하고 황제하자고 권하기도 했다고 한다. 영국쪽에선 무시했다는듯. 이렇게 합스부르크는 제관을 스트레오로 쓰게 되었으나 곧 잠시뿐이었다. 나폴레옹에게 또다시 털린 오스트리아는 나폴레옹의 협박으로 울며 겨자먹기로 신성로마제국을 해체시켰다. 샤를마뉴가 서로마 황제의관을 받은지 900여년 만이었다.그래도 황제칭호와 그 막대한 중부유럽의 영토는 유지할수 있었다. ==오헝제국의 성립== ===독일혁명=== 안그래도 7년 전쟁, 나폴레옹 전쟁을 거치면서 제국 내에서도 ㅅㅌㅊ였던 땅들을 날려먹고 점점 약해지던 합스부르크의 상황은 점점 악화되어간다. 빈체제 이후 두가지 이념이 프랑스로 부터 독일을 넘어 중부유럽을 강타하는데 하나는 자유주의고 하나는 민족주의였다. 예전까진 임금님이 까라면 까야지 라거나 합스부르크가 우리나라 임금님이지 누가 임금을 한단거요? 라고 당연시 해왔지만 이젠 도저히 못참는다라고 엠생흙수저들이 들고 일어났다고 보면 된다. 사실 당시 자유주의와 민족주의는 최신이념인지라 금수저 부루좌지 인텔리들이나 향유하는 소수취향이었다. 그덕에 애들만 가지고 혁명했다간 백전 백패였는데 때마침 전유럽에 기근이 들었고 아직 농업이 경제의 중추였던 시절이었던지라 거의 모두가 망하게 되자 좆같은 외국왕 쫓아내고 우리끼리 잘먹고 잘살자는 선동이 머중에게 먹혔다. 그나마도 영국은 산업화로 잘먹고 잘살아서 혁명없었고 프랑스만 성공했고 프로이센은 임금이 폭도들이 주는 독일황제 왕관따윈 안쓴다고 진압했고 러시아는 걍 중세라 혁명 그딴거 있을수가 없었고 오스트리아는 겨우 러시아 지원으로 진압했다. 이로서 슬라브와 헝가리 민족주의자들은 일단은 실패했지만 오스트리아제국이 예전같지 않다는걸 눈치까게 된다. 헝가리 독립을 주도하던 코수트는 '합스부르크는 좆도 아니고 헝가리 독립의 진정한 적은 러시아'라는 말까지 했다.<ref>[[헝가리 혁명|진짜 그렇게 되었다.]]</ref> 여담으로 크림전쟁때 오스트리아는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서 헝가리 반란군을 진압했는데도 불구하고 오스만 편을 든 여력이 있다. 이로 인해서 오스트리아랑 러시아는 한동안 멀어지게 된다. ===보오전쟁=== 프로이센은 독일통일과정중 다민족 국가 오헝제국을 배제시키고 소독일주의에 입각한 독일단일민족 국가를 건설하기로 하여 이를 위해 오스트리아를 공격하여 항복을 받아내어 독일에서 강퇴시킨다. 오스트리아계 독일인들의 외교 목표였던 오스트리아 위주 통일이 가상이 되자 독일인들의 정치 참여 비율이 조금씩 딸어지기 시작했다. 이는 장기적으로 제국의 안보의 큰 악영향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런 거듭된 망신살에 몸져누워있던 제국을 헝가리 민족주의자들이 또다시 갈궈됐다. 이에 오스트리아 제국은 이들을 진압할 힘이 없었으므로 대타협을 들고오기에 이른다. ===대타협과 오-헝제국의 건국=== 본디 오스트리아 제국이 성립되면서 그동안 가지고 있던 작위들을 모조리 합쳐서 오스트리아 제국 작위에 합쳤는데 다시 헝가리왕국 작위만 풀어내어 동군연합 군주로 앉는다는 것이다. 이에따라 헝가리는 제국내에 잔류하는 대가로 의회와 내각과 총리를 따로 가지는 별개의 국가로 존재하게 되었다. 외교와 재정, 국방문제는 두나라가 합의해서 처리한다. 라이히스라트,헝가리 의회 같은 경우엔 외교 문제에 직접적으로 개입할 권리가 없었고 정확히 외교 예산의 승인 등의 문제는 1년에 한번 소집되는 대표부 권 한으로 결정되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외교 관련 문제는 황제가 주재하는 공동 내각에 의해 결정되었다. 여기서 황제는 절대적인 권한을 발휘할 수 있었다. 본디 지도를 펴서보면 헝가리왕국 영토가 좀 컸단걸 알수 있다. 그덕에 헝가리 귀족들은 불만있으면 들고일어나 황제를 갈궜고 이에 황젠 윽박지르거나 살살 달래거나 둘중 하나였다. 이번에도 그 연장선이었고 오헝제국안에 의해 피지배 민족에서 지배민족으로 격상되자 이에 만족하며 헝가리계 기득권 들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간것. 당시 타협시기쯤에 체코인들도 황가쪽에 권리를 증진 해달라고 부탁하였지만, 독일계 귀족들,헝가리 귀족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오스트리아 대공국은 영토가 비교적 작고 독일계 인구는 언제나 과반을 못넘겼다.(이것이 대러시아 민족이 과반수인 러시아와는 다른 민족정책,확장정책 을 보여주었다.) 근데 그건 2위의 인구를 차지하는 헝가리도 마찬가지였다.<ref>대충 오스트리아 23~24, 헝가리 22~23 정도였고 나머지는 슬라브계였다.(물론 슬라브도 체코인, 폴란드인, 슬로베니아인 등등으로 나뉨</ref> 반면 오스트리아는 전통적으로 금융업이 발달했고 독일계 다수지역인 수테텐은 공업이 발달했으며 이지역들은 자유주의적이었으나 헝가리는 그러지 못했다. 오스트리아는 민족유화책(이는 구상으로만 끝났던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의 대오스트리아 합중국 안으로 이어진다)을 사용한 반면 헝가리는 휘하 슬라브족들에게 강경책을 사용했다. 오스트리아계 독일인들은 정치적으로 제국에 영향을 받기보단 현실로 존재하는 '독일'과 자신들을 동일시하면서 합병(Anshluss) 을 가치로 내걸었다. 이후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이와같은 제국의 무관심은 커져만 갔고, 분리주의 성향을 점점 제국의 존재 자체를 위협할 정도로 커졌다. 이와 반대로 헝가리 민족주의는 타협 이후의 제국의 외교 정책에 활기를 불어주는 새로운 요소였다. 헝가리 민족은 1848 사태를 보고선 제국 밖으로의 생존은 힘들다 판단하고 자신들의 정책을 제국 외교에 반영하랴고 노력하였다. 러시아 민족의 발칸 개입 을 막기위해 적극적인 반 러시아와 정책을 펼치도록 노력했고 갈리치아 지역에 요새 현대화를 요청했다. 하지만 20세기 이후에 유럽의 안정을 보곤 제국의 공동군대는 헝가리 시점에선 자신들의 국력을 저하시키는 요소중에 하나로 보여졌다. 외교또한 주권울 침해하는 요소를 보는 이들이 늘어나기 시작하자 제국의 정치 활기는 다시금 줄어들었다. 이와 반대로 체코는 자신들의 불행한 일들이 있음에도 친오스트리아 정책을 유지했고 폴란드는 독일,러시아 지역보다 자치권이 낫다는 것을 보며 안심하였고, 나머지 민족 세력들도 친오스트리아 기조를 유지하며 자신들의 욕구를 제국을 통해 반영 시키랴고 노력했다. 하지만 이와같은 노력은 제국에서 받아드리지 못하였고, 자신들의 주제 이외에 외교 문제는 받아드리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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