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무위키
조무위키
둘러보기
대문
최근 바뀜
임의의 문서로
미디어위키 도움말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
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
특수 문서 목록
문서 정보
행위
문서
토론
편집
역사 보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편집하기 (부분)
경고:
로그인하지 않았습니다. 편집을 하면 IP 주소가 공개되게 됩니다.
로그인
하거나
계정을 생성하면
편집자가 사용자 이름으로 기록되고, 다른 장점도 있습니다.
스팸 방지 검사입니다. 이것을 입력하지
마세요
!
==오헝제국의 성립== ===독일혁명=== 안그래도 7년 전쟁, 나폴레옹 전쟁을 거치면서 제국 내에서도 ㅅㅌㅊ였던 땅들을 날려먹고 점점 약해지던 합스부르크의 상황은 점점 악화되어간다. 빈체제 이후 두가지 이념이 프랑스로 부터 독일을 넘어 중부유럽을 강타하는데 하나는 자유주의고 하나는 민족주의였다. 예전까진 임금님이 까라면 까야지 라거나 합스부르크가 우리나라 임금님이지 누가 임금을 한단거요? 라고 당연시 해왔지만 이젠 도저히 못참는다라고 엠생흙수저들이 들고 일어났다고 보면 된다. 사실 당시 자유주의와 민족주의는 최신이념인지라 금수저 부루좌지 인텔리들이나 향유하는 소수취향이었다. 그덕에 애들만 가지고 혁명했다간 백전 백패였는데 때마침 전유럽에 기근이 들었고 아직 농업이 경제의 중추였던 시절이었던지라 거의 모두가 망하게 되자 좆같은 외국왕 쫓아내고 우리끼리 잘먹고 잘살자는 선동이 머중에게 먹혔다. 그나마도 영국은 산업화로 잘먹고 잘살아서 혁명없었고 프랑스만 성공했고 프로이센은 임금이 폭도들이 주는 독일황제 왕관따윈 안쓴다고 진압했고 러시아는 걍 중세라 혁명 그딴거 있을수가 없었고 오스트리아는 겨우 러시아 지원으로 진압했다. 이로서 슬라브와 헝가리 민족주의자들은 일단은 실패했지만 오스트리아제국이 예전같지 않다는걸 눈치까게 된다. 헝가리 독립을 주도하던 코수트는 '합스부르크는 좆도 아니고 헝가리 독립의 진정한 적은 러시아'라는 말까지 했다.<ref>[[헝가리 혁명|진짜 그렇게 되었다.]]</ref> 여담으로 크림전쟁때 오스트리아는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서 헝가리 반란군을 진압했는데도 불구하고 오스만 편을 든 여력이 있다. 이로 인해서 오스트리아랑 러시아는 한동안 멀어지게 된다. ===보오전쟁=== 프로이센은 독일통일과정중 다민족 국가 오헝제국을 배제시키고 소독일주의에 입각한 독일단일민족 국가를 건설하기로 하여 이를 위해 오스트리아를 공격하여 항복을 받아내어 독일에서 강퇴시킨다. 오스트리아계 독일인들의 외교 목표였던 오스트리아 위주 통일이 가상이 되자 독일인들의 정치 참여 비율이 조금씩 딸어지기 시작했다. 이는 장기적으로 제국의 안보의 큰 악영향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런 거듭된 망신살에 몸져누워있던 제국을 헝가리 민족주의자들이 또다시 갈궈됐다. 이에 오스트리아 제국은 이들을 진압할 힘이 없었으므로 대타협을 들고오기에 이른다. ===대타협과 오-헝제국의 건국=== 본디 오스트리아 제국이 성립되면서 그동안 가지고 있던 작위들을 모조리 합쳐서 오스트리아 제국 작위에 합쳤는데 다시 헝가리왕국 작위만 풀어내어 동군연합 군주로 앉는다는 것이다. 이에따라 헝가리는 제국내에 잔류하는 대가로 의회와 내각과 총리를 따로 가지는 별개의 국가로 존재하게 되었다. 외교와 재정, 국방문제는 두나라가 합의해서 처리한다. 라이히스라트,헝가리 의회 같은 경우엔 외교 문제에 직접적으로 개입할 권리가 없었고 정확히 외교 예산의 승인 등의 문제는 1년에 한번 소집되는 대표부 권 한으로 결정되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외교 관련 문제는 황제가 주재하는 공동 내각에 의해 결정되었다. 여기서 황제는 절대적인 권한을 발휘할 수 있었다. 본디 지도를 펴서보면 헝가리왕국 영토가 좀 컸단걸 알수 있다. 그덕에 헝가리 귀족들은 불만있으면 들고일어나 황제를 갈궜고 이에 황젠 윽박지르거나 살살 달래거나 둘중 하나였다. 이번에도 그 연장선이었고 오헝제국안에 의해 피지배 민족에서 지배민족으로 격상되자 이에 만족하며 헝가리계 기득권 들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간것. 당시 타협시기쯤에 체코인들도 황가쪽에 권리를 증진 해달라고 부탁하였지만, 독일계 귀족들,헝가리 귀족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오스트리아 대공국은 영토가 비교적 작고 독일계 인구는 언제나 과반을 못넘겼다.(이것이 대러시아 민족이 과반수인 러시아와는 다른 민족정책,확장정책 을 보여주었다.) 근데 그건 2위의 인구를 차지하는 헝가리도 마찬가지였다.<ref>대충 오스트리아 23~24, 헝가리 22~23 정도였고 나머지는 슬라브계였다.(물론 슬라브도 체코인, 폴란드인, 슬로베니아인 등등으로 나뉨</ref> 반면 오스트리아는 전통적으로 금융업이 발달했고 독일계 다수지역인 수테텐은 공업이 발달했으며 이지역들은 자유주의적이었으나 헝가리는 그러지 못했다. 오스트리아는 민족유화책(이는 구상으로만 끝났던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의 대오스트리아 합중국 안으로 이어진다)을 사용한 반면 헝가리는 휘하 슬라브족들에게 강경책을 사용했다. 오스트리아계 독일인들은 정치적으로 제국에 영향을 받기보단 현실로 존재하는 '독일'과 자신들을 동일시하면서 합병(Anshluss) 을 가치로 내걸었다. 이후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이와같은 제국의 무관심은 커져만 갔고, 분리주의 성향을 점점 제국의 존재 자체를 위협할 정도로 커졌다. 이와 반대로 헝가리 민족주의는 타협 이후의 제국의 외교 정책에 활기를 불어주는 새로운 요소였다. 헝가리 민족은 1848 사태를 보고선 제국 밖으로의 생존은 힘들다 판단하고 자신들의 정책을 제국 외교에 반영하랴고 노력하였다. 러시아 민족의 발칸 개입 을 막기위해 적극적인 반 러시아와 정책을 펼치도록 노력했고 갈리치아 지역에 요새 현대화를 요청했다. 하지만 20세기 이후에 유럽의 안정을 보곤 제국의 공동군대는 헝가리 시점에선 자신들의 국력을 저하시키는 요소중에 하나로 보여졌다. 외교또한 주권울 침해하는 요소를 보는 이들이 늘어나기 시작하자 제국의 정치 활기는 다시금 줄어들었다. 이와 반대로 체코는 자신들의 불행한 일들이 있음에도 친오스트리아 정책을 유지했고 폴란드는 독일,러시아 지역보다 자치권이 낫다는 것을 보며 안심하였고, 나머지 민족 세력들도 친오스트리아 기조를 유지하며 자신들의 욕구를 제국을 통해 반영 시키랴고 노력했다. 하지만 이와같은 노력은 제국에서 받아드리지 못하였고, 자신들의 주제 이외에 외교 문제는 받아드리지도 않았다.
요약:
조무위키에서의 모든 기여는 CC BY-SA 4.0 라이선스로 배포된다는 점을 유의해 주세요(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조무위키:저작권
문서를 읽어주세요). 만약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문서를 저장하지 말아 주세요.
또한, 직접 작성했거나 퍼블릭 도메인과 같은 자유 문서에서 가져왔다는 것을 보증해야 합니다.
저작권이 있는 내용을 허가 없이 저장하지 마세요!
취소
편집 도움말
(새 창에서 열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