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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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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단의 역사== 1949년 11월 22일 다이요 웨일스라는 구단명으로 프로야구에 참가하였다. 더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면 1925년 임겸상점(현재의 마루하니치로 수산) 산하 실업팀이 이 팀의 시초다. 1930년 전일본 도시 야구 대항전에 첫 출전했고 이듬해 열린 주고쿠 대회에선 4강에 올랐으나 하필 경제 대공황이 터지면서 연식 야구부 빼고는 좆망했다. 2차대전이 끝나고 1946년 다이요 어업으로 이름이 바뀌고 기존의 연식 야구부를 경식으로 전환, 도시 대항전 단골팀으로 부상하였으며 1948년 전국 대회 우승까지 한다. 1949년 프로야구 확장 정책으로 인해 소속팀의 선수들이 마이니치로 차출된 것에 빡치신 다이요 수삼 사튽님께서 프로야구 참가를 선언하시니 이것이 구단 역사의 시초였던 거시다. 1949년 11월 22일 '''주식회사 마루하 구단'''을 설립, 구단명은 비공식적으로 마루하구단이라 정했다. 센트럴리그에 참가를 하기로 하였으며 [[야마구치 현]] 시모노세키 시를 연고로 하며 홈구장은 시모노세키 구장으로 정해졌다. 프로구단 만들때 있던 기존의 사회인 팀 다이요 어업 야구부는 해산되었으나 사튽님의 배려로 갈 곳 없던 선수들은 1951년까지 "전 시모노세키"란 팀에서 뛸 수 있었다. ===시모노세키 시절=== 1950년 시즌 개막 이후 구단명이 '''다이요 웨일스'''로 정해졌다. 뒤이어 구단 사무실도 시모노세키에서 도쿄로 옮겼고 기존의 프로구단으로부터 여러 선수들을 수급 받았지만 신생팀이 다 그렇듯 좋은 성적을 내지는 못했다. 1952년까지 3년간 564를 찍었다. 1951년엔 경영난에 시달리는 [[히로시마 도요 카프]]와 흡수 합병이 거론되었지만 히로시마 구단측과 히로시마 현지인들이 "야구단 죽어도 못 잃는다!!!"며 죽어라 매달려서 흡수 합병은 무산되었다. 1952년엔 느프브 최장기록인 20회 경기를 치르기도 했다.(대 쇼치쿠 로빈스 전) ===오사카 시절=== 1953년 1월 무렵 시즌 승률 3할 밑인 팀은 존나 많은 벌금을 물린다는(사실상 캐삭빵) 규정하에 전년도 승률 3할 밑이던 쇼치쿠가 다이요와 병합되면서 센트럴리그가 6개구단 체제가 되 버린다. 구단명도 '''다이요 쇼치쿠 로빈스'''로 바뀌었다. 1954년엔 다이요와 쇼치쿠의 통칭인 "요소"란 단어를 짬뽕해서 요소 로빈스가 되었다. 그런데 이 당시엔 말이 병합이지 사실 2개 기업이 1개 구단을 운영하는 식이었다. 애초에 연고지도 시모노세키와 교토를 썼고 선수 연봉도 각 기업에서 지급되었으니 완전한 병합은 아니었다. 홈경기는 흥행을 목적으로 오사카에서 했다한다. 1953시즌이 끝나서야 정식으로 병합 절차를 밟고 주식회사 다이요 쇼치쿠 구단이 출범하게 된다. 그래도 팀 성적은 개판이었다. ===가와사키 시절=== 54년 말 쇼치쿠가 구단 운영에 손을 떼면서 다시 다이요의 시대가 왔다. 구단명도 다시 다이요 웨일스로 바뀌었고 연고지도 가와사키로 변경되었다. 하지만 1955년 무려 31승 99패를 찍으며 좆망했고 이후 1959년까지 최하위를 벗어나지 못하는 악몽같은 암흑기를 지내었다. 그러나 대망의 1960년, 다이요는 암흑기를 끝내기 위해 니시테쓰의 3연패를 이끌었던 미하라 오사무 감독을 선임하였고, 그 해 대대적인 반격으로 사상 첫 센트럴리그 우승을 달성하며 꼴찌팀의 반란을 일으켰다. 이후 일본시리즈에서도 다이마이를 4대빵으로 좆바르며 사상 첫 일본 제일의 자리에 올랐다. V1 달성.<ref>여담으로 당시 다이마이 감독이었던 니시모토 유키오는 구단주에게 바보새끼란 폭언을 듣고 빡쳐서 감독직을 때려쳤고, 이후 한큐와 긴테쓰의 감독으로써 두 구단의 암흑기를 깨고 첫 우승을 포함한 전성기를 이끌었지만 정작 일본시리즈에선 8번 나가서 8번 다 져버리는 콩라인 감독 커리어를 타게 되었다.</ref> 하지만 이듬해인 1961년에 곧바로 꼴찌로 복귀해 버렸고 이후엔 1962, 1964년에 2위를 차지하며 한신과 우승경쟁을 한 것과 69~71년 3년 연속 3위를 찍은 것 외엔 하위권을 전전했다. 그나마 똑같은 꼴찌팀 동무였던 히로시마가 어울려 주나 싶더니 히로시마조차 75년에 첫 우승을 하면서 강팀으로 도약해 버렸고, 그렇게 다이요는 혼자서 밑바닥을 전전해야 했다. 성적이 개판인 것뿐만 아니라 경기장이 워낙 낡고 입지도 개떡이다 보니 관객들이 계속 오질 않자 다이요는 요코하마 시에 경기장 하나 지어주면 그쪽으로 간다고 찔렀고, 요코하마 시 측에서 그까이꺼 하나 지어준다 답해주고 [[요코하마 스타디움]]을 지어주자 다이요는 1977년 시즌 종료 후 요코하마로 연고이전을 했다. 그렇게 가와사키 시대는 끝났다. ===요코하마 시절=== 1978년 진행된 국토 계획으로 지어진 요코하마 스타디움으로 이전하면서 드디어 현재의 연고지인 요코하마에 정착했다. 구단명은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로 바뀌며 처음으로 지역명을 구단명 안에 삽입하게 되었다. 하지만 연고지를 옮겨도 못하기는 매한가지였다. 79년 모처럼 2위로 반짝했지만 결국 다음시즌 4위로 좆망행. 그 후로 1990년대까지 어쩌다 3위 오를 때 빼곤 하위권을 왔다갔다 하면서 지내었다. 하도 고래잡이가 욕먹다 보니 1992년 구단명을 '''요코하마 베이스타스'''로 바꾸며 지역 밀착형 시민 구단으로서의 발걸음을 떼었다. 물론 회사 명칭도 주식회사 요코하마 베이스타스로 변경되었다. 또한 애칭도 그간 사용했던 웨일스를 대체하여 요코하마 베이브릿지에서 영감을 얻은 "베이스타스"란 애칭이 탄생하게 된다. ===요코하마 베이스타스 출범 이후=== 1993년부터 1996년까지는 5645를 찍으며 안될팀은 안되는구나 싶었으나...(특히 1996년은 DTD로 망했었다.)1997년에 후반기에 급작스레 상승세를 타더니 1964년 이래 무려 33년만에 70승 넘기고 2위를 하면서 슬슬 우승권에 개겨보기 시작했고.. 1998년, 각성한 대마신 [[사사키 가즈히로]], 하마의 번장 [[미우라 다이스케]], [[사이토 다카시]], 로테이션제 중간계투진을 필두로 한 막강한 마운드와 비록 홈런수는 조금 적지만 뛰어난 교타력을 자랑했던, 한번 풀발하면 멈출 줄을 모르는 기관총 타선을 앞세워 요코하마 연고 이전 이래 처음이자 구단 사상 38년만의 센트럴리그+일본시리즈 우승을 달성한다. 이로써 V2 달성 그리고 이 우승 이후 요코하마 베이스타스는 2001년까지 3년연속 3위로 A클래스에 있었으나<ref>사실 2001년은 요코하마가 승률에서 히로시마에게 뒤져 4위여야 했으나 하필 이 해에 다승제라는 엿 같은 규정이 도입됨으로써 요코하마가 69승으로 68승인 히로시마를 1승차로 제끼고 3위를 기록하였다. 이 사태가 일어나고도 정신못차린 크보는 03~04시즌과 09~10년에 이 규정을 도입하였는데 09년에 스크가 이 ㅈ같은 규정때문에 우승을 놓쳤다.</ref> 마루하<ref>다이요가 구단명이 베이스타스로 바뀐 때와 비슷한 시기에 회사명을 자기들 브랜드명과 똑같은 마루하로 바꿨다. 참고로 요코하마 이전의 다이요 유니폼을 보면 소매에 빨간 선의 흰 동그라미(마루) 안에 빨간색 히라가나 하(は)가 그려져 있는데 이게 마루하 브랜드 로고다.</ref>가 야구단 경영에 진절머리 났고, 모기업도 슬슬 돈 못 버니까 2001년 말 TBS에게 구단을 팔았다. 그 후에 TBS가 구단 운영 방침을 기관총 타선을 버리고 거포 위주 타선으로 운영하는 방침으로 변경했는데 문제는 거포들 모으는 데만 집중하느라 투수진이 무너지는 건 신경도 안썼고 결국 투수진 붕괴로 제대로 좆망하면서 팀은 다시 암흑기로 빠져들면서 극심해로 파고들어갔다. 그나마 2005년에 우시지마 카즈히코 감독 휘하에서 3위로 A클래스를 찍었지만 승률 4할에 당시 파리그만 가을야구 하던 때인 데다 이듬해에 다시 꼴찌로 좆망했고 우시지마 감독은 성적 향상에 관심이 없는 구단에 질려서 사퇴했다. 그리고 그 뒤로 [[후루타 아쓰야]] 선수겸감독 휘하 야쿠르트의 DTD 덕에 후루끄로 4위 찍은 2007년 이후로는 계속 좆망한다. 심지어 2008년엔 자기네 수위타자 [[우치카와 세이이치]] 타율(.378)보다 낮은 승률(.338)을 기록하는 좆같은 기록을 세웠다. 괜히 우치카와가 호크스 이적 후에 친정팀을 무자비하게 디스한게 아니다. 2011년 11월 모바일게임 회사 DeNA에서 TBS로부터 구단을 인수하겠다고 밝혔고 요코하마 주식을 사 들였으며 느프브에 보증금을 지불하여 구단 소유권을 획득하였다. 그 해 12월 구단주 회의에서 3/4의 찬성을 얻어 정식으로 구단을 인수하였다.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 출범 이후=== 2012년 모기업이 바뀌고 팀명을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로 바꾸었고, 유니폼, 구단 깃발, 마스코트 등 대대적인 변화를 주었다. 새로이 바뀌긴 했지만 야구실력은 하루아침에 바뀌는게 아니라 2015시즌까지는 암흑기를 또 겪어야 했다. 특히 2015년의 경우에는 교류전에 돌입하기 전까지 1위를 달리다가 교류전 종료 이후 역대급 DTD를 시전해 꼴찌로 좆망하였다. {{예토전생}} 2016년엔 나카하타 감독의 유산들이 포텐이 터지고 로페즈, 쓰쓰고가 대폭발하며 98년 이후 장장 18년간 이어졌던 암흑기를 끝냈다. 구단 역사상 처음으로 클맥 파이널도 갔다. 놀랍게도 클맥 파이널에서 대기하고있던 팀이 [[히로시마 도요 카프]]였기에 세리그 파이널이 참 신선해졌다. 그렇게 작년의 도약을 가슴에 품고 시작한 2017년엔 다시 암흑기시절로 회귀한 야구를 하며 작년은 플루크시즌임을 보여주는듯 했으나 도쿄를 연고지로 둔 두 팀의 추락 덕분인지 3위로 2년연속 가을야구에 탑승했다. 심지어 2001년 이후 단 한번도 못 찍었던 승률 5할까지 찍었다. 올해는 세리그 가을야구가 히로시마,한신,요코하마라서 작년보다 더 병신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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