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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략 생애== ===초기=== 집은 잘살았다고 하지만 권력층과는 거리가 멀었다. 부모의 바람대로 과거를 쳐보긴 했으나, 청나라 과거는 머한민국 공먼시험 뺨따귀 쳐갈기는 수준으로 경쟁률이 헬이었기 때문에 번번히 떨어져 니트생활을 누렸다고 한다. ㄴ 어디서 공무원 시험을 들이대냐;; 사법고시보다도 훨씬 빡센 수준인데 그러다 부모 빽으로 이홍장 밑에 낙하산으로 작은 벼슬살이를 하다가 이홍장의 눈에 들어 승진하기 시작한다. 특히 임오군란때 민비의 요청으로 조선에 파병될때 따라들어가 그때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마치 조선의 청나라 총독처럼 굴었다. 이때가 그의 나이 23살 ===중기=== 대원군을 잡아가기도 하고 청일 전쟁 이후에도 승승 장구하였다. 변법자강운동에서 변법파에게 통수를 시전해 빅엿을 선사하고 보수파 그러니가 서태후밑에 들어가 승승장구한다. ㄴ 사실 이새끼를 믿은 것도 병신짓이었지만 이새끼한테 주도권을 준 것도 변법파였다.(그래서 믿어봤다고하는 논문도 있었었는데 알아서들 찾아봐라) 변법파가 리훙장을 운지시켰을때 나타난 권력공백에서 군권 가져간게 이새끼다. 그래서 변법파도 이새끼한테 접근한거였고. 먼저 쇼부보려했던건 엄연히 변법파가 맞다 의화단 운동을 진압하고 이홍장의 뒤를 이어 권력 실세로 군림한다. 그리고 그와중에 서태후가 죽고난 다음날 황제를 골로 보내버렸고 어린 선통제 푸이가 즉위한다. 1911년 드디어 한족들은 청나라의 지배를 도저히 못받아들이겠다며 신해혁멍을 일으켰다. 신식군대의 수장인 위안스카이에게 총리기무아문(수상)직과 함께 진압을 명령했으나 이번엔 청조에게 통수를 시전한다. 혁명의 리더 손문과 협상을 통해 혁명을 지지하는 대가로 자신에게 임시 대총통 자리를 넘기라는 것. 그러자 손문은 공화제와 남경을 수도로 하는 조건으로 수락했고 결국 푸이가 폐위되고 청나라는 몰락한다. ===후기=== 이후 약속은 거진 지키지 않으며 공화파를 탄압하며 전형적인 독재자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러던 와중 노망이 왔는지 일본의 21개조 요구같은 말도안대는 매국 조약에 서명하려 하면서 황제가 되는 병크를 저질렀고 이때문에 5.4운동과 제2혁명이 발발한다. 덕분에 소수의 지지자를 제외하고 외국, 머학생들과 국민혁명군에게 2중으로 극딜 당하자 제제를 취소하고 총통직으로 돌아가겠다 선언했으나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ㄴ 근데 황제되기 전에는 꽤 많은 지지 받았다. 사실 그건 그나마 남아있는 유력자가 이새끼였기 때문인데 이새끼는 이걸 '백성들이 나한테만 의지한당께'라고 해석함. 노망나서 그런건가(실제로 청조 통수로 끝내고 죽었으면 차이어급 평가받았을거라는게 정설이다) 결국 울분속에 화병으로 제명에 못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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