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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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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생 == === 관직 진출 === 재수끝에 무과에 합격했다. 처음에는 말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점수가 크게 깎여서 낙방했지만 2번째는 합격했다. 까짓거 재수할 수 있지 뭘그래. 재수해서 서울대 가는게 재수 안하고 서잡대가는 것보다 나은 거지, 안그래? 이순신은 식년무과에만 응시해 2번만에 합격했다. 조선은 무과에 있어 정기시인 식년시로 정예를 선발하고 그외 부정기무과로 여타의 무인을 충당했다. 재수해서 서울대 갔다라는 말이랑 그닥 매치는 되지 않으나 이해하긴 빠르겠다. -_-;; 수시 가 아니라 정시 라고 보면 돼!~ 한번은 상관인 서익이 원칙에 어긋난 인사를 지시했고, 거절했다.물론 나중에 트집잡혀서 파직된건 덤이다. 그 이후 녹둔도에 [[이일]]의 부장으로 임명되었는데 여진족이 쳐들어오자 이일은 도망치고 이순신은 이경록과 둘이 남아서 주먹질한 끝에 여진족을 무찌르고 조선 백성 60여명을 구출했다. 지장이라는 이미지가 강하지만 이분 녹둔도 전투 전적 보면 무력으로 최소 털린다는 소리는 쏙 들어갈 각, 애시당초 기초적인 무예가 있어야 무과에 급제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 두자. 활 사격실력만 살짝 부실할 뿐이지<ref>그나마도 평타급인데 [[이순신 (무의)|이름 똑같은 자기 부하]]가 워낙 명사수라서 그 부하에 비해 상대적으로 활을 못 쏠 뿐이었다.</ref> 주먹싸움은 농담으로라도 못한다고 할 수가 없다. 문제는 이일새끼가 그 군공을 지가 가로채고 이순신이 도망갔다고 서로 뒤바꿔서 날조해서 장계를 올렸다. 이 때문에 이순신은 군공을 쌓고도 오히려 백의종군했다. 나중에 여진족 우울한 우을기내를 깨고 사면되었다. [[류성룡]]이 어디 쓸만한 장수 없나 기웃기웃 거리다가 류성룡의 매의 눈에 포착되었다. 그때 류성룡은 이순신, [[원균]], [[권율]]을 선조에게 천거했다. 지금생각하면 이때 류성룡은 저기서 원균을 조졌어야한다. 아니면 차라리 동생 인 원연 을 기용 했었어야.. 조졌으면이야 좋았겠으나 류성룡은 노스트라다무스 횽아가 아니다. 단지 결과론이다. 원균이 그래도 무장인데 젊어서 아무 공이 없지는 않았다. 다만 시원찮았을 뿐;;; 또한 왜변대비를 위해 마음이 급했던 조정은 원균정도의 무장도 훌륭해보였을 것이다. 문제는 조선이 지금처럼 북쪽이 꽉 막힌 나라가 아니다. 오랑캐들과 일상적으로 사소한 전투들이 벌어졌던 나라이니만큼 무관이 많이 필요했단 소리다. 그래서 성품이 좀 그렇다손 치더라도 무관으로 임관시키고 '잘 싸우기나 하렴' 식이었다. 하도 이순신같은 완전체 코디네이터만 보다보니 조선시대 무관이 다 그럴거라고 생각하진 말자. 원균이는 그냥 [[장거한]]마냥 [[조아생 뮈라|키 크고 덩치가 엄청나서 싸움을 엄청 잘하겠지 또는 저렇게 덩치가 크니까 적들이 쫄아서 못싸우겠지]]라는 기대심리로 뽑아놓은 거지 원균 실력보고 뽑은 거 아니다. 문제는 똑같이 덩치가 컸어도 진짜 인간흉기인 조아생 뮈라와는 달리 원균은 그냥 덩치만 큰 병신이라는 데에 있다. 적어도 조아생 뮈라는 딴게 다 병신이라도 싸움 하나만은 미치도록 잘했는데 아일라우 전투에서는 나폴레옹 머가리 따기 일보직전의 러시아군에게 오줌을 지리게 만든 장본인이 바로 조아생 뮈라였다. 근데 원균은 뭐냐? 전투만 시작되면 도망치기 바쁘다. 북쪽 변방 오랑캐 방어에, 오만 왜구한테 털리고 왜변까지 결국 시기가 하 수상해지자 조정은 해안방비를 서두르게 된다. 실제 왜란이 터지고 몽진한 선조가 전쟁대비용(이라고 말하진 않았다...)으로 성을 쌓을수록 백성의 삶이 힘들어졌음을 몰랐다고 탄식하며 내린 교서가 있을 지경이다.<ref>사실 모르지는 않았지만 민심을 달래기 위한 교유서이다 보니 립서비스 한거라고 보면 된다. 대규모 토목사업은 백성들에게 원성사기 딱 좋고 나아가 왕권마저 실추되는 일이었지만 전쟁준비상 무리하게 강행했다. 특히 경상 방면에서는 대규모 축성공사에 유생까지 동원하여 진행해왔으며, 유생들은 원래 축성공사 같은 역에 동원되지 않는 이들인데 지역의 여론을 형성하는 지위에 있다보니 원성이 하늘을 찔렀다. 실제 전란이 일어난 후 영남관찰사이던 김수가 도망했다고 해서 지탄을 받고 유명한 의병장인 곽재우의 경우 상소를 올려 '김수의 죄는 머리털을 뽑으며 세어도 모자란다'며 극악하게 까다 못해 직접 잡아죽이겠다고 난리친 일이 있을 정도이다. 이같은 지방 여론때문에 도저히 함께 싸우지 못할 상태가 됐을 수도 있다.(그럼에도불구하고 도망간건 정말 잘못한 일이 맞다.)</ref><ref>그러나 급한 전쟁준비도 그렇지만 선조의 이미지 실추는 이 외의 일들도 있다. 이 인간은 의주로 튄걸로도 모자라 사직이라 일컫는 종묘의 신주는 아들인 광해에게 맡기고 조정도 반갈라서 나눠준 후 알아서 하라고 해놓곤 정작 본인은 요동으로 망명가겠다며 징징댔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 강을 건널 기세로 혈안이 되자 정철과 류성룡은 '왕이야 강 건너갈거 같고, 가고나면 연락이 안되니깐 걍 광해한테 왕 물려주라고 할까??'라고 의논하고 윤두수 횽아는 '너 거기가면 걍 동네아저씨 돼'라고 막말까지 퍼붓기에 이른다. 여담으로 미친듯이 개성으로 갔다가, 완전 미쳐서 평양까지 가서 4일 후 한다는 소리가 '어선을 풍족하게 하라'<s>반찬투정</s>였다.... ---- 조선왕이 망명오겠다는 공문을 받은 명나라는 이뭐병 싶기도 하고 막상 대놓고 오지말라고는 못하겠고... 결정적으로는 조선에 왜놈들이 쳐들어왔다고 보고가 올라가자마자 곧바로 조선왕이 망명하겠다고 하니까(이건 미친듯한 왜군의 진군속도도 한몫했다. 개전 후 평양성 털리기까지 불과 며칠 안걸렸다. 부산 상륙해서 죽자사자 걷기만 해도 힘든데 탄금대를 비롯한 육상전투까지 병행해서 온 속도다;;;) 예전 소문대로 '이 쉐들이 진짜 왜놈들이랑 짜고 쳐들어 올 모양임???'하고 의심을 풀지 않았다. 하니 '정 오고싶음 오는데 수행원은 백명만 데려오셈^^'이라고 답을 보내고, 배도 전부 자기쪽 나루에다 묶어두어서 헤엄이라도 쳐서 올래?? 식으로 대응했다. 왕은 사냥한번만나가도 수행원이 이삼천은 된다;;; 결국 명나라도 못 오게 막은거다. 이러다보니 임란 후반부로 갈수록 왕의 권위가 땅바닥서 굴러다녔다 카더라.... 신하들이 '광해에게 선위하심이 어떠심??'하고 갈궈도 보통때 같음 역모라고 난리칠 일임에도 그 말 한 신하들을 처벌도 못했다니 말다했음;;;</ref> 원균 역시 급한 마음에 오용된 무인 중 하나라고 조심스럽게 추측해 본다. 그리고 음으로 양으로 원균이 바친 뇌물의 양은 상상을 초월했다 카더라.. 이 때 이순신은 처음으로 권율을 만났는데 서로 마음이 잘 맞아서 이후로도 계속 편지를 주고 받았고<ref>사이가 좋았다기보다 충무공과 권율은 서로 예를 갖추고 공무에 최선을 다 하는 사이였다. 난중일기상 군인 징발 문제로 충무공께서 권율을 까는 기록이 있다.</ref> 급기야는 이순신이 자신의 수군에서 쓰던 함포 중 몇 개를 권율에게 뗘다 줬다. 권율은 이걸로 행주대첩의 결전병기로 활용했다.<ref>전란중의 공무원으로서 개인적인 군공만 탐하지 않고 서로 최선을 다 했기에 이런 장면도 나올 수 있는거다. 원균 시키는 명나라에서 보낸 1,000정이 넘는 화약무기를 혼자 사용하겠다고 난리를 치는지라, 뭐 저런 새끼랑 큰일을 같이 하겠냐며 충무공께서 한탄하신 바 있다.</ref> 그리고 원균에게는 지금까지모은 병력을 전부 반강제로 주게되었는데 그원인이 조선왕조실록 역사상 희대의 씹노답새끼 [[선조]]다. 아이언4 원균은 챌린저가 쓰던계정을 먹고 자기가 챌린저라는 자기최면에 빠져 챌린저계정을 아이언4로 만들어놓는다. 그 뒤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이제서야 느껴진 선조는 갓애드머럴을 다시 소환하고 양학방송을 킨다. 그래봤자다. 나름 임금님이신 선조, 이연은 삼도수군통제사에 원균을 앉혔다. 그런데 이순신의 파직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파직시키고, 원균앉히고, 칠천량에서 조선수군과 군비를 깡그리 수장시키기까지 일년도 채 안걸렸다. 그제서야 '내가 죽을수도 있겠다' 싶어서 치트키를 입력하긴 한다. 치트키가 상당히 웃긴 한문인데 일명 '상하언재(머 할 말이 있겄니;;)교서'다. 나름 임금이란 사람이 제손으로 쫓아낸 공무원에게(곱게나 쫓아냈나...) '할 말은 없는데..;; 다시 와줘 징징징' 스킬을 구사하신 거다. 이 얼마나 모양빠지는 일인지 대충만 봐도 그림이 나온다. 그런데 징징대는 척 하며 삼도수군통제사 임명교서를 내린 건 좋은데 품계를 정2품 정헌대부에서 종3품 절충장군으로 강등해서 내린 것이다. 이는 ' 내가 겁나 급해서 널 다시 오라고는 했는데 너 사실 맘에 드는건 아니야' 하고 무언으로 시위한거다.<ref>이후의 정황들이 흠좀무하다. 난중일기를 토대로 하면, 충무공께선 명량 승전 후인 정유년 10월에 접어들어 아산 습격을 인지했고 14일에 아들 면의 사망 소식을 듣는다. 아들이 죽고 부친으로서 미칠것같은 상황(게다가 정유년 초엔 본인이 서울로 압송당해 고문당하고 불과 얼마 후인 4월 10일 전후로 모친인 변씨부인마저 사망하신 상태였다.)인 11월 중순에 명량승첩에 대한 조정의 군공기를 읽게 되는데 부하인 안위가 통정대부로 본인과 동급에 가자됨을 알게 된다. 충무공께는 그닥 중요하지 않은 일인지 그냥 그랬다고만 적으셨지만 일반인이라면 피꺼솟...(더 대단한건 이래도 임금 욕 한 줄을 안 쓰셨다;;;; 그노무 임금시키땜에, 혈육들이 사망했음에도 제대로 울지도 못하고 상복도 못 입는 상황에 내몰렸는데도;;)공교롭게도 군공기를 읽은 다음 날 면사첩을 수령했다고 기록하고 계셔서 떡밥중 하나가 되기도 하지만 면사첩은 '칼의노래'에서 증폭된 대표적 떡밥.</ref> ㄴ 씨바... 해군참모총장의 계급을 대장에서 은근슬쩍 준장으로 내린거네. 선좆 병신새끼... 좀 지나니 이연은 수군을 폐하겠다며(잘나가던 수군을 하루만에 쳐말아잡숫더니 이시점에 거의 미친듯....그럼 통제사 임명교서는 왜 내렸냐) 헛소리를 한다. 사실 이게 이연만의 문제도 아닌게 비변사 당상이란 시키들이 계속 부추기기도 했다. <ref>구차한 쉴드 하나 치자면...이연이나 비변사 당상들이나 그냥 평범한 인간이라 그랬다. 전선 열두척뿐인데 제아무리 이순신인들 뭘 우짤라고 이랬던거다. 말그대로 데우나 엑스 마키나인걸 몰라서 그랬다카더라.....</ref> 난이 또 터져서 왕이 다시 몽진간다 치더라도, 시간을 벌려면 최대한 수군이 서해를 막아주길 바래야 하는게 상식이다. 비록 전멸하더라도 말이다. 도로사정이 병맛같았던 조선땅이고 보면, 서해가 뚫린다는건 바로 마포나루에 비단이불 깔아놓고 일본군을 맞이하겠다는 소리나 다름없다. 물론 일본이 수륙병진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고는 볼수 없는 행태를 저지르긴 했지만 이건 그냥 결과론이다. 전쟁흐름상 최악을 가정할 수 밖에 없다. 이순신은 이를 우려한 때문에 그 전력으로라도 바닷길을 막아보고자 필사적이었다. 죽음을 각오한 행보라고 밖에 볼 수 없다.<ref>이 내용이 바로 그 유명한 상유십이 장계의 주 내용이다. 하도 열두척이 유명해서 열두척으로 잘해볼게염 이라고만 했다고 생각하지만, 장계 전체의 맥락상 '서해를 눌러 막아야 한강침탈도 막을수 있으니 열두척으로 전멸하더라도 막아보겠음.' 정도로 읽는게 맞다. 뼛속까지 유학자이셨던 충무공이시다보니 암만 엿같은 왕이어도 최우선으로 지켜야했다.그래서 열두척이나마.... 하고 고집피우신거다. 말그대로 여기서 죽겠음.</ref> 그런 상황에서 수군을 폐하라는 헛소리가 작렬하자 이순신은 장계를 하나 써 올린다. 일명 상유십이 장계. '신에게는 아직 열두척의 전선이 남아있습니다. 전선의 수는 적으나, 미천한 신이 죽지 않고 있으니 적들이 감히 우리를 얕잡아보진(도모하진?? 침범하진?? 해석은 많다. 한문음은 '불감모아의'다.) 못할 것입니다.<ref>완전 빡치신거 아닐까 싶기도 하다. '미천한 신' 이란 말은 워낙 자주 쓰이는 관용구일 뿐이고, '잘난 내가 살아있으니까 함부로 못올거요'라는, 약간은 거만해보일 수도 있는 말을 왕에게 직접적으로 하신 것이니...;; 하지만 평소 인품상 그러실 분이 아니긴 해서 '그냥 죽을때까지 막아 볼테니 그동안 도망이라도 잘 가시쇼' 정도로 읽는게 나을듯;;;</ref> 같은 상자 돌림이라도 격의 차이가 현격하다. 이연의 상하언재 와 이순신의 상유십이. 그리고 더 웃음이 나는 것은 상유십이 장계를 받아본 의심병 환자의 표정이다. 이연은 아마 왜적보다도 이순신을 씹어먹고 싶지 않았을까 ㅋ 전란중 분조와 종묘사직의 신주를 받들고 분발한 아들 광해조차 의심해서(이것도 겁나 웃긴게 그렇게 하라고 했던게 이연이다.<ref>이래놓고 본인은 중국으로 망명가겠다고 찌질거려서 왕으로서의 체통따윈 똥딲은 휴지쪼가리가 되었다. 그나마 왕실의 명예를 지킨 이가 스무살도 안된 광해이고 그외 장성한 아들 3놈은 싸이코패스다. 임해군/순화군 두놈은 전란중에도 하도 개막장 짓거릴 해대서 백성들이 일본군에 그냥 넘겨버리는 사태까지 겪다보니, 광해 저놈도 내 아들인데 다른 아들놈들과 달리 왜저리 잘났는지 몰라서 의심했다 카더라....</ref>)오만 난리를 피운 이연이라 이순신에게도 그랬다. 명량해전 후 어사육, 주를 내리는데 이순신이 이를 받고 엄청 민망해하는 내용이 난중일기에 실려있다.(다만 충무공께선 먹었다고 기록하시진 않았다. 아마도 안드신 모양..) 모친상 중이던 이순신에게 '고기쳐먹어' 하고 어사품이라며 내리는 이연의 심리상태를 보면 아들들이 왜 다 그 꼬라진지 알수가 있다.<ref>사실 세종도 황희에게 이런 적이 있다. 황희가 모친상을 당했을 때 어사육을 내렸다. 그런데 상황이 매우 다른게, 황희는 고령으로 사직상소를 주기적으로 올렸지만 결국 윤허가 안되었다. 모친사망시에도 고령이라 세종은 진심으로 황희의 건강이 염려되어 <s>죽어버려서 일 못시킬까 봐...</s> 고기를 내린 거였다. (결국 황희는 본인 나이 팔순이 넘어 <s>조선초기에 팔순이면.... 초 장수만세하신 황희님</s> 참고로 조선왕 중 팔순 넘긴 왕이 딱 하나 있는데 그게 [[영조]]임금이다. 제위기간 52년에 82살 사망의 위엄. 세종이 죽은 다음 해에 겨우겨우 사직할 수 있었고 바로 사망.... #유정현# 과로사 수준임;;;) 그런데 충무공께서는 불과 몇달 전에 본인을 파직시키고 죽여버리겠다고 고문하고 앙앙댔던 왕이, 싸움 한번 이기니까 특별히 챙겨준다며 모친상중인 충무공께 고기를 내렸다. 말그대로 이 뭐 병.... 놀리냐??? 세종대왕과 이연은 이리 다르다...</ref> (유교사회에서 부모상이 괜한 일이 아니다. 3년간 부모님의 무덤옆에 초막을 짓고 거기서 풀만먹고-부모상 중에 술먹고 고기먹다 걸리면 난리나는 거다- 사는 것이 바로 3년상이고 상제가 해야할 의무이며 그 기간동안 임금이 불러도 즐때릴수 있는, 엄청난 일이다. 조선조에 재위기간 짧은 왕들 중 상이 연달아 나서 건강을 해쳐 정작 재위기간이 짧은 왕들이 종종 있을 지경이다. 그 대표격이 완전체의 아드님이시자 본인 또한 완전체이신 문종. 충무공은 죄도 없이 파직되어 고문당하고 건강까지 해친 마당에 이연이 뭐 할말이 없소 라고 모양 빼가며 교서를 내려도 '울엄마 돌아가셨셈!!!'<ref>게다가 충무공 모친이 돌아가신 상황이 매우 공교롭다. 모친이신 초계 변씨 부인은 당시 굉장히 고령이시긴 하셨다. 그런데 아들 형제 중 요절한 2명을 대신해 셋째아들인 순신이 어머님을 가까이서 모시려 하다보니 여수 모처에 기거하고 있었다. 그러다 아들이 서울로 압송되고 더 이상 여수에 머무를 이유가 없어졌다. 그래서 아산의 본가로 가기위해 배를 타고 오시다가 안흥량 쯤에 내려 사망하신걸로 보인다. 충무공께선 모친의 임종을 못 지킨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어떤 놈 때문이다;; 여담으로 변씨부인께선 본인이 사용할 관곽을 배에 싣고 오셨다. 워낙 고령이고 병중이라 오래 살지 못하실 것은 아셨겠지만 관을 싣고 오시다니 예감이 있으셨던 듯.</ref> 한마디면 다시 그 징글징글한 통제사 안하셨어도 됐다. 그것이 조선사회다. 근데 하셨다....ㅠ) 조선 조정 파벌 싸움질은 거의 일본 제국 대본영 수준이네ㅋㅋㅋ ㅗㅜㅑ 수도 털리는 와중에도 치트공 견제 오짐 ㅋㅋㅋ === 전략, 전술 === 이순신은 16세기 당시까지 세계 어디에서도 없던 수준 높은 군사적 전략 전술을 발휘한다. [[포위섬멸전]]으로 알려진 그의 대표적인 학익진 전술은, 일반적인 학익진이 아니었다. 후퇴하는 척 하다가 180도 선회, 반전하며 적을 포위하는 것은 대단한 훈련과 기술, 지휘 통제가 없다면 불가능한 전술이었다. 16세기 말부터, 서양사의 입장에서 볼 때 대항해시대를 거치며 해전의 양상이 바뀐 시기이다. 그 전까지만 해도 동서를 막론하고 해전이라면 '충각+도선+백병전'으로 끝장내는 형태였다. 그러나 이 시기는 화약과 화포가 발전하면서 멀리 있는 배를 화포로 박살내고 잔여의 적을 정리하는 형태로 서양의 해전 트렌드가 바뀌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비슷한 시기에 조선에서 이런 전술을 쓴거다. 이순신이 이런 서양의 트렌드를 알아서 그랬을까?? 아니다. 서양이야 해양쪽으로 워낙 난리 치다보니 연구한거겠지만 조선은 그런 국가가 아니다. 그리고 누가 알려준 것도 아니다. 그런 트렌드가 전래되려면 못해도 백년은 걸린다. 거리문제도 있고 실제 이랬다더라 들었다 한들 실험해보고 하는 시간이 엄청났을 것이다. 이순신은 화약과 화포가 발전하는 양상을 선구적으로 해전에 응용한 거다. 또한 명중률이 낮던 당시 화포를 개량하려는 노력이 난중일기에 기록되어 있고, 군사훈련에 심혈을 기울인 모습을 통해 해전의 신, 나아가 적들에게 있어 자연재해로까지 보이는 불패신화를 만들었다. ㄴ사실 조선수군이건, 왜선이건 서로가 화약(화포/조총)을 쓰기도 하지만, 나무로 만드는 배다 보니까 화공이 어느쪽이든 효과적이라고 본다. 그러니까, 화포로 방패들을 깨부수면서 왜군들을 헤집으면서 화공을 갈기고, 여기에 불을 끈다고 노출이 되는 왜군들을 다시 화포와 화살로 쏴버리면 매우 효과적인셈이다. 대신에 군사들 입장에서는 저기 수급이 둥둥 떠내려간다고 입맛다시겠지만. 또한, 상당수의 전투에서 조선 해군이 일본 해군에 비해 숫적으로 매우 부족하여 불리한 경우가 많았다. 현대에 정립된 란체스터 법칙에 따르면 전투 시 약간의 숫적 불리함도 치명적인 단점이 되어버린다. 이순신은 이때문에 기발한 전략 전술과 [[기습]] 공격, 그리고 실제 전투가 벌어지는 전장에 함선과 화력을 집중 투입하여 전체적인 숫적 불리함을 극복해낸다. 예를 들어 10척으로 적 20척과 싸운다면, 적의 20척이 한 번에 전선에 나서지 못할 상황을 만들고, 아군 10척으로 소수의 적을 차례로 압도, 수색 섬멸 작전으로 축차소모시켰다. (물론 [[명량 해전]]처럼 집중할 화력조차 전무한, 제대로 된 전략 전술의 실행이 불가능한 전투에서도 이순신은 승리했다. 이건 '뛰어난 전략 전술' 정도의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불가능한 상황을 극복해낸 것이기에 딱히 할 말이 없다. 이순신이니까 할 수 있는 일이었다.<ref>실제로 이순신 장군도 난중일기에 승리한것은 하늘이 내린 행운이라 할 정도로 말도 안되는 전투였다</ref>) 가끔 혐한, 일뽕 파오후들은 보급선이나 털어먹은 겁쟁이라고 병신승리를 하고는 하는데 이순신이 한산도 대첩, 명량해전, 노량해전에서 숫자가 많은 일본군을 얼마나 처참하게 팼는지 모르는 능지를 지녀서 그렇다. 한산도 해전에서 와키자카는 학익진 다구리에 미역 먹으며 버텨야 했고 구루시마는 12척 상대하다 목따였고, 전국시대 명장이라는 시마즈까지 이순신 작전에 걸려들어서 일방적으로 털리다가 대장선 침몰하고 물에 떠다니다 목따일 뻔했다. 거기다 이순신은 본진 지원도 못받은 채로 멀티 하나에 의존, 병력을 최대한 보존하며 적은 병력으로 최고의 효율을 유지하고 다녔을 뿐만 아니라 무능한 본진에 지원 물자를 보내기 까지 하였다.<ref>난중일기에 따르면 비변사에서 공문이 내려와 '종이'를 보내라고 했다 한다. 충무공께선 종이를 보내긴 하는데 짊어지고 갈 사람이 너무 힘들겠어서 우선 이것만 보내야겠다고 기록하신 바 있다. 전쟁 전반을 지휘해야 할 비변사라는 최고 기관이 가장 후방에 앉아서, 최전방 야전의 장군에게 기껏 한다는 소리가 '종이 좀 보내라'인건 코메디인데, 종이를 보내며 지고가는 사람이 너무 무겁겠다며 걱정한 충무공의 심정을 헤아려보면 참 웃프다.(이 망할 비변사 새끼들, 즉 당시 조선 조정은 충무공껜 쌀 한 톨 지원안해 준건 충격과 공포라 할만 하다. 그래놓곤 원균한테는....암튼 비변사는 맨날 뭐 좀 보내달라고 했다. 실록에도 선조가 '전라도에서 온 종이'를 육군에 나눠주고 종이옷-비옷 정도로 쓰이는 지의를 말함-을 만들어 입히라 한 기록이 있는데 충무공이 보낸 종이인지는 불분명하나 아마 맞을 것이다.) 충무공도 장계에서 '조선이 그나마 폼이나마 나라랍시고 유지하고 있는건 전라도가 아직 갠츈해서 글코요, 이건 오로지 수군의 힘임요'라고 쓰신 바 있다. 그리고 뭐 하나 좀 보내달라고 요청하신 일이 없고 다만 수영에 이질이 돌아 수군들이 무더기로 죽어나가자 '의사 좀 파견해 주세요' 라고 요청한 것이 다다. 조선수군은 전투에서의 사망보다 굶어죽은 아사와 이질로 인한 병사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 피난을 좌수영으로 오는 백성들이 늘어서 '무인도 하나에 피난민을 정착시켜서 농사짓게하고 군량도 걷으면 어떨까요?'하고 장계하기도 하셨는데, 그 전란중에, 그 당연한 일까지 임금의 허락을 구하는 모습을 보면 충무공은 진정 유자(儒者)셨다.</ref> 언제나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드는 것은 지휘관의 기본중의 기본이다. 게다가 나중에는 부산포 얻어 터지고 이순신 털려고 공격했다가 역으로 대판 털린건 뭐라고 설명할 것인가? 가진건 있는데 눈뜨고 당하고 역으로 털리는 놈이 병신이지ㅋㅋㅋ 당장 해전이 아니라 롤이나 스타 같은 게임만 보더라도 이길 수 있는 전장에서 이길 수 있는 싸움을 하는 것 자체가 명장을 만드는 대단한 판단력의 결과물이다. 이거 못해서 유리한 상황에서 꼬라박고 지는 경우가 한두번 있는것도 아니고.. 이걸 그저 이길 수 있는 싸움만 한 겁쟁이네 하는 건 빡대가리 새끼들이나 들고 나올 논리<ref>이런 논리로 충무공을 까는 아이들에겐 손자병법을 읽어보길 권한다. 충무공을 까려면 사실 기본적인 밀리터리 지식은 있어야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깔수 없는 분임을 명심해라. 까려고 공부하다가 오히려 충무공 동상만 봐도 절하는 놈이 생겼다 카더라...</ref> 이자 장수에게 할 수 있는 큰 칭찬을 모욕인 줄 알고 하는 짓거리인데 이딴 소리로 갓갓갓 장군을 깎아내리려는걸 보면 혐한이네 일뽕이네 걸려서 헛소리 하고 다니는 애들 대가리 수준도 짐작이 가능하다. 근대 이후의 화약무기와 달리 적 함선을 부수려면 적어도 십여발 이상의 함포를 명중시켜야했고, 숫자는 상당히 열세였기에 이를 극복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즉, 화력으로 숫자를 무력화시킨 것인데 이는 앞서 언급한 [[란체스터 법칙]]을 수세기 이전에 해전에서 실행한 것으로 대단히 시대를 앞선 것이다. 일본에 비해 조선 해군의 사상자가 극도로 적었던 것도 이런 뛰어난 전략 전술 때문이었다. 불멸의 이순신의 영향으로, 충무공이 그저 [[화포]]빨로 빵야빵야하자 왜군들이 녹아내린거라고 오해하는 경우가 좀 있다. 근데 당시 화포기술상 흔들리는 배 위에서 최대사거리에 있는 적을 정확하게 쏘는건 거의 불가능하며, 함상에서 화포가 높은 명중률을 보이려면 70m이내에는 적이 들어와야 한다. 또한 100m가 넘어가는 시점부터는 명중률이 존나게 급락하기 시작한다. 근데 조총의 사거리는 50m이므로 50~100정도의 거리를 항상 유지할 필요가 있었는데, 이게 얼마나 어려운지는 설명 안해도 알 것이다. 그리고 위에 언급했듯이, 당시 화포는 한방 명중시킨다고 적선을 격침시키는 그런 무기가 아니다. 갑판을 맞춘다고 하더라도 드라마나 영화처럼 포탄이 폭발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 그 자리에 있는 적만 죽는다. 쉽게 말해 화포빨 드립은 개소리다. 물론 화포가 전공에 영향을 준거는 맞는데, 화포의 장점을 살리고 단점을 상쇄시킨건 순전히 제독의 능력이다. 화포가 그렇게 씹사기 무기라면, 원균은 몰라도 이억기 정도의 능력이었으면, 충무공과 연합 안하고 단독으로 전라우수영 함대 이끌고 왜군을 썰고 다녔어야 했다.<ref>이억기나 무의공(이분도 이름이 이순신;; 당연히 한자는 다르다) 같은 당대의 수군장수들은 뛰어난 지휘관이었지만 동료 중 하나가 God이시니 어쩔 수 없이 좀 급이 떨어져 보인다;;; 매우 안타까운 일.</ref> 게다가 민중사관쪽 병신들은 이순신만의 힘이 아니라고 까내리지만 단지 이순신이 [[원균]]으로 교체되었는데 칠천량해전이 터진 건 해명을 못한다. 원균이 세상에 둘도 없는 상병신이라 그렇다고 하지만 그게 지들이 까는 영웅주의 사관론과 뭐가 다른가? 민중도 고생했지... 근데 고생도 이순신 밑에서 했으니 살아남기라도 한거다. 원균 밑에서 하다간 뼈도 못추린다. 민중사관도 좋지만 이런 특이한 경우엔 좀 갖다붙이지 마라. 공부안한거 티난다. <ref>글고 민중사관 님들아... 난중일기 좀 처음부터 끝까지 꼭꼭 열번이상 씹어가며 정독 한 후에 그런 소릴 해라. 그 시절에 그래도 양반인 충무공이 개인적으로 일기를 쓰면서 본인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었던 노비며 천민들의 이름은 죄다 기록하셨다. 말그대로 일기에, 남 보여주려고 쓴 글도 아닌데 말이다. 다른 양반님네 기록들에 이런 천민들 이름 간혹가다 나오기야 하겠지.. 근데 그건 일기가 아니고 그냥 후대에 남기려고, 말그대로 남 보라고 쓴 글이기 때문에 난중일기랑은 차원이 다르다. 어찌보면 충무공이 민중사관의 원형인 분이다. 함께 고생한 민중들 안잊으려고 일기에 적으신 거란 말이다. 그런걸로 충무공 까려면 먼저 난중일기부터 읽고 공부좀 해라. 겁나 빡친다.</ref> 그리고 불멸의 이순신 감독이 말하길, 화포로 적선이 와장창 깨지는게 잘못인지 알지만 보는 맛이 있고, 시원시원하기 때문에 그렇게 만든거라고 한다. 또 이런 전략 전술을 달성하려면 필연적으로 군대의 정예화가 필수였기 때문에 임지에서 병졸이나 휘하 장교들 졸라 갈궜다. 죄질 안 좋으면 모가지 뎅강. 이거 가지고 이순신 까들이 ㅈㄹㅈㄹ 거리는데, 요즘 헬조선 똥별들처럼 사소한 것까지 흡집 잡아서 갈구기 위해 갈군 게 아니라 진짜 필요한 거라서 부대 엎은 거다. 당시 조선 수군은 실제 전투훈련보다 세금 실어나르는 드랍쉽 질만 하는 등 개판이었고. 실제로 능력은 있지만 게을러서 뺀질거리던 [[김완]] <ref>게을러서 아마 구를때 정말 힘드셨을거라고 생각되는 분이다. 그러나 김완장군은 그때 구르는 바람에 칠천량에서도 살아남아 포로로 잡혀갔다가 탈출까지 해서 돌아왔다. 그래서 해소실기 같은 저서를 통해 칠천량 해전에서 대장균의 활약이 어떠했는지를 절절히 남겨주셨다.</ref> 같은 애들도 이런 과정을 통해 발굴해냈다. 구르는 입장에서야 ㅈ같지만 이런 혹독한 단련 덕분에 이순신이 지휘하는 수군은 전사자보다 비전투손실(질병, 사고 등)이 훨씬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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